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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요 3:16

이 구절을 모르는 기독교인은 없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을 얼마나 깊이 그리고 넓게 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삶에 있어서 극복해야 할 것을 극복하게 해주는 열쇠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 삶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이 발생합니다. 어떤 것은 신학적으로 원인과 그 답을 얻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그냥 모르는 채로 가야 합니다. 어줍지 않게 해석을 시도하는 것이 더 해롭습니다. 욥이 어려움을 당하였을 때 위로 하겠다고 찾아온 친구들의 경우 나름대로 욥의 어려움에 대하여 나름 신학적 해석을 시도하였으나 욥의 괴로움만 증폭 시켰고 나중에는 하나님께 크게 꾸중을 듣습니다.

그러면 그런 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고분고분 따르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바울 같은 사람은 이럴 때마다 자신의 모든 삶을 십자가의 원리에 대입합니다. 이것이 가능하면 세세한 질문이 사라집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너무도 많지만 그 깊고 넓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면 그런 것들에 대한 세세한 답변이 주어지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롬 8장 마지막 부분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32)”

현재 내가 가진 것이 없어도 그것을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다"라는 식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나를 위해 독생자도 세상에 내어 주신 분입니다. 만약에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는다면 그것에는 무슨 깊은 뜻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모자라서 못 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창조주요 섭리 주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사랑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게 일일이 설명하실 수 없는, 해봐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마치 무엇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아도 롬 8:28 말씀대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라는 말씀을 믿습니다.

내가 확신 하노니

이런 생각이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38절에는 “나는 확신한다"라고 말을 시작합니다. 여러분, 바울 같은 사람은 남에게 자신의 뜻을 인상 깊게 전달하려고 혹은 좀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허풍에 가까운 수사학을 마구 남발하지 않습니다. 확신도 하지 못하면서 확신 이라는 말을 입술로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확신한다고 합니다. “어떤 피조물 이라도,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뜻입니다. 그는 엡 3:19에 말씀한 것 같이 “하나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아는 사람으로서 없어도, 있어도, 잃어버려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나 자신이 모르는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극한 사랑으로 주도하는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심하게 맞고 나서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한밤중에 찬송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어려운 사역을 감당 하면서도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그가 얼마나 기쁨으로 충만 한지를 알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이 가능 하였던 이유는 십자가의 의미를 자신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 만큼 깊고 넓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 3:16을 마음으로 외워 봅시다

잘 알려진 구절 이기도 하지만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두루뭉술 대충 알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중요합니다. 일단 문장 전체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에서 “하사”는 “하셨기 때문에”라는 말입니다. 이유를 조금 약하게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래서 독생자를 세상에 내어 주셨다고 합니다. “이는”은 “—을 위하여” 혹은 “—때문에”로 번역되는 말입니다. 독생자를 주신 이유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독생자'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말합니다. 아들이 여럿 있어도 그 하나하나의 생명은 다른 것과 비교가 불가능한 존귀한 가치를 가집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독생자라는 말을 쓰는 이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낳으신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낳으면 그는 사람입니다. 그렇듯이 하나님이 낳은 분은 하나님 이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은 입양 개념입니다. 둘째로 독생자의 의미는 세상의 누구도 반론 없이 인정하는 귀한 존재입니다. 부모에게 이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피부색이나 지능의 정도 등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이면 악하든 선하든 다 공감하는 최고의 가치인 그 “독생자를 주셨다"라고 합니다. “내어 주셨다” 혹은 “넘겨 주었다”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나를 원수로 생각하고 호시탐탐 해를 입힐 기회를 엿보는 자들에게 독생자를 넘겨줄 수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 독생자에게 무슨 짓을 할지 잘 몰라서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나중에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그런 표현 없습니다. 얼마나 모욕을 할지, 얼마나 못된 짓을 하고 얼마나 고통을 줄지 다 알고도 독생자를 보내셨고 그 독생자 역시 다 알고도 스스로 오셨습니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자주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독생자를 주셨다"라는 말씀의 기본적인 뜻입니다. 이제 “이는”이라 해서 그렇게 하신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를 믿는 자마다.” 이 말씀을 주의 깊게 봐야 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 아무에게나 이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입니다. 그것도 믿는 중 잘 믿는 자 혹은 공로가 있는 자를 골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믿는 자마다”입니다. 믿음에도 그 깊이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구분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실 수 있는 믿음”이면 그 믿음이 아직 유아 적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이 부분은 설교를 마칠 때 즈음에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게 하시려고” 독생자를 세상에 넘겨주셨다고 합니다. 멸망이란 건강이 파괴되는 것, 지금까지 쌓아 놓은 것이 한순간에 날아가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멸망도 우리를 참으로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영혼의 멸망은 말할 수 없이 심각한 것입니다. 영혼이 파괴 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사람은 죽음으로 그 존재가 끝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 시간을 초월한 세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 세계 안에 있습니다. 그 세계 속에 있는 하나님이 지으신 시간과 공간으로 이루어진 그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우리 영혼은 그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멸망은 영원한 멸망입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이 진짜 있는가” 묻습니다. 당연히 있습니다. 천국이란 성경에서 하늘 나라라고도 합니다. 하늘나라는 비행기가 날아가고 우주선이 가는 곳을 말 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 즉,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곳을 말합니다.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 위에도 이루어지기 원한다” 할 때 그 하늘입니다. 야곱이 벧엘 광야에서 본 사다리가 위는 하늘에 닿아 있었고 그 사다리로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했다고 합니다. 그 하늘은 별이 있고 해가 있는 그 하늘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그 하늘입니다. 눈으로 관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야곱에게는 특별한 방식으로 그것이 그렇게 공개된 것입니다. 사람의 상상 혹은 관념 속에만 그 나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합니다. 단지 사람이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아닐 뿐입니다.

그 안에 우리가 육신을 입고 보고 만지는 이 세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육신을 입고 태어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벗어나면 그 하나님 나라로 있게 됩니다. 그곳이 본향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그 나라에 있느냐 아니면 영혼이 파괴된 채로 하나님의 은혜 한 방울도 얻지 못한 채 쫓겨나느냐가 남은 문제입니다. “멸망”한다는 것은 바로 영혼이 파괴된 채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영원히 떨어져 나간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해야 비로소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든지 말든지 영원 전부터 그렇게 정해진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부도덕 한 몇 가지 행위를 말하거나 그런 성향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주시지 않으셨다면 사람은 그냥 그 상태로 영원한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하나님은 사람이 이렇게 되는 것을 그냥 보실 수가 없어서 독생자를 세상에 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영생은 낱말 뜻으로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나 저주받은 영혼도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설명 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과 연합을 의미합니다. 그 하나님의 존귀하신 생명과 연합되어 그것을 영원토록 부여 받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전 과정을 구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영생은 죽은 후에 얻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에 얻어 영원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요 10: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바로 하나님의 생명을 말합니다.

이처럼

여기서 다시 앞부분으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에서 ”이처럼”이란 말은 어떤 성경에는 “이와 같이” “이와 같은 방법으로”로 번역되어 있고 또 어떤 성경에는 “이렇게까지”라고 해서 그 사랑의 깊이를 나타내는 말로 번역하였습니다. 문자적인 뜻은 “이란 방식으로” 혹은 “이와 같이”입니다. 그러면 이 말이 그 앞에 이미 제시된 어떤 것을 받아 연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펴보는 3:16 앞에 3:1-15에는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듭남에 대한 말이 서로 오고 가는데 니고데모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내용은 다음 시간에 계속할 것입니다). 그런 흐름 속에서 주님은 3:15에 “인자 (즉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나”라는 말씀 대신에 쓰는 표현)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들려야 한다"라는 다소 앞뒤 연결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할 때 이처럼(이와 같이)은 바로 이 사건을 떠올리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의 가장 핵심 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민 21장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 중에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가 넘는 불평을 해 댑니다. “우리를 광야에서 죽게 하려고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었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5)”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광야에서 죽게 하려고 10가지 재앙으로 애굽을 치고 어린 양의 피로 구원하여 애굽에서 이끌어 내었겠습니까? 힘든 상황임을 고려한다고 해도 이런 말을 밖으로 낼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이 너무도 악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음식도 물도 없다고 하였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는 음식이 아닙니까? 5절 끝에 보면 자기들은 이런 음식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출 16:3에는 “이럴 바엔 애굽의 고기 가마 옆에서 죽었으면 좋을 뻔하였도다”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누가 보면 이들이 애굽에서는 고기 가마 옆에서 살던 사람처럼 보입니다. 아닙니다. 이들은 애굽의 압제에 시달리던 비참한 노예였습니다. 불평을 위해 터무니없는 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형편이 어렵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불평 정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고 대적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불 뱀이 나와 이들을 물어버렸습니다. 맹독을 가진 구릿빛의 독사입니다. 물리면 길어야 심일, 고열에 시달리며 내장과 근육이 다 굳어 버리는 고통스러운 죽음에 이른다고 합니다. 불 뱀에 물린 사람들은 살려 달라고 울부짖고 모세는 기도하고.. 하나님께서는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고 그것을 쳐다보는 자는 살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9절에는 “놋 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조금 전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와 같은 의미입니다. 쳐다보는 것은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 행위가 있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어야 산다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들의 불평은 힘 들어서 아논 것이 아니라 근본적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임으로 그들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믿음"을 회복시키는 것 밖에 없습니다.

대속(代贖, 대신 죗값을 지불하는) 원리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어떤 공로나 행위와 무관하게 마음의 움직임 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죽을죄를 지었으나 그 죗값을 행위로 갚지 않고 마음의 진실된 뉘우침 만으로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죄인을 양산하는 악한 교리”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고귀한 사랑을 폄훼 하는 말입니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시는 이유는 어느 누구도 죗값을 스스로 지불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내놓는다고 해서 죗값을 다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열심히 닦는다고 희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홍같이 물들어 버린 것을 비누로 빤다고 해서 원상이 회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모든 죄인은 죗값을 지불해보려고 애를 쓴 자나 포기한 자나 마찬가지로 죄 아래서 멸망하게 됩니다.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님으로, 인간에게는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 자의 편에서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죄의 값은 반드시 지불되어야 합니다. 내가 못 갚은 빚은 그냥 슬며시 연기 사라지듯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로 있습니다.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사망은 단순히 의학적 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옥을 포함하는 영원한 멸망 개념입니다. 죗값을 못 갚으면 필연적으로 나는 그것을 벗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죄의 값을 독생자가 다 “뒤집어쓰게 하시고” 죄인은 그 사실을 믿는 것으로 그 무서운 저주에서 자유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루런 공로 없이 쉽게 얻는 구원이지만 하나님은 독생자를 세상에 넘겨주어 십자가를 지게 하고 모든 저주를 다 짊어지시게 하는 고통을 겼으셨습니다. 구원은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시기 전에도 수없이 말씀하셨습니다. 홍수를 통해서도 가르치시고 광야에서 그토록 사악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도 용서하시고 반복해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사무엘을 통해서 다윗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말씀을 하셨으며 사사들을 통해서 얼마나 많이 참고 계시고 또 그들을 사랑하시는지를 충분히 보여주셨습니다. 엘리야 엘리사를 통해서 하늘에서 불이 내리게 하여 하나님 살아계심을 가르치셨습니다. 앗수르와 바벨론을 통해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가르치셨습니다. 무엇을 더 하셔야 합니까? 그렇게 많이 보여주셔도 못 알아 들으면 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가르쳐도 못 고치면 그것은 이제 자기 책임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할 수 없다. 너희 죗값을 너희가 너희가 받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외아들을 세상에 넘겨주셔서 그 죗값을 대신 갚도록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시되 <이처럼>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그 결과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생이 약속된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날이 오면 너무도 명백하게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는 여러분, 오늘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무엇을 잘 해서가 아닙니다. 만일 내네 하나님께 인정 받을 만한 것이 한 줌이라도 있다면, 누구에겐가 내 세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은혜입니다. 내가 만약 한 조각이라도 그럴 듯 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도 바로 이 사랑 안에서 베푸신 주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를 하는 만큼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내게 은혜가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은혜가 필요합니다. 내게 긍휼히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그것이 필요합니다. 좀 부족해 보이는 자가 있으면 그를 위해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을 아는 자가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하는 기본자세입니다.

또 우리가 만나는 어려운 일 중 어떤 것은 원인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남이 당한 어려운 문제를 섣불리 신학적 해석을 시도하여 마치 욥의 친구들이 (좋은 뜻에서 행하였으나) 결국 그에게 상처를 주었듯이 자신에게나 이웃에게 상처 주지 말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이 같은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고 위로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랑 만 있는 분이 아니라 천지만물의 창조 주이고 섭리의 주이십니다. 그의 능력은 한이 없습니다. 물로 포도주도 만들 수 있고 눈먼 자의 눈을 열수 있고 무덤에 있는 자를 불러 내실 수도 있는 전능 자 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위해 독생자를 세상에 내어 주심으로 그 사랑을 그렇게 확증하셨습니다. 그분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이 원리를 모든 삶에 대입하십시오. 여러분의 물이 변 하여 포도주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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