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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종점까지(3)

요 10:27,28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 된 자를 결코 중간에 포기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양 백 마리 중 하나를 잃었을 때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은 그 잃은 양 한 마리를 위하여 99마리를 들에 둔 채로 찾아 나서시는 분입니다. 찾을 때까지 찾으시는 분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 전지전능하신 능력과 상상도 할 수 없는 사랑과 긍휼로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고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갈 때까지 보호 인도하십니다. 이것을 성도의 견인이라는 말로 몇 차례 말씀드렸습니다.

이 시간에는 그 성경적 근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는 것은 그렇게 믿고 싶고 또 그렇게 믿어야 마음이 편하고 또 그래야 보다 적극성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란 “하나님께서 그 뜻하신 바를 열어서 보여주신 것”을 말합니다. 그 계시가 바로 성경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알려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다 알려주신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다 알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 중 일부가 계시되는 것입니다. 그 일부라는 것은 인간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만 왕의 왕께서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것을 계시하고 선포하실 리가 있습니까?

그 꼭 알아야 한다는 계시의 핵심은 (1) 장차 임하게 될 하나님의 나라를 비롯하여 (2)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한 구원의 원리이며 (3) 구원받은 자들의 이 땅 위에서의 삶에 관한 것입니다. 이를 중심으로 해서 타락한 인간에게 주신다고 하신 그 구원은 예언되어 있고 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고 이제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설명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이 구원의 은혜를 모르거나 아니면 무관심하게 넘기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거부하는 죄 중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다음 몇 가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그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이며 어디까지 유효한 가를 알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자의 호칭 – 백성

모세 시대에는 구원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칭하셨습니다” 이것은 고대 왕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왕으로 소개하신 것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왕이 어떤 것인지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알았을 것입니다. 훌륭한 왕은 그 백성을 철저히 지킵니다. 외부의 적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지킵니다. 동시에 백성 간의 갈등을 잘 다스립니다. 그래서 태평성대를 누리게 합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자비로 대하면서도 질서를 확립하여 선한 자가 피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그렇게 나타내셨습니다. “왕 중 왕”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일컫는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왕 중 가장 훌륭한 왕” 또 다른 표현으로 “가장 왕 다운 왕”을 말합니다. 그 왕은 그 백성을 철저히 보호할 수 있고 행복을 증진시키는 왕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호칭 – 양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선택하셔서 그들을 양으로 또 하나님이 선한 목자로 비유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셨듯이 선한 목자 중 목자이십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 양을 철저히 보호합니다.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실 뿐 아니라 사나운 맹수의 공격도 충분히 막아내는 목자이십니다. 그리고 양들이 약해지지 않도록 돌보시는 최고의 목자입니다. 그래서 각종 훈련 프로그램을 익숙하게 시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뿐 아니라 낙오자가 없도록 하시고 혹 낙오가 생긴다 하더라도 반드시 끝까지 찾아내어 인도하시는 목자로 묘사됩니다.

구원받은 자의 호칭 – 자녀

신약 시대에는 구원 얻은 자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도 하고 양이라고도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합니다. 구약에서도 이런 표현이 나오긴 해도 좀 드물게 나옵니다. “자녀”라는 말은 백성과는 또 다른 의미를 보여 줍니다. 옛날 왕과 백성은 계약 관계로 맺어집니다. 왕은 백성을 보호하고 백성은 왕을 잘 섬겨야 합니다. 그러면 그에 대한 상을 얻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주가 임합니다.

부모와 자녀는 계약 관계 정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혈연 관계입니다. 계약 보다 훨씬 더 강한 연대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왕이 백성을 책임지는 것과 부모의 책임은 차원이 다릅니다. 그런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이런 용어만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그 구원 얻은 자녀를 어떻게 인도 하실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 부모도 자식을 가장 안전하게 보호하고 싶고 최고의 것을 주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 자체가 갖는 한계가 있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환경이 따라주지 않으면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시고 전지전능하신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우주 만물의 “섭리 주”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장애물이란 것은 사람에게나 넘기 어려운 것입니다.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그 자녀를 절대 포기할 수가 없으며 뜻하신 바는 반드시 이루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용어만 봐도 하나님께서 그 자녀에게 무엇을 주실는지 우리는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성취

언약이란 ‘말로 하는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로 하는 약속은 문서로 하는 약속을 염두에 둔 비교 개념이 아닙니다. “말씀으로 하신 약속”이라는 뜻이며 <공식화> 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말씀”이라고 할 때는 하나님께서 사람과 교통하실 때 사용하는 교통의 매체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명백하게 표현된 하나님의 뜻”입니다. 왕이 어떤 명령을 내리면 그것은 적절한 시기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이상 반드시 가장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언약이 성경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언약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부분적으로 성취되어가다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성취됩니다. 그 부분적인 성취는 온전한 성취의 예표였습니다. 그 성취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구원을 보장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자녀는 백성 이상의 개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 자녀에게 하신 모든 약속은 백성과의 약속이 성취되는 그 이상으로 성취됩니다. 앞에 말씀드린 대로 자녀라는 그 호칭 자체가 하나님의 모든 것이 이미 그를 위해 준비되어 있고 또 가장 적절한 시기에 베풀어질 것을 보장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요한복음에는 이와 관련된 구절이 참으로 많습니다. 잘 알려진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성부께서 성자를 보내신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실패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이 실패하지 않으시면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아야 하고 영생을 얻어야 합니다. 이것은 끝까지 견딘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끝까지 견디게 하실 것입니다. 특히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사랑하셨다, 그래서 독생자를 주셨다”할 때 동사들은 다 과거 형입니다. 그런데 “믿는 자마다”할 때 "믿는다"라는 현재형 분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전에 “한 번 믿었던 자, 얼마 전에 믿었던 자”가 아니라 <현재 형으로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중도에 멈추어지면 구원은 거기서 끝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계속 믿음이 유지되게 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실 것”입니다.

요 6:39-40,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그 뜻대로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요 10:27,28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특히 28절을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강력한 표현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라는 구절에서 원문 성경은 “영어 부정어 not 에 해당하는 말”이 두 번 반복이 되어 나옵니다. 헬라어 oume는 둘 다 어떤 것이 “아니다”라고 부정할 때 쓰는 부사입니다. 이 둘 중 하나 만으로도 충분한데 이중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 의미를 살려 번역하면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아니하리라” 다시 말하면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양에게는 이런 일이 “절대로 발생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영생을 주노니”에서도 강세가 나옵니다. 헬라어는 주어가 없어도 동사가 그 주어를 내포합니다. 여기서 "주다"라는 “내가”라는 말이 없어도 <내가 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중으로 ‘내가’라는 말이 들어가면 매우 강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이렇게 성도의 견인을 확실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진술

롬 8장의 맨 끝부분입니다. 38-39, “내가 확신 하노니”로 시작되는 구절입니다. 바울 같은 사람은 확신 같은 말을 가볍게 쓰지 않습니다. 그는 말쟁이가 아닙니다. 쉽게 감동받고 쉽게 식어버리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또 이렇게 강력하게 말함으로 사람들을 선동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그냥 그런 느낌이 들기 때문에 그것을 자유롭게 발표하는 것도 아닙니다. 로마서에는 복음에 관한 치밀한 논리가 전개됩니다. 지금 바울이 말하는 것은 그 복음적 논리의 결과입니다.

빌 1:6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 하노라” 누가 이 일을 시작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믿을 만한 자가 시작한 것은 사람들이 별로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검증되지 않은 자가 시작한 일은 마지막까지 마음을 졸이면서 주시해야 합니다. 이 일의 시작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창세 전에 그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시고 그것을 실행하신 것입니다.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이가 시작한 일입니다. 그분은 시작과 끝이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노라

마 16:16,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께서는 이런 고백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라 하시고 그의 이름인 시몬 대신 게바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게바라는 당시 통용되던 아람어로 반석이라는 뜻이고 히브리어로 반석은 베드로라고 합니다. 그러나 눅 22:31,32 주님의 최후의 만찬이라고 말하는 그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라는 이름 대신 “시몬아”라고 부르십니다. 그것도 두 번 반복해서 부르십니다. 안타까움이 그만큼 크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매우 슬픈 말씀을 그에게 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보라”라는 말은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들어줄 것을 요청할 때 쓰는 말입니다. 사탄이 믿음을 떨어뜨리려고 하는 것은 베드로 만이 아니라 <너희들>입니다. 복수형인 것을 보니 베드로를 위시한 모든 제자들과 더 나아가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모든 자가 그 대상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너”는 이인칭 단수인 것을 보면 이것은 특별히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베드로 이름은 원래 “바 요나 시몬”입니다. 시몬이라는 이름이 많기 때문에 다른 시몬과 구분하기 위하여 그 아버지 이름을 같이 쓰는 것입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는 뜻입니다. 주께서 그에게 게바(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시고 나서 그 후에는 계속 게바 혹은 베드로로 불립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갑자기 시몬이라는 옛 이름을 주께서 사용하십니다. 시몬은 구약 성경에 ‘시므온’입니다. 같은 것입니다. 창 29:33, 야곱의 부인 레아가 낳은 둘째 아들을 시므온이라 하였습니다. 이 본문이 있는 곳의 난하 주에 시므온은 그 뜻이 “들으심”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아버지 요나가 아들을 얻고 그 이름을 시몬이라 지었을 때는 그런 뜻이 좋아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들으심”은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름이 그렇게만 이해도는 것은 아닙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이 본래 ‘동시 출생을 의미하는 발뒤꿈치를 잡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기만자, 사기꾼 등으로 의미화되었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이 본래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를 조롱할 때나 부정적인 시각으로 평가할 때 야곱의 이름은 이와 같은 이미지로 사용 되었습니다.

시몬도 좋은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이것이 부정적 이미지로 쓰일 때는 “들음”이 아무 것이나 잘 듣는 “귀가 얇다"라는 뜻으로도 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갈대 중 메우 연약한 종류로 비유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을 듣고 보면 주께서 왜 게 나를 갑자기 시몬이라는 옛날 이름으로 부르셨는지 어느 정도 짐작이 됩니다. 흔들리기 잘 하는, 겉으로는 그러게 강하게 보이려고 하나 실상은 아주 연약한 종류의 흔들리는 갈대 같은 사람, 아직 사라지지 않은 이런 면이 베드로 안에 남아 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야곱도 얍복 강 사건 이후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뜻을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로 보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사라’라는 다스린다는 말과 하나님을 일컫는 ‘엘’이 합하여 진 것인데 둘을 합하여 기원문으로 본다면 “하나님이 다스리소서”일 수 있고 또 평서문이라면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라는 뜻입니다. 대부분 이런 형태의 이름은 그가 황태자임을 나타냅니다.

야곱은 사람 하고도 겨루어 이기고 하나님 하고도 겨루었습니다. 그의 삶은 이런 식의 경쟁과 투쟁으로 메워져 있었습니다. 얍복강에서 이런 이름을 주신 것은 “이제는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더 이상 하나님과 겨루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가 되라"라는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다스림에 대한 순종 안에 있는 영광과 평강을 맛보면서 살며 또,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실현 하라는 의미가 복합적으로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때로 이들을 부르실 때 “너 야곱아”라고 하십니다(사 40-43장). 심지어는 “너 지렁이 같은 야곱아(사 41:14)”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다음에 무슨 말씀을 하지 않으셔도 “야곱아”라고 하시면 그 분위기를 대충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옛사람이 고개를 쳐들 때 이렇게 부르셨습니다.

베드로이기는 하나 역시 '시몬'임을 감출 수 없는, 평범한 사람도 하기 어려운 잘못을 한 베드로입니다. 주님이 용서 하신다고 해도 스스로가 용서하기 어려운 일을 범 하였으나 주님은 그것을 아시고 믿음이 지속되도록 <미리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기도하실 필요도 없는 분이시지만 기도하셨습니다. 육신으로 계시는 동안에는 하나님과 교통을 그렇게 기도로 하셨습니다. 야고보는 5:16에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기도가 땅에 떨어질 리가 없습니다.

주께서 다시 갈릴리 해변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를 베드로라고 부르실 때에 대하던 것과 전혀 다르지 않게 그에게 사명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과 같이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아무리 주께 잘 한 것이 있어도 이런 전과가 생긴 한 주님은 그 대신에 더 똑똑하고 잘 나고 심지가 굳은 자를 택하여 세우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를 그대로 쓰셨습니다.

하나님도 못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맞지 않는 것은 못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불의를 행하실 수가 없고, 거짓 말을 하실 수가 없고, 중간에 사랑하는 자를 포기하실 수가 없습니다.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죄가 있습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보이는 죄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거듭난 자는 다른 것은 몰라도 이런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할 수가 없습니다. 한 셈에서 쓴 물과 단물이 동시에 나올 수는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시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만약 바리새인 생각대로 하나님이 움직이신다면 우리는 출생 후 첫 번째 범죄를 했을 때 그때 이미 버림을 받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넘어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가 된 우리들은 시몬처럼 사단에게 밀 까불리듯 할 수 있으나 크고 강한 하나님의 은혜의 팔로 붙들고 계십니다. 믿는 지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이 우리가 힘이 빠질 때 다시 일어나게 해 주시는 동력이 될 것이고 동시에 우리 마음이 죄의 습관에 이끌릴 때 내 발을 견고케 해주는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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