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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는 자(2)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는 자(2)

시91:1-6

지금 저는 지난 번의 말씀에 이어서 어떻게 하면 두려움을 극복하며 살 수 있는지를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누구도 예외 없이 매우 위험한 세상을 지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의 기자는 그것을 전체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항상 있는 위험들

시 91:3에 기록된 대로 우리가 가는 길에는 사냥꾼의 올무가 숨겨져 있고, 소리 없이 다가오는 전염병의 위험이 항상 있으며, 더 나아가서 5절에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는 어디서 누가 쐈는지도 모르고 또 소리 없이 날아오는 화살이 있다고 말합니다. 6절에는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나라고 해서 피해 가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상황 속에 살면서 이미 이런 것을 경험한 우리가 두려움 없이 산다는 것은 참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속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주님은 워낙 높은 곳에 계셔서 이 아래에 사는 우리 사정을 모르고 하신 말씀은 분명히 아닐 것입니다.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 매우 어리석은 것이며 우리에게 매우 해로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두려움 혹은 염려가 나를 뒤덮을 때 그냥 있어서는 안됩니다. 눅 21:34에 말씀을 하신 것처럼 “술 취함, 방탕”과 더불어 이 “염려”는 우리 영혼을 잠들게 하여 뜻밖의 덫에 걸리게 하는 아주 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술 취함과 방탕은 나쁜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은 염려를 이와 같은 것들의 선상에 놓으셨습니다. 그 정도로 염려는 우리 영혼을 해롭게 합니다. 이것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는 염려 외에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정말로 무기력하게 되고 가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할 줄도 모릅니다. 이때는 어떤 결정을 내려도 다 잘못되고 어떤 판단을 하여도 다 잘못됩니다. 자칫하면 우리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아주 이상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염려는 아예 시초부터 싸워서 이겨야 하는 대상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다른 구절의 말씀으로도 이것을 배우지만 지금은 시91편의 말씀으로 이 신령한 교훈을 받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시편 기자는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무엇이 접근해 오든지 하나님의 철저하신 보호가 있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이것은 믿음으로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시 그들이 생각하는 최고 수준의 ‘안전보장’을 연상케 하는 비유어들이 나옵니다. 요새, 바위, 그늘 등등.

최상의 안전을 상징하는 비유어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에게 요새가 되어 주시고 바위가 되어 주셔서 안전하게 지키신다는 것을 믿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요새는 높은 곳에 주로 위치합니다. 때로 이 말은 바위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일 때가 있습니다. 바위는 깎아 지른 바위절벽을 말할 때가 있는데 이때는 요새와 같은 말입니다. 또 바위는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적의 화살이나 병거의 공격이 있을 때 큰 바위 뒤는 매우 안전합니다.

1절에서는 ‘전능자의 그늘’이라는 말도 있고 4절에는 ‘날개 아래’라는 말도 나옵니다. 팔레스타인의 여름 한 낮의 태양의 열기는 가히 살인적입니다. 특히 사막이나 광야는 한 낮의 온도가 45-60 C 정도로 올라갑니다. 이 뙤약볕 아래 길을 가야 하는 사람이나 일 하는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그늘입니다. 좀 시원한 장소가 아니라 죽음에서 생명을 얻는 자리입니다. 날개 아래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일상적인 용어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것을 누구나 다 동감할 수 있는 매우 극적인 비유어로 말하는 수사법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폭풍이 몰아치면 그 약하게 보이는 새의 둥지와 새끼 새들이 은근히 걱정됩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 같은데 그 미친 바람이 지난 후 살펴보면 새끼들이 멀쩡합니다. 어미 새가 날개 아래 그들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강한 바람과 약해 보이는 새를 비교할 때 참 신비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그렇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4절에는 방패와 손 방패라는 말도 나옵니다. 방패는 큰 것, 손 방패는 한 손에 검이나 창을 잡고 또 한 손으로 붙잡는 작은 방패입니다. 방어도 하고 공격도 하는 용도입니다. 큰 방패는 사람 키 만한 것입니다. 약간 원통모양으로 둥그렇게 휘어져 있어서 적의 기병이 공격할 때 그 방패를 덮고 땅에 누워도 될 정도입니다. 뛰는 말이 밟고 지나가거나 심지어는 병거의 바퀴가 그 위를 타고 넘어가도 견딜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적의 화살 공격으로 전투가 시작됩니다. 이때 방패 병이 나아가서 마치 담 치듯이 방패를 연결하고 또 그것을 위로 쳐들어 지붕을 만들어 그 안에 있는 자들을 보호합니다.

왕이나 사령관이 병거를 탈 때 이 방패 병이 같이 탑니다. 또 왕이 어디든지 행차할 때 이 방패병이 항상 옆에 따릅니다. 그래서 때로 그 방패는 왕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적이 그 방패를 빼앗았다고 하는 것은 적의 왕을 제압 하였다는 뜻도 됩니다. 솔로몬 시대에 금 방패가 있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왕이 어디를 갈 때 의전 용으로 쓰기 위하여 황금으로 그 방패를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몸이 감추어질 정도로 큰 방패입니다. 전투를 경험해 본 사람으로서 이런 비유들은 “최고의 안전”을 나타내는 말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들의 한계와 하나님의 무한하심

그러나 사람이 건설한 바위 절벽 위의 요새나 천연 요새인 바위는 그 백성을 보호하는데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에돔 사람들이 그렇게 교만하게 자랑하던 페트라, 정말로 공수부대가 하늘에서 내려와 점령하지 않은 한 함락이 불가능해 보이는 그 천연 요새도 여러 차례 함락 되었었습니다. 그늘, 어미 새의 날개와 같은 이런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지만 다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호는 한 치의 틈도 없이 완벽하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 기록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여기 최상 최선의 안전함을 나타내는 여러가지 비유를 다 합친 것보다 더 안전한 요새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보다 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우리를 완전하게 보호 하시는가?

시편 기자가 어떤 일이 닥쳐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렇다”고 선언 내지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좀 특별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시91편에 문장들은 미래형으로 번역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3절, “새 사냥꾼의 올무와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라” 또 7절에는 “천명이 나의 왼쪽에서 만명이 나의 오른 쪽에서 엎드러지나 재앙이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다 …” 미래형 비슷하게 번역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건을 경험하였거나 경험하고 있는 것이기 보다는 “어떤 상황을 가정하는 것으로” 보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직 올무나 재앙 등의 일을 경험하지는 않았으나 “만약, 혹시, 그런 일이 온다 하더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가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직 그 재앙은 저기 멀리 언덕 위에 있는데 시편 기자가 그것을 보고 ‘저것이 만약에 내게 온다 하더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사람은 재앙 한 가운데 서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이런 일을 당하면서 요새요 반석이시며 큰 방패 되시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감사하며 노래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동사들은 대부분이 “미완료’형입니다. 시는 과거의 사건을 소재로 쓸 때도 이렇게 미완료 시제로 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완료라는 것은 완료의 반대말입니다. 완료는 이미 동작이 끝난 상태로 주로 과거 시제로 번역합니다. 미완료는 아직 동작이 다 끝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미완료 형은 우리 말로는 현재형, 혹은 진행형으로 번역합니다. 그 뿐 아니라 미완료 형은 문장과 그 문맥에 따라 때로 미래형으로도 번역하기도 하고 또 가정법으로도 번역할 수가 있습니다. 특히 이 미완료라는 것은 “계속되는 반복”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사랑하십니다. 과거에 어느 시점까지 만 사랑하고 더 이상 안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옛날부터 지금까지 쭉 그렇게 해 오셨습니다. 이런 때 “미완료”형으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다른 나라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은 다 ‘현재’형으로 나타냅니다.

사냥꾼의 올무, 전염병, 재앙, 밤의 공포, 낮에 나르는 화살 … 이런 것은 인류가 에덴에서 추방된 후 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서 모든 것을 면제 받는 것은 아닙니다. 모양이 다를 뿐 이런 것은 항상 살아 있는 사람을 위협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 중 어떤 것은 사단의 무기가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저자는 <반복되는 일> 즉, 옛날에도 그래왔고 지금도 그렇고 또 미래에도 그럴 것이 분명한 사실을 언급한다고 봐야 합니다. 제가 지금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 시편 기자는 재앙 속에 서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그는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이 사람이 전염병 속에 놓여 있고 얼굴 옆으로 화살이 쌩쌩 지나가는 현장에 있다고 봅니다. 어쩌면 감염이 되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화살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서 상처를 입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10절의 말씀과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10절, “화가 내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가까이 오지 못한다>는 것은 아직 오지 않았고 어느정도 물리적 거리 안으로는 못 온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가까이 오다>는 말은 물리적으로 근접한 거리를 말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참여한다, 함께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구절에서 쓰인 말과 똑 같은 문법으로 쓰인 말이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예를 들면 출12:48에는 “할례 받지 못한 사람은 할례를 받은 후에 가까이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만약 이것이 유월절 '만찬 장소'에 들어오지 말라는 뜻이라면 이렇게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참여”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민16:40, “아론 자손이 아닌 외인은 여호와께 분향하러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라.” 분향하는 일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겔18:6, “월경 중 여인을 가까이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해설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화가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한다’는 것은 그 화가 나를 건드리고 어느정도 해를 입힐 수는 있으나 그것이 나를 집어 삼킬 수 없다는 뜻입니다.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고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 다시 말해서 뱀은 상대에게 어느 정도의 해를 입힐 것이지만 여자의 후손은 뱀에게 치명타를 가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람은 올무에 걸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올무가 그를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화살에 몸의 어는 부위를 맞았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치명적이 아닙니다. 시편 기자는 이런 것을 다 포함하여 <보호>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저자는 쉴 새 없이 무엇인가의 공격을 받아 이곳 저곳에 상처가 생기고 있으나 그 와중에도 하나님의 그늘과 그 날개 아래 있음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있습니다. 지금 환란 속에 있고 조금 지나면 그 바람이 더 악화될 것을 예상할 수도 있지만, 그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또한 하나님의 철저한 보호 아래 있는 것도 사실이라는 것을 크게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는 온실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음

롬 8:17 “자녀이면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지금도 그렇지만 귀한 자식일수록 온실에서 키우지 않습니다. 비록 수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 강인하고 능력 있는 인물로 성장 시킵니다. 옛날 왕들은 후사가 정해지면 다치지 않게 꽁꽁 싸서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터로 내보냈습니다. 거기서 리더쉽도 배우고 또 부하들 사랑하는 것도 몸소 익히고 또 중요한 것은 평생 같이 갈 전우도 만듭니다. 이런 전투를 통해 후에 훌륭한 왕이 됩니다.

여러분, 저는 지금 하나님의 날개와 그늘 아래 있는 것이 얼마나 안전한가를 말씀드리기 위하여 “주만 믿으면 모든 재앙을 면제받을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드린다 하더라도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으실 분도 없을 것입니다. 코로나가 유행하면 자칫 감염될 수도 있습니다. 머리 좋은 자가 악한 의도를 가지고 내 길에 올무를 설치하면 거기 걸릴 수도 있습니다. 난데없이 화살이 날아들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매우 심각한 상태까지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의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재앙이 10절 말씀처럼 “우리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할 것”입니다. 요일5:18, “하나님께로 난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만지다”는 말은 예수께서 병자를 “만지셨다” 혹은 “손을 대셨다”고 할 때 쓰인 그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본래 “들러붙다, 고착되다, 불을 피우다” 이런 말입니다. 조금 전에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라고 했을 때 그 “가까이”와 매우 유사한 헬라어입니다. 골 2:21 “세상 초등학문을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붙잡는다”가 그 말입니다. 붙잡다는 것은 그런 속에 자신을 들이 밀어 그런 초등학문을 삶의 원리로 삼으려고 시도하는 것이겠지요. 다시 말해서 악한 것이 와서 “툭툭 건드리면서” 자기 사람을 만들어 보려고 하겠으나 절대로 그렇게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재앙이 마치 동네 양아치같이 나를 자기 수하에 두려고 골목으로 불러내어 툭툭 건드리고 쥐어 박고 하겠으나 “결코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한 보호를 받는다고 해서 아무 일도 안 생기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요동치고 그 공격에 상처도 입고 올무에 걸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발꿈치가 상하는 일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보호 망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실 머리털 하나까지 세신 바 된 하나님께서 막으려 드시면 우리 털 끝 하나 다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양육하시지를 않습니다. 온실에 넣어 놓고 숫가락으로 밥을 떠 먹여 주는 것이 아니라 재앙이 날뛰고 화살이 날아다니는 세상 속에서 키우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느 정도의 해를 입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더 이상” 즉 회복될 수 없는 수준으로 당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의 아주 편안하고 귀족적인 삶을 위하여 하나님이 나의 요새와 반석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충분히 이해하고 믿고, 그 믿음으로 승리하는 자녀로 양육시키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앵무새나 공작새가 되도록 키우는 것이 아니라 “독수리 다운 독수리로”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새끼 새의 입장에선 이해되지 않는 훈련과 연단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마치 내가 내동댕이 처지는 느낌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아끼는 많은 것을 잃었다 하더라도 내게 가장 중요한 <내 삶의 근본> <나의 삶의 원천>은 견고하게 서있는 한 나는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와도 이런 것을 건드릴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일단 그것으로 충분히 안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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