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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종점까지(1)

히 6:4-6

저는 앞으로 몇 차례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견고하고 안전하게 보장 되는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저의 설교 대부분이 이런 내용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이런 말씀을 반복 하다시피 말씀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믿는 것이 얼마나 확실한 것인지 확인시켜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감정적 혹은 정서적으로 흘러버려 어디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는 모래 위에 세워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당분은 위로가 되고 심리적으로 안정은 되겠지만 얼마 안 가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진리에 근거한 것보다도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느낌을 지나치게 숭배합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 제대로 접근해 본일도 없으면서, 사실 제대로 맛을 본 것도 아니고 엉뚱한 것만 접했으면서, 그것을 허구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그래서 저는 구원의 영원한 보장과 같은 신앙이 얼마나 견고한 바탕 위에 있는지 확인시켜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확신을 가질 수 있게 해 드리고 싶다는 뜻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 드리려는 이것을 신학자들은 <성도의 견인(堅忍)>이라고 합니다. 견인이란 고장 난 차를 견인한다고 할 때 그 견인(牽引)이 아닙니다. 앞서 말한 견인은 <굳게 참고 견딤>이고 뒤에 말한 견인은 <이끌 견, 당길 인>입니다. <견인>의 뜻은 “굳게 참고 견딤”이지만 신학적 용어로 사용할 때는 <하나님께서 굳게 참고 견디게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벧전 1: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보호”라는 말은 군사 용어입니다. 군대가 둘러싸고 있는 그림을 연상 시킵니다. 공격 하려는 것이 아니라 방어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은 이 말이 두 가지를 동시에 내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안에서 밖으로 뛰쳐나가 위험을 자초하는 것을 막는 것이고 또 하나는 외부로 부터의 공격을 막아주는 기능이 있습니다. 이런 보호가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생애 전반에 걸쳐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진다는 것이 성도의 견인입니다.

성도의 견인 이라는 것은 듣기가 좋아서, 희망을 주는 말이라서, 우리가 원하던 것이라서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기회를 이와 같은 믿음을 다시 정돈하고 정리하여 확고히 하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말씀은 교리 적이지만 매우 실용적인 것입니다. 지금 당장 넘어야 할 산과 건너야 할 강, 이 과제 앞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정말 함께 하시는가? 함께 하신다면 어떻게 함께 하시는가 하는 것이 관심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구원을 언급할 때는 “죽어서 천당”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평범한 삶에서 까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배교의 가능성

성도의 견인을 말하기 위하여 저는 먼저 그것을 반대 의견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는 성도의 견인에 관한 진술들을 자세히 소개하겠습니다.

성도의 견인을 반대한다는 것은 “성도의 구원은 도중에 취소될 수 있다"라는 의견입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자들은 일단 성경에서 “배도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예를 열거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구절을 꺼내서 보여 줍니다.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어느 시대나 교회 안에는 배교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들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여러분 주변에도 교회 다니다가 도중에 개종을 했거나 아니면 수년 혹은 수 십년째 냉담자로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심한 경우에는 기독교 저격수가 되어 적 그리스도 노릇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은 드문 현상도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의 주장은 더 힘을 얻는 것 같습니다.

이들이 말하는 배도의 예는 많습니다. 사울 왕 같은 사람, 이 사람은 왕으로 기름 부음 받기 바로 전 선지자들과 함께 누워서 예언 했다고 합니다(삼상 10장). 그래서 약간 조소적인 속담 같은 것이 생겼습니다. “사울도 선지자냐” 이것은 “사울이 언제부터 선지자”라는 분위기의 말입니다. 가룟 유다는 대표적 배교자입니다. 딤전1:19-20, 배교자로 후메네오와 알렉산더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딤후 4:10,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 곁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역을 그만두었다는 것인지 아니면 진짜 배교를 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마 24:3-14에는 말세에 큰 배교 사건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에 넘어가는 자도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서 제자들을 한때 성도로 불린 그들이 핍박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주님이 예언하십니다. 요 15:6 포도나무와 가지를 말씀하시면서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는 버리어져 사람들이 모아다가 불 때는 재목으로 사용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포도나무에 접 붙임을 받았으나 버려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구절이라고 주장합니다.

고전 9:27, 바울이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하는데 그 이유는 남에게 전파한 후 자신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자신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 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 말이 그 말인지 의심스럽습니다.

히브리서는 이런 분위기의 구절이 비교적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히브리서는 “오랫동안 지속되는 핍박에 피로도가 매우 높아진 성도들에게 마지막까지 잘 견디기를 바란다는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교훈적 사례가 많이 사용 되는데 그중에서도 효과적 교훈을 위하여 반면교사(反面敎師)를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구절이 자주 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중에 성도 견인을 반대하는 자들이 가장 대표적으로 사용하는 구절은 히 6:4-6입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혹시 여러분은 이 말씀이 “성도가 중도에 타락하여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십니까?” 이 말씀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하여 직역을 해보겠습니다.

“이런 경우는 자신을 새롭게 하여 회개할 수 없습니다. / (어떤 경우를 말할까요?) 이런 이들이 타락한다면(타락하면, shall be fallen) / 한 번 -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가 있는, 그리고(곧),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자가 / (그 이유는) 자기 스스로(다른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번역에 누락)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타락(墮落)이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잘못된 길로 빠지는 일”이러고 사전에 나와 있습니다. 한자어로서 떨어질 “타” 떨어질 “락”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 하였으나 그는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이런 경우는 이 본문이 말하는 타락이라는 용어가 적합하지 않습니다. “넘어짐” 정도가 적합합니다. 여기서 타락은 <은혜의 영역에서 떨어져 나감>으로 봐야 합니다.

빛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시면 결코 할 수 없는 것으로 우리의 어두움을 물러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세계를 보게 되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이들이 빛을 받았다고 할 때는 그들이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세상을 보았다는 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은사는 방언 예언 이런 은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헬라어로 “카리스마타 xarismata”라고 합니다. 여기 본문에 쓰인 말은 도레아(dorea)로서 보다 넓은 의미의 선물입니다. 땅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주셨다고 할 수밖에 없는 선물입니다. 행 11:17, 베드로가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내리셨다는 설명 중에 이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믿을 때에 주셨던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베드로가 처음 믿을 때 받은 것은 소위 흔히 말하는 은사가 아니라 “성령께서 거저 주신 것”을 포괄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물입니다. 이것은 은사보다 훨씬 더 넓은 개념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었다는 것은 성령이 주시는 신비한 어떤 일의 목격자이거나 참여자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비상한 체험을 소유한 자일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그리고”는 “곧”일 수도 있습니다. A 그리고 B라고 하면 A와 B의 내용이 다른 것일 때, 그러나 A와 B가 사실상 같은 의미인 경우는 <곧>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여기서는 <곧>으로 번역하는 것이 맞는다고 봅니다.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다는 것은 빛이 임했고 은사를 맛보고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것과 다른 의미가 아니라 그것을 좀 더 심화 하였거나 구체화한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놀라워 하고 또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은혜도 받았다는 말입니다. 내세의 능력을 맛보다는 것도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경험한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만 보면 히6:4-6에 소개되는 사람(들)은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보통 신자의 모습을 능가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 두 가지의 결정적인 것 때문에 이들은 처음부터 진정으로 거듭난 성도가 타락한 것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한 번”이라는 말

이 말이 없어도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려는 의도는 충분히 전달됩니다. “빛을 받고 은사도 받고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이 타락하면 회복이 안된다”하면 됩니다. <한 번>이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한 번>이란 두 번, 세 번이 아니라 <한차례>를 말합니다. 히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이치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여기 한 번은 두 번이나 세 번이 아닌 한 번입니다. 고전 11:25에 바울이 자시의 삶을 이야기하다가 “나는 세 번 태장을 당했고 한 번 돌에 맞았다고 합니다. 한차례 그런 일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길 가다가 오랜만에 지인을 만났습니다. 이야기 좀 하다가 “언제 다시 만나서 밥 한 번 먹읍시다"라고 합니다. 이때 <한 번>과 여기 <한 번>은 의미가 다릅니다. “밥 한 번”은 두 번이나 세 번이 아니라는 의미의 <한 번>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시작하여 앞으로 몇 번이 될지 모르는 기회를 예상하게 하는 <한 번>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언젠가 그런 일이 한 번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는 이 히브리 기자가 이 말을 의도적으로 하여서 지금 언급된 그 누군가가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이 아님을 시사하는 것 같습니다. 참된 성도는 <한 번> 빛을 받지 않습니다. 20년 전 혹은 10년 전에 받았던 빛으로 지금까지 버텨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증거는 매일, 마치 만나가 내리듯이 빛이 임합니다. 어떤 것은 매우 인상 깊은 것이라 기억에 남고 이에 관한 어떤 일은 지극히 일상적인 것에서 일어나는 것이라 잘 모를 수도 있고 금방 기억의 밑바닥으로 묻혀 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사)도 언젠가 한 번 받은 적이 있는 것으로 지금까지 우려먹지 않습니다. 성도의 특징 중 하나는 “은혜의 지속성”입니다.

예수를 드러내 놓고(현저히) 자기 손으로 못 박아 욕보임

구원은 예수를 주로 시인할 때 받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제외하면 자신을 도무지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기 손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주를 욕보인다고요? 이것이 가능한 것입니까? 다른 죄는 지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못된 사람보다 질적으로 더 나쁜 죄를 지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범할 수 없는 죄가 이것입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사함을 받지 못합니다(마 12:31)” 성령을 의지하는 자가 성도이기 때문에 성도는 이런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잘못하면 예수 이름에 욕 먹일 수도 있습니다. 교회 이름에 먹칠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 본의 아니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를 <자기 스스로 혹은 자기 손으로>십자가에 못 박는다? 바라바를 살리고 예수를 못 박으라고 외치던 군중 속 어디 한 편에 숨어 있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우리 성경 번역에는 누락됨) 망치를 들고 못을 박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구원 이전에는 그랬을 수도 있고 충분히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나의 주님이시라고 이미 나의 영혼이 고백함으로 주의 자녀가 되었는데 다시 옛날로 가서 주를 부인할 수 있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는 진정으로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한 적이 없는 것입니다.

구원 얻은 자가 구원의 길에서 이탈할 수 있는가?

그렇게 보이는 것 뿐입니다. 구원은 교회에 등록했다고 해서 얻는 것도 아니고 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가룟 유다는 중간에 변절한 자가 아닙니다. 요 6:14에는 주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너희 중 한 사람은 마귀니라>고 하셨습니다. 유다는 그것이 자신인지 몰랐을 수도 있겠지만 주님은 처음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구원을 얻은 적이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정치적 세계를 이룩하기 위하여 주님의 힘을 빌리려고 했습니다.

마 7:21-23,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주여 주여” 두 번을 부르는 것을 보니 특별한 열심과 헌신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처음부터 참된 거듭난 성도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인가 교회 안으로 들어왔고 어떤 기대로 인하여 최선을 다하게 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삼상 10장에는 사울이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기 바로 전 선지자 무리와 함께 있다가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을 하는 내용이 소개됩니다. 그 후로 항간에 속담 비슷한 것이 생겼습니다. “사울도 선지자 무리 속에 있느냐”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울이 언제부터 선지자였냐는 말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된 후 껍질이 하나씩 벗어지면서 처음부터 하나님의 사람이 아님이 드러납니다.

막 12:34, 율법에 정통한 부자 청년에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이 말은 가까이 있으나 그 안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아나니아와 삿비라 역시 교회에 매우 가까이 있는 사람이었으나 "안"에 들어온 사람은 아닙니다. 그들은 정말로 그 나라에서 멀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가까운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어야 한다는 큰 교훈을 줍니다.

딤후 4:10, 바울과 함께 주의 사역 잘 하던 데마가 세상으로 가버렸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역을 그만두고 평신도로 돌아갔다면 그것을 여기서 논할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히 6장이 말하는 타락이라면 그는 처음부터 예수를 주로 모신 것이 아닙니다. 뭔가 기대하고 와서 매력을 느껴 좀 더 들어갔으나 결국은 자신이 원하던 것이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한때 에베소에서 바울이 죽임을 당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목숨 걸고 구출해 준 알렉산더가 있습니다(행 19:33). 그런데 그 후에 바울하고 같이 사역도 했는데 딤후 4:14에는 그가 바울을 그렇게 괴롭혔다고 하면서 “주께서 그가 행한 대로 갚으시리니 디모데야 너도 그 사람 조심해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 하였느니라.”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었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는 구원 얻은 성도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기독교의 매력에 푹 빠졌다가 열기가 식어서 제 자리로 돌아갔을 뿐입니다.

구원의 종점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주께서 세상 끝 날까지 동행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물 가운데로 지날 때나 불 가운데로 지날 때도 함께 하실 것이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도 최고의 목자 주님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나를 위하여 그 전지전능하신 창조와 섭리의 능력으로, 그리고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신 그 사랑으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결코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저 내 감정이나 정서 위에 서 있는 것이라면 며칠도 못 가서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 위에 서있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굳게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떤 일에든지 그 믿음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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