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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자의 그늘 아래(3)

전능자의 그늘 아래 (3)

시91:1-16.

시91편을 계속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는 자>라는 큰 제목으로 1,2 편을 말씀드렸고 지금이 그 세번째 설교입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신앙 경험에 비추어서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는 자”는 재앙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요새와 반석이 되시기 때문이고, 또 방패와 손방패가 되시고 진정한 피난처이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자기 바로 옆에서 천명이 혹은 만명이 넘어져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밤의 공포도 두렵지 않고, 누가 나를 잡으려고 일부러 설치한 올무도 별 것 아니라고 합니다. 어디서 날아들지 모르는 화살도 걱정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7절과 10절에서 두 번이나 반복하여 “재앙이 내(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씩 곱씹어보면 너무도 엄청난 말이라서 설명의 토를 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일종의 “신앙적 과장”인가?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이렇게 해서라도 희망을 주려고 최대한 좋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살짝 의심도 갑니다. 대부분 종교적으로 이런 좋은 뜻에서 거짓말에 가까운 과장을 해도 그것을 누가 비난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이 세상에 무작위로 불어오는 재앙이 특정인만 비켜갈 수가 있겠습니까? 본문을 자세히 보면 이런 약간의 의문이 아멘으로 바뀝니다.

1,2 편을 다시 요약

저는 첫번째 설교에서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것”이 하나님께 복을 받는 시작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다음 연(聯)인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살게 한다”로 연결된다고 했습니다. 시91편에 소개되고 있는 엄청난 복은 “그냥 모든 사람에게 마치 전철 역에서 사람들에게 광고지 나누어 주듯이 막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자”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두번째 설교의 요지는 “재앙이 가까이 오지 못한다”고 했을 때 “가까이”라는 말을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주의 백성은 세상 사는 동안 어떤 재앙도 만나지 않는다는 말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온실 속에서 자라는 어여쁜 화초로 키우시지 않습니다. 새장 속에서 남의 말 흉내나 내는 앵무새나 노래하는 카나리아 정도로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폭풍이 불어도 그 바람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 그 위를 나르는 독수리 같은 자녀요 용사로 키우십니다. 믿음의 방패를 들고 말씀의 검을 가지고 악한 것과 맞서서 넉넉히 이겨내는 주의 용사로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화살에 상처를 입고 재앙을 만나 위기를 겪는다 하더라도 그렇게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각자에게 가장 잘 맞는 성장 프로그램을 가지고 시행하고 계십니다. 이런 것을 훈련이나 연단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징벌이 아닙니다. 비록 어떤 자신의 한계 점을 느끼는 정도의 고된 일일 수는 있어도 전문가의 훈련의 특징은 피 훈련자가 “감당할 수 없는 선을 넘지 않습니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시험을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두려워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

오늘은 이 시편 기자가 “두렵지 않다”고 하는 또 다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시 91편은 누가 지었는지 그 이름이 나와 있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저자 명이 없는 경우 바로 그 앞에 시편의 저자가 이름이 없는 시편의 저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모세가 저자입니다. 그러나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문체 등을 보았을 때 다윗의 시인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모세든 다윗이든 그 누구든지 지존자의 은밀한 곳을 알고 전능자의 그늘을 아는 자의 공통된 특징은 “하나님의 신실 하신 도우심”에 대하여 안다는 것입니다.

표현이 좀 질이 낮아 보이지만 한마디로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모세가 되었든지 다윗이든 이들은 어려움도 많이 겪은 사람들이지만 그런 속에서 어떻게 보호를 받는지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가 어설픈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압니다. 여호와 이레도 알고 여호와 삼마(상상 거기 계시다)도 알고, 여호와 닛시도 매우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도움을 받아 내는 기술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자비하심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모세의 경우 수많은 난관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있으면 무서운 재앙이 다른 곳에 다 내려도 어린 양의 피가 있는 집은 그냥 넘어가버리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지존자이시며 전능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신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하루살이처럼 죽어 나가게 하시는 것을 봤습니다. 세계 최강이라는 애굽의 바로가 모세에게 머리 숙여 항복 하며 떠나 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게 하시는 것도 보았고, 목 말라 죽게 되었을 때에 반석에서 샘물이 나는 것도 보았고, ‘매일’ 아침 저녁으로 만나가 내리는 것을 본 사람입니다.

하나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땅 밑으로 가라앉는 것도 보았습니다. 감당하기 너무도 버거운 아모리 족의 총공격이 있었을 때 갑자기 왕벌이 나타나 그들을 쫓아 내 주는 것도 봤습니다.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막강한 무리들과 전투를 할 때 모세가 산에 올라 두 손을 들면 이기고 내리면 지는 것도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가셔서 물 샘 12과 종려 70 그루를 마련해 놓으신 것도 직접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시내산에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대면하여 그 영원하신 뜻에 대하여 설명을 듣고 내려왔습니다. 사는 동안 별 일이 다 있겠지만 그러나 그는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두 손을 들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윗도 그가 지은 시편이라고 분명하게 밝히는 글 들에서 보면 하나님의 기막힌 도우심에 대하여 얼마나 많이 말을 하고 있습니까? 바로 몇 분 후면 생명의 불이 꺼질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주께 부르짖습니다. 그랬더니 코 앞에까지 추격해 온 사울이 갑자기 블레셋 침공 소식을 듣고 다윗 공격을 포기하고 돌아갑니다. 삼상 23:28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 곳에서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하여 이름을 지었는데 “셀라하마느곳(분리의 바위)”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떨어뜨려 놓으셨다, 그렇게 그의 위기를 관리해 주셨습니다.

질투심에 눈이 멀어버린 사울이 갑자기 그에게 단창을 던졌습니다. 단창이라는 것은 팔 길이 만한 날카로운 호신 무기입니다. 사울 같은 임금들은 잠들거나 식사할 때 외에는 이것을 자기 몸의 일부처럼 가지고 다닙니다. 손으로 창 끝을 쥐고 창 촉은 겨드랑이에 끼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 창을 던진 것입니다. 저쪽에 놓여있는 창을 집어 던진 것이 아니라 손에 들고 있는 것을 아무런 예비 동작도 없이 던진 것입니다. 그리고 옛날 다윗 왕궁 같은 것을 발굴하여 놓은 것을 보면 이런 왕의 집무실이나 개인적 용도의 방은 생각보다 그 규모가 작습니다. 불과 2-3 m 정도의 거리에서 수금을 타고 노래 부르던 다윗에게 그 창을 번개같이 던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빗나갔습니다. 사울이 실력이 좀 모자란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날 쌔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군인으로서 수많은 전투에 참여했던 자이니 얼마나 많은 위기가 있었겠습니까? 또 왕으로서, 정치인으로서 살다 보니 권력을 탐내는 자들이 얼마나 교묘하고 강하게 그를 공격하였겠습니까? 이유를 알 수 없는 비난을 받고, 때로는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릅니다. 스스로 깨달은 죄와의 싸움, 원인을 알 수 없는 경멸, 등등 그에게는 죽을 때까지 잠시도 잊히지 않는 아픔이 많았습니다. 심지어는 가장 아름다운 아들이 자신에게 칼을 겨누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나무에 매달린 채로 요압 장군의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어떤 재앙보다도 더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스스로 일어서려면 얼마나 큰 위로가 필요하겠습니까? 얼마나 큰 능력이 다시 채워져야 하겠습니까? 그의 특징은 그럴 때 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그 위로가 이슬비처럼 소낙비처럼 임하는 체험을 합니다.

이런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는 사람은 “은혜를 쌓아 둘 필요”가 없습니다. 혹시 있을 이런 또 다른 일을 대비하기 위하여 창고를 열 두 개씩 지을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런 것이 걱정됩니다. 지금까지는 은혜로 살아왔는데 앞으로는 어떻게 하나 …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서 재앙이 비켜가는 것도 아니라면, 만약 어떤 일이 생기면 그때는 어떻게 하나… 나는 그래도 이제껏 살아왔으니 어려움이 온다 해도 감당 하면 되지만 우리 아이들은 또 어떻게 하나 …. 이런 생각에 사로 잡힐 수 있습니다. 주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그 염려에 이렇게 빠질 수가 있고, 또 시91편 기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한 그것”을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하나님이 주시는 어쩌면 오늘의 최고 선물일 수도 있는 것을 드리려고 합니다.

잠언 3:28, 무엇을 꾸러 온 자에게 하는 말입니다.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라”

잠언에는 하나님의 성품을 그대로 반영한 삶의 원리가 많이 나와 있습니다. “무엇이 필요해서 찾아온 자에게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일 오라 하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이고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에게 이렇게 가르쳐 놓고 “정작 자신을 찾아와 간구하는 자에게 내일 오라”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특별한 교육적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면 그렇게 하실 리가 없습니다. 평소에 자식들에게는 주변 사람들과 잘 지내라고 말하면서 정작 그 부모는 사람들과 계속 원수를 맺는다면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입니까?

우리는 해변에 파도처럼 계속 밀려오는 문제들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에 매우 강하게 내리 눌릴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불법적이고 사악한 올무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밤의 공포가 엄습합니다. 피할 길이 없습니다. 어디서부터 날아오는지도 모르는 화살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때로는 깊은 상처를 입고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일어나려고 결심을 해도 잘 일어나지지를 않습니다. 마음은 이런 어려움을 잘 이겨 내기를 바라지만 그러기에는 지식과 지혜가 너무 모자랍니다. 힘을 내어 보려 하지만 어디서 힘을 끌어올려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버티어 보려고는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재앙이 가까이 온 것입니까?” 즉 “그 재앙 나를 삼킨 것입니까?” “그것이 나를 제 마음대로 가지고 놀게 됩니까?” 비참해 질 대로 비참해지고 비굴할 대로 비굴해지는 수밖에 없습니까? 그냥 그러다가 세상을 떠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동안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에 대하여 잘은 모르지만, 아직도 의문 투성이고 헷갈리는 것이 있지만 크신 은혜로 나를 인도하여 그 은밀한 곳에 “거하게”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여호와 이레도 알고, 여호와 닛시도 알고, 여호와 삼마도 알고, 여호와 치드케누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도 알고, 이삭도 알고, 야곱도 알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도 알게 하시고, 바울도 알게 하시고, 삭개오도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내 입에 새노래를 넣어 주셨습니다. 기도도 알게 하시고 응답도 알게 하셨습니다. 약1:5에는 “구하는 자에게 꾸짖지 않으시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신 그 말이 무엇인지 알게 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그 전능자의 날개 아래 살고 있습니다. 누가 떠나라 해도 절대 떠나지 않습니다.

비록 화살이 날아다니는 곳, 재앙의 횡포가 멈추지 않는 곳에 살지만 엎드리면, 부르짖으면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그늘 아래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전에 받은 것을 써먹는 것으로는 재앙을 이기기 어렵습니다. 오늘 것은 오늘 주시는 것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쌓아 둔 것으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잔머리에서 나오는 꾀가 아니라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주셨던 그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 뿐 아니라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내가 나에게 뭔가를 속삭이고 스스로 파이팅을 외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그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싸워야 할 것과 싸워서 이길 능력이 필요합니다. 다윗이 시 18:34,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가 놋 활을 당기도다.” 또 시18:39, “주께서 나를 전쟁하게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를 띠우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렇게 주시는 능력으로 싸우지 않으면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니라 같이 패하는 것만 있습니다.

“오늘 줄 수 있는 것을 내일 오라 하지 말라” 하나님이 그렇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흉흉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 살면서 “재앙이 너의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두렵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배경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고 계십니다. 창고를 여러 개 짓고 채워 놓았기 때문이 아니라 “꾸짖지 않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 덕분에 우리는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주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 모두에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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