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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종점까지(2)

# 인간의 자유의지 # 하나님의 주권 # 예정

창 2:16

성도의 견인에 대하여 계속 말씀드립니다. 특별히 이 시간에는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성도의 견인은 성도의 생애 마지막까지 하나님이 성공적으로 인도하셔서 마침내 구원을 완성시켜 주신다는 의미의 신학적 용어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성공적으로 인도 하신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성도의 삶 속에 하나님이 은혜와 사랑과 능력으로 함께 하신다"라는 의미를 당연히 내포하고 있습니다.

시 69편은 다윗의 시인데 그 2절에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고 있습니다”라는 호소가 있습니다. 이와 유사한 분위기의 다윗 시편은 많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매우 어두운 노래가 길게 이어집니다. 그렇게 밝고 감사가 넘치는 많은 찬양 시들도 기록 했던 다윗이지만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로 인하여 깊은 침체에 빠졌습니다. 이런 일이 다윗에게만 있는 것은 아님을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성도의 견인 교리가 사실이라면 어떤 성도든지 이런 수렁을 오래 경험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이런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견인이라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금 저의 설교 안에서 <성도>라는 말은 단순히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를 말합니다>.

성도의 견인과 같은 말씀은 성경에 대한 이해가 빈곤한 자들이 크게 오해 하기도 합니다. 이 견인 교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그것을 기반으로 한 예정론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이런 것이 사람의 <자유의지>와 크게 충돌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유의지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인간 되게 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의 주권 행사로 인해 무기력하게 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를 할 때도 먼저 성경 말씀의 내용을 근거로 해야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견인을 반대하는 말씀을 내세웁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히 6:4-6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말씀이 어째서 견인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지 지난 시간에 설명하였습니다.

오늘은 견인을 반대하는 내용을 말씀드린 후 그 반대 의견이 견인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견고하게 세우고 있다는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반대하는 이유는 (1) 위에서 언급한 대로 자유의지와 충돌한다는 것이고 (2) 또 하나는 견인 같은 주장은 성도를 게으르게 하여 결국 구원에서 떨어져 나가게 하는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지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주권

자유의지란 자신의 삶에 관한 한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자유의지를 이보다 훨씬 더 자세히 설명할 수도 있지만 철학자들이 말하는 자유의지는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정도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다고 하면 인간의 자유의지가 침해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좀 더 이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는 오류들의 원인은 하나님께 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하나님이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모순 임으로 견인과 같은 신학적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여기서 파생되는 문제는 “그렇다면 사람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공격성 질문들은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자유의지

하나님이 주권을 행사하시는 이유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억누르거나 무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인간이 진정한 “자유 의지”를 행사하도록 하기 위함 입니다. 그것을 설명하겠습니다.

에덴 동산에 아담과 하와를 두셨습니다. 그리고 창 2:16에 말씀하셨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다면 ‘선악과를 만들지 않으실 수도 있고’ 화염검을 든 천사에게 명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실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이것을 허용 하셨을까요? 이것이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입니다.

자유의지라는 말이 성립되려면 기본적으로 선택지(選擇肢)가 두 가지 이상이 주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하여 선택자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자유롭고 인격적 선택이 됩니다. 이런 조건이 주어지지 않으면 자유로운 선택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한 번도 먹어 본 일이 없는 음식으로 가득 찬 메뉴판을 주면서 "선택하라"라고 하면 과연 이것이 그 선택자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그냥 골라 잡으라는 것인데 그런 것을 선택한다고 해서 자유의지를 사용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또 철학자들의 논쟁에서 누군가 사용한 것입니다. “감방(감옥) 안의 자유”라는 말입니다. 감옥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자유가 극도로 제한된 곳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것도 선택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식사 때 반찬을 먼저 먹을지 밥을 먼저 먹을지 자신이 선택할 수 있습니다. 잠을 잘 때 왼쪽으로 눕든 오른쪽으로 눕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그래도 자유가 있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요 8장에는 예수님과 바리새 인과 그리고 그들과 한 통속이 된 서기관들이 격렬한 논쟁을 합니다. 주님께서 이들에게 “너희는 죄의 종이라”하시니 바리새 인들이 “우리는 한 번도 누구의 종이 되어본 적이 없다"라고 맞섭니다. 32절에 잘 알려진 말씀이 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하신 말씀에 대하여 그들이 이렇게 반응한 것입니다.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36).”

한마디로 하면 이들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의 종”은 무엇을 해도, 무엇을 선택해도 그 결과는 “죄”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이들에게 자유를 말씀하신 것은 “죄의 세력 밖에 있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공중 권세를 장악하고 있는 죄의 세계와 하늘의 영광이 찬란한 세계를 알게 하여 <자유 의지>로 자유롭게 그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이며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기초입니다.

그런데 죄의 종이 갖는 하나의 특징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영적 기능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엡 2:1, “그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이 말씀에서 <죽었다>는 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영적 죽음 즉, 영혼이 죽었다는 것인데 그 영혼은 하나님에 대하여 알 수 있게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본질적 요소입니다. 다른 표현도 있을 텐데 왜 하필이면 <죽음>이라는 말을 사용할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 외에는 어떤 것도 개선이나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주권적으로, 다시 말해서 인간의 선택권에 무엇을 맡기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권을 행사하셔서 이 죽은 자들을 살려 놓으십니다.

하나님의 주권 행사와 인간의 자유의지

주권은 다른 말로 하면 왕권(王權)을 말합니다. 모든 생명의 주인이요 왕으로서 권리를 행사 함입니다. 주권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행사됩니다. 첫째는 관여하지 않으시는 방식으로 주권을 행사하실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의 지혜에 따라 그냥 내버려 두실 수도 있고 적절한 방식으로 개입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로운 판단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시기 보다 그 당사자에게 가르치시고 깨우쳐 주심으로 그가 자유 의지로 선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 사람의 자유의지와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그 능력을 행사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나 둘째는 사람들이 직접 무엇을 선택하고 그 결과에 따라가는 길이 결정되는 것임으로 이런 것에는 별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의 삶에 개입하셔서 일방적으로 그 뜻을 펼치신다고 하면 인간의 반항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비난할 문제인지 아니면 감사로 받아야 할 문제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죽은 자를 일으키시려면 일방적인 주권 행사를 하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눅7:11,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곳을 방문하셨을 때 사람들이 관을 메고 나오고 있습니다. 그 뒤에 그 죽은 자의 홀어머니가 울면서 따라 나옵니다. 이때 주께서 비통한 마음으로 그 어머니에게 다가가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관에 손을 대시고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런 것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너는 거기 계속 있을 수도 있고 일어날 수도 있느니라. 너에게 준 자유 의지로 잘 생각해서 결정하라!” 이런 상상 자체가 무슨 코미디 같습니다. 이런 일에는 주께서 일방적으로 그 주권을 행사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이제 그 죽었던 자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셔서 그의 의지를 사용하여 살아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가 살아나야 그의 자유의지도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 단계로 옮겨갑니다.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 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는 숙명적이고 강제적인 처사가 아닙니다. 코를 꿰어 아들의 신분의 자리에 끌어다 놓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누구든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여야 합니다(롬 10:9,10).

때로 거짓으로 시인하는 경우도 있고, 거짓은 아니지만 일시적인 감정에 이끌려 시인하는 경우도 있으나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그 중심을 보고 구원 여부를 결정 하실 것입니다. 구원은 밖으로 드러난 외형적 말이나 태도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의 변화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중심의 변화는 기계적인 작동이나 강제적인 힘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강제적인 압박에 의하여 말도 할 수 있고 사인도 할 수 있지만 사람의 중심은 그것으로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중심은 진정한 인격적 깨우침에 의하여 변화됩니다. 거듭난 자의 특징은 그 인격체의 중심에 있는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따르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절대적인 주권을 행사하셨다 하더라도 이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거나 박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가치 있게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그렇게 세뇌가 되어 그렇게 밖에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자유도 있으나 하나님의 진리와 영광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버림을 받을까 봐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 얻는 자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구원을 얻는가?

또 하나 사람들이 견인 교리에 대하여 의심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구원이 보장된다고 하면 사람들이 경건과 거룩의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을까? 어차피 나의 구원이 정해진 것이라면 막 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닌가? 견인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말하듯이 이 견인 교리는 성도를 타락하게 할 수 있다고 하는 말이 일리가 있는 것 아닌가? 헷갈릴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주권 등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배우지 못하고 그저 낱말 뜻 정도의 이해로 다 파악한 것처럼 생각하는 자들이 엉뚱한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교회 생활 오래 한 분들이 이렇게 하면 그것이 옳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날까지 보호라는 것은 나를 온실 속에서 키우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자녀를 보호하실 때 그저 싸고도는 것만이 보호는 아니라는 것을 아십니다. 벧전 1: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노니.” 보호는 군사적 용어로서 밖의 공격을 막아낼 뿐 아니라 안에 있는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지키는 것을 포함한다는 말씀을 지난 시간에 드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르침, 깨우침을 주는 것은 보호의 매주 중요한 한 방식입니다. 가르침과 깨우침은 반드시 교실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직접 경험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는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삼하 7:8-17을 “다윗 언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언약이라는 뜻입니다. 언약이란 <말로 하는 약속>이라는 뜻인데 이것은 문서를 작성하는 것이 드물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하는 것일 뿐이고 <언약>이란 <공식화된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전을 짓겠다고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12-15입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 의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14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이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되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내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어떤 사람이 자녀를 어렵게 얻었습니다. 그리고 늘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허락하신 이 어린 생명을 잘 키우게 하옵소서! 그리고 마음에 결심합니다. “나는 어린 시절을 매우 불행하게 보내었으나 이 아이는 행복하게 해주겠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이것저것을 그려봅니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는 인간이 갖는 한계가 있습니다. 날씨만 나빠도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변 환경이 변하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을 정확히 그 시간에 그곳에 태어나게 하신 분입니다. 나귀의 걸음이 조금만 늦어도 길에서 출산할 수도 있습니다. 너무 빨리 가면 호적을 한 후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와 출산할 수도 있습니다. 나귀의 걸음 속도도 계산하시고 그 길도 주관하신 분이십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 분이라 했습니다. 가망이 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에 좀 못 미친다고 해서 버리시는 분이 아님에 감사합니다.

이렇게 해서 나를 저 마지막 순간 안전한 곳까지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는 지금 현재도 그 자녀들을 위해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눈동자같이 보호하고 하고 계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형편에 있든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의 견인! 이해 못 하는 자들에 의하여 별별 소리를 다 듣는 것이지만 여러분은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다윗처럼 수렁에 빠진다 하더라도 그렇게 오래 빠진 채로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충분히 그곳에서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여러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잡다하고 쓸데없는 생각에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할 생명의 말씀과 원리를 불러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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