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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가의 어떤 여자

# 사마리아 # 남편이 다섯 # 우물가의 여인 # 그리 심 산과 예루살렘 성전 # 야곱의 우물

수가의 어떤 여자

요4:1-26

본문은 참 기구한 삶을 사는 한 수가 지방의 여자와 예수님과의 대화입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은 니고데모와 예수님과의 대화도 그렇고 나다나엘과 대화도 요한이 그 핵심만 뽑아서 요약한 것임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대화 내용이 매끄럽게 연결 되지를 않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예수님의 말씀 “내가 바로 그 메시야 곧 그리스도다”가 가장 핵심적인 메세이지입니다. 바로 그 사실을 증거 하시기 위하여 사마리아의 수가, 이곳 우물까지 찾아오신 것입니다. 요한은 2장의 나다나엘과 3장의 니고데모, 그리고 4장에서 이 여자를 소개합니다. 사회적 신분 등으로 보면 앞의 두 사람과 지금 이 여자는 비교할 수도 없는 사람이지만 어두움에 놓여 있다는 공통점과 그래서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 심 산이냐 예루살렘이냐

사실 이 본문으로 설교를 하려고 보니 설교해야 할 주제가 참으로 많이 보입니다. 이것을 차근차근 다 말을 하면 매우 많은 분량의 설교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선 이 여자가 말하는 “그리 심 산과 예루살렘에서의 예배”에 대한 질문과 관련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연속되는 후편에서 이 본문에 나타난 중요한 메세이지를 다루어 가려고 합니다.

본문을 조심스럽게 보면 이 여자가 “이 산(그리 심 산)에서 예배하는 것이 옳은가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 것이 옳은가”를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다소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것으로 보입니다. 주님이 그 여자에게 남편 이야기로 그 심중을 찌르고 들어가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보인 여자의 반응은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입니다. 이 말은 그렇게 의미심장한 의미에서의 선지자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사람이 선지자라는 말을 쓸 때는 엘리야나 엘리사 같은 그런 하나님의 종들을 말하기보다는 당시 선지자라고 주장하면서 신비스럽게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영역 안에 있는 자로 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주여”라는 말도 신앙 고백이기 보다는 당시 존경받을 만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붙이는 자신을 낮추는 호칭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리심 산과 예루살렘 이야기를 꺼낼까요? 어떤 해석을 보면 이 여자가 신학적 관심이 많은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렇게 볼 수가 없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이것은 어설픈 신학적 질문이 아니라 이 여자 자신의 불행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알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렇게 생각하는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수가 여인의 상태

이 여자는 본문이 밝히는 대로 이미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남자는 남편이 아닙니다. 이 말은 지금 그 남자는 당시 관습으로 볼 때 합법적인 남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여자에 대한 정보는 이것이 다입니다. 청중들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하여 이것저것 상상하여 극적으로 그 여자의 과거를 소설 쓰듯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남편이 다섯 이었던 이유가 뭘까요? 우리는 자세히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이 말하듯 욕구에 의하여 남자를 이렇게 바꾸어 가면서 산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시각으로는 사마리아 인들이 그들보다 비 윤리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당시 분위기에서 여자가 남자를 임의로 바꾸면서 살 수 있었다는 것은 생각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그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계속되는 남편과의 사별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약 이런 것이었다면 그 심령의 고통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이상 이었을 것입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어떤 이유로 버림을 받았을 것입니다.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든가 아니면 출산을 못 한다든가.. 또 우리가 생각해 낼 수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선가 지금의 남자와는 합법적 결혼 관계를 맺을 수도 없는 아픔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입니다. 당시 여성은 자신의 의지로 남자를 바꿀 만큼 능동적일 수 없었습니다. 이 말은 그에게 일어난 일들은 다 수동적인 것으로 피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된 책임이 마치 그 여자에게 있는 것처럼 인식 되던 시대입니다. 멀쩡한 남편이 죽으면 그가 병으로 죽었든지 사고로 죽었다 하더라도 여자가 죄인 아닌 죄인 취급을 받던 것은 현대 우리 사회에서도 경험 했던 일입니다. 낮 12 시에 물 길러 나왔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잘 아는 대로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을 될 수 있는 대로 피하는 것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을 피하여 자연인처럼 산속에서 사는 것도 아니고 대중 속에 살면서도 철저히 고립될 수밖에 없는 요즘 말로 하면 철저한 사회적 약자요 소수 중 소수입니다.

사실 우물가라는 것은 여성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정보 취득의 장소요 어떤 의미에서는 스트레스 해소의 장소일 수 있습니다. 20kg 이상의 물동이를 들고 다니는 육체적인 고생스러움이 있지만 우물가에서 그것을 충분히 보상받을 수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 시간은 여성을 위하여 제공되는 휴식과 재 충전의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에게는 그마저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을 매우 기구한 운명의 여자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당시는 자신의 선택과 관계없이 당하는 모든 어려움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도 이 여자는 나름대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았던 사람인가 봅니다. 평소에도 하나님께 이런 질문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문득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시간을 내어 하나님께 이 문제에 대하여 질문도 하고 하소연도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로 보이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노골적으로 “제게 무슨 문제가 있어서 이렇게 삶이 기구하게 되었을까요?”라고 묻는 대신 그리심 산과 예루살렘에 관하여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그것이 정통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 속에서 사마리아가 불행하게 되면서 예루살렘 예배에는 참여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성산이라 여기던 그리심 산에 그 예루살렘 성전과 유사한 것을 만들어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다가 유다와 갈등으로 인하여 BC 100 경에 유대인들에 의하여 그리심 산의 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그 후 그래도 파괴된 성전 터에서 예배를 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그런 부류가 아니었는가 생각됩니다.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하더라도 과거에는 누구 못지않게 하나님을 바라보고자 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충분히 추측이 가능합니다.

혹시 이런 하나님과의 가장 근본적인 예배가 잘못된 문제로 인하여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나의 하소연을 하나님이 외면 하시는가? 그렇다면 나는 그냥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남은 생애도 한숨과 눈물 속에 살아야 하는가? 그리심 산과 예루살렘 예배가 그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문제였다면 늘 하나님께 이런 질문을 하였을 것입니다.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주님은 이 여자의 심령에 참 빛을 주십니다. “여자여, 그것 하고는 상관없습니다.” 이제 “신령과 진리로 예배할 날이 옵니다” 이 말은 예배의 가장 기본 원리입니다. 예배자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예루살렘 아니라 그보다 더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예배 행위를 한다 해도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저 자신의 심리를 달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예배 학을 강의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이 극한의 괴로움은 그런 것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아파하고 고민하고 지금 죽을 것같이 목말라하는 그것이 해결되는 그날이 옵니다. 당신들은 지금 예배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날이 오면 진정한 하나님과의 교통으로 인하여 영원히 솟아오르는 생수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그 여자에게 오신 것은 바로 이 생수를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땅을 지나신 것입니다.

4절, “예수께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셔야 하겠는지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은 주께서 그 땅을 지나가셔야 만 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에서 북쪽 갈릴리로 가는 길이 그 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은 그 길로 다니지 않았습니다. 아마 제자들은 주께서 왜 그 길을 고집하시는지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원 전부터 그때 그곳을 지나시려고 계획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 입니다. 그 여자 만나서 그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그 생수를 주시려는 것입니다.

생수라는 것은 고인 물과 반대 말입니다. 고인 물도 독이 있다든가 오염이 심한 것만 아니면 그들에게는 생명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생수는 솟아오르는 물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자면 “영생하도록 솟아오르는 물”입니다. 이것은 메꾸어지지도 않습니다. 흙으로 덮어 막는다 해도 그것은 솟아오릅니다. 만약에 흙탕 물처럼 되어도 그것은 생수 잘못이 아닙니다. 그 물이 솟아오르는 주변 관리를 잘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영원토록 솟아오르는 생수를 주시려고 하늘에서 내려 오셨고 또 사마리아 지역의 그 뜨거운 태양 아래 고생스러운 길을 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유효한 부르심

“그날이 온다"라는 말씀에 그 여자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시면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알려주신다는 것은 해결된다는 뜻입니다. 그 여자는 그 기구한 삶과 목마름이 메시야에 의하여 해결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 메시야가 바로 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는 이제 그 목마름을 해갈 해 주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물동이를 버려둔 채로 마을로 달려갑니다. 그 여자는 지금 메시야, 그 목마름을 해결할 생수를 주신다는 메시야가 여기 있다는 사실 하나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날 오전까지 만해도 대충 피해 다녔던 그 사람 들에게로 달려갑니다.

그 여자가 이 일을 말했을 때 그 동네 사람들이 과연 믿어줄까요? 비난하지 않을까요? 혐오의 눈으로 보면서 입을 삐죽 거리면서 비난 하지는 않을까요? 충분히 예상되는 것입니다. 이 여자가 지능에 큰 문제가 없는 한 이 정도는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메시야 외에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심령에 하나님께서 엄청난 변화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지금 이 말씀을 보는 자들이 알 수 있는 것 훨씬 그 이상의 설명하기 어려운 뜨거운 감화 감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유효한 부르심이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시는 성령을 통해 깊이 그의 마음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에스겔 골짜기에 마련 뼈가 일어나는 것과 같은 역사가 있었습니다.

나가는 말

모든 사람이 다 이 여자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게 있었던 목마름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느끼고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전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삽니다. 그러나 그것을 해갈 해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래도 사회가 용인하는 테두리 안에서 그것을 하고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그런 것을 무시하고 그 테두리 밖으로 용감하게 나갑니다. 들키지만 않으면, 탄로만 나지 않는다면 무슨 짓이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도 개의치 않습니다. 또 근래 사회는 그런 것을 인권이나 정체성 혹은 개인의 지향성이라는 이름으로 용인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든 그 목마름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리심 산에서 정교한 예식을 행하여도 예루살렘에서 화려한 예식을 행하고 신비로운 분위기에 사로잡혀 천국과 지옥을 왕래 하여도 그것은 항상 그 자리에 있고 회전문 돌 듯 색깔만 바뀌고 옷 만 갈아입은 형태로 반복됩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영원토록 솟아나는 생수를 얻기 전에는 어떤 것도 그 목마름은 해갈되지 못하고, 소위 기구 하다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슬픔과 아픔은 더 깊어져 갈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계시는 분들 중에 아직 이 생수가 무엇인지 잘 모르시거나 매우 낯설게 들리시는 분들은 교회로 찾아가셔서 복음을 배우십시오. 삼위 하나님에 대하여 마음을 열고 배우십시오.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미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고 있는데도 그것을 마시지 못하는 것은 정말 비참한 것입니다.

이미 주님이 주신 생수를 소유하신 분들은 이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마시는 생수는 생수 다와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그 생수 때문에 심령이 온통 진흙탕이 되기도 합니다. 생수가 나오는 것을 무엇으로, 또 어떤 이유로 흙을 덮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생수가 나오면 불편합니까? 그런다고 해서 생수는 멈추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파 놓은 우물은 블레셋 사람들이 무엇인가로 막아 버릴 수 있습니다. 이삭이 그것을 다시 파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수는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생수가 솟아오름 때문에 진흙 밭이 되고 흙탕물이 되는 것은 생수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샘 주변 관리를 잘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교만과 거짓이 마음에 가득하면 생수가 흙탕물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줄기차게 미워하는 마음은 생수의 덕을 보지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한 적용은 여러분 스스로가 시간을 내어 진지하게 해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가난한 심령으로 돌아가십시오. 애통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스스로 변화 시키십시오. 불신 자들에게는 불가능 하여도 참 성도들은 이것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인지도 어느 정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영혼의 창을 여시고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간구하시고 말씀으로 가득 채우십시오. 이것이 신령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생수와 참된 예배를 연결하여 말씀하신 이유 중 하나 입니다.

환경은 점점 어려워지고 몸은 늙어가고 기회는 점점 줄어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심령에서 감사와 찬양이 멈추거나 약해지지 않는 것은 생수로 인한 것이고 그 생수를 생수 답게 마실 수 있는 것은 정결한 마음과 새로워진 마음입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일급 수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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