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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자의 그늘에 거하는 자(1)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는 자 (1)

시91:1-6

우리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는 중 전투적인 자세로 싸워야 할 일이 여럿 있지만 그 중 하나는 “염려와 근심”입니다. 어느정도 염려의 그늘에서 벗어났는가 하면 마치 해변의 파도가 밀려오듯이 그것은 또 밀려옵니다. 산 하나 넘으니 또 산이고 강 건너니 또 강이 나타나는 것처럼 세상 떠날 때까지 이것과 씨름을 해야 할 모양입니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그것을 믿음으로 견디어 내는 솜씨가 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큰 풍랑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주님은 마6장 끝부분에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것이고 또 매우 해로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지적만 하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염려를 극복 하는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6:26-34, 공중의 새나 들에 핀 꽃도 하나님이 다 먹이시고 입히신다고 하신 후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물며”라는 표현의 의미만 깊게 이해해도 염려는 거의 다 극복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염려를 그저 살다 보면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고 대충 넘겨서는 안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너무도 많은 손해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방탕, 술 취함, 염려

눅 21:34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 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여기서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염려”를 방탕과 술 취함이라는 것과 나란히 놓았다는 것입니다. 방탕의 결과는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매우 경계합니다. 술 취함, 이것은 술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것 패가망신의 지름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해로운 것인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만약 한 가정의 가장이 이런 식으로 살면 그 가정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죄를 미화(美化)할 수 없습니다. 재주 좋은 입담을 가진 자들이 이것을 긍정적인 삶의 요소로 둔갑시킬 수도 있겠으나, 그러나 뭐라고 하든 방탕이나 술 취함은 그 결과가 항상 비참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것들과 “염려”를 같은 선 상에서 취급 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으로는 방탕이나 술 취함 보다 이것이 우리에게 더 해로울 수도 있습니다. 염려와 근심에 빠지는 것은 이렇게 해로운 것입니다. 이것이 특별히 나쁜 이유는 우리를 “둔해 지게”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염려하기 시작하면 더 예민해지는 것 아닌가요? 천리 밖에서 사자의 울음 소리가 들려도 깜짝 놀라 아무것도 못하지 않습니까? 조금만 건드려도 상처를 입고 삼 박 사 일을 울고 이를 갈고 원망하고 … 옆에서 보는 사람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극도로 예민해집니다. 그런데 주님은 왜 “둔해 진다”고 하십니까?

술 취함은 본래 인간에게 그나마 남아 있던 존엄마저 소멸시키는 것이고, 방탕은 거룩한 것에 무감각해지는 것입니다. 여기 열거된 것들은 모두 다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그래서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리는지에 대한 감각이 없어지게 하는 것'들입니다. 따라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매우 기초적인 것까지도 알 수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염려” 역시 지금 염려하고 있는 것에 전 인격이 집중 됨으로 그 외에는 다른 것을 전혀 생각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이 역시 영적으로 둔감하게 하는 중대한 원인이 됩니다. 이 염려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합니다. 그런다고 해서 우리가 이 염려에서 완전하게 해방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때 그때 이겨내야 합니다.

여기 이 염려와 근심 걱정을 극복하고 있는 한 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시91편 기자(記者)입니다. 이런 사람이 여기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습니다(히12:1). 오늘 이 말씀을 들으신 후 “전능자의 그늘아래” 후편을 들으시면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시 91편은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풍성한 영감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을 기본적으로 잘 알고 또 그 믿음 위에 살았던 사람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시적 감각과 능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가 여기에 기록한 믿음에 충만한 표현들을 보시면 “이거 정말 이런 진술들을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종교적 과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이 믿거나 따르는 것을 좀 더 미화하고 좀 더 신비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하여 <거짓말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과장을 크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나친 과장은 거짓에 가까운 것이지만 종교에서는 굳이 이것을 거짓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나는 두렵지 않다”고 말합니다. 정말 종교적 과장 일까요?

사냥꾼의 올무와 전염병

91:3, 하나님이 자신을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 구원하신다”고 하였고(여기서 그 시제는 ‘미완료’로서 미래형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지금 계속되는 현재형일수도 있음) “심한 전염병에서 구원하신다”고 했습니다. 시를 쓰는 사람들은 어떤 표현할 때 될 수 있는 대로 그것이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풍성하게, 의미 있게 나타낼 수 있는 어휘를 고르고 그것이 그런 작용을 하도록 배치합니다. "새 사냥꾼의 올무"는 뭔가 계획적으로 나를 옭아 매려는 시도를 폭 넓게 말하는 것이고 “전염병”은 계획된 것은 아니지만 피할 수 없는 자연재해 같은 것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서 누가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악하게 모의하여 공격하는 것이든 아니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재해가 되었든 <나는 충분히 보호받는다>는 확신에 찬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같은 것이 기독교인이라 해서 그를 비켜가는 것은 아닐 것 같은데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5-6)”

분위기로 보면 무슨 전염병이 돌고 있는 때 쓴 시처럼 보입니다. 전염병이라는 말이 지금 두 번이나 반복된 것으로 봐서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 말하는 "밤의 공포"는 다 공감할 수 있는 말입니다. 밤의 어두움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누구에게나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낮에도 재앙이 있다고 합니다. "낮에 날아드는 화살,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이란 이 사람이 겪는 어려움은 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 든다는 말입니다. 밤낮으로, 시도 때도 없이 … 크게 다르지 않은 표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재앙”은 누구에게나 다 덮치는 피할 수 없는 사변(事變)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모두 다 넘어져도

7절, “천명이 왼쪽에서, 만명이 내 오른 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하지 못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수많은 사람이 쓰러지는 재앙 속에서도 “나는 안전하다”고 말합니다(흔히 시어(詩語)의 세계에서는 인칭이 상호 교차되는 경우가 많음). 세계 인구가 지금의 1/20 도 안 되었을 때 그 당시의 만명과 지금의 만명은 의미가 다릅니다. 천명 만명은 사람의 수자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많음”을 나타내는 형용사적 의미를 갖습니다. ‘대부분의 사람’ 아니면 ‘그 이상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시편 기자 역시 그들 가운데 있을 것인데, 그런데도 “자기에게는 이 재앙이 가까이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나오는 혹은 무엇을 근거로 한 “믿음입니까?”

그 뒤 11절에는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살짝 뒤틀어서 했던 말입니다. “모든 길에서 하나님의 사자들이 지켜줄 것이고 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실 것이라.” 13절에도 “나는 사자와 독사를 밟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실 것이다”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랬으면 좋겠다’가 아니라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광신자가 빠지기 쉬운 제 흥에 취하여 자신의 믿음을 이렇게 과장되게 표현한 것이 아니라면, 이것이 정상적인 인간의 믿음이라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며, 또 어떻게 해야 이런 경지에 다다를 수가 있습니까? 그것이 참으로 궁금합니다. 이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이미 1절에 그것을 말하였습니다. 어떤 면에서 1절에 그것을 말한 후 그러한 삶의 실례를 그 뒤로 언급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의 근거

“(A)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며 (B)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자여(1절)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2절)”

1절의 A와 B는 대구를 이룹니다. A의 ‘지존자’와 ‘은밀한 곳’은 각각 B의 ‘전능자’와 그의 ‘그늘’과 대구입니다. 즉 지존자는 ‘전능자’로, 은밀한 곳은 ‘그늘 아래’로 바꾸어 썼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서로 비슷한 말로 짝을 이루지만 똑 같은 것을 의미 없이 반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다른 의미는 아니지만 이 둘을 합하여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보다 더 깊고 넓고 높아지게 합니다. 지존(至尊)자란 ‘가장 높은 자’로서 우주 만물의 통치자를 말합니다. 히브리인들은 이를 ‘엘룐’이라 합니다. 전능자 역시 하나님을 지칭하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엘샤다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주로 ‘약속한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능력’을 나타냅니다. 이를 위해서는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의 돌 하나 풀 한포기도 다 ‘엘샤다이’의 뜻대로 놓이고 움직여야 합니다.

‘은밀한 곳’은 하나님께서 사람들 모르게 하시려고 일부러 저기 어디에 감추어 두신 것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때로 성경에는 ‘비밀’과 유사한 뜻으로 이 말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어디 숨겨두었다는 것’이 아니라 다 보여주어도 인간의 안목에 문제가 있어서 보지 못하는 그것입니다. ‘비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성이나 감성으로는 도무지 도달할 수 없는 오묘한 영적 진리 혹은 영적 사실을 말할 때 이렇게 표현합니다(요3:1-8 참조).

‘거하는 자’와 ‘사는 자’ ‘(1절)

여기서 특별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좀 어려운 말이라서 비켜가고 싶기는 하나 설명을 잘 드리는 것이 오히려 더 깊은 이해를 도울 것입니다. 두번째 연(聯, stanza)에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산다”에 대하여 말씀드립니다. 첫번째 연에는 ‘거하는 자’라고 되어 있고 두번째 연에는 ‘산다’입니다. 첫째 연의 “거한다(dwelling)”는 삼인칭 능동태 미완료입니다(좀 어려워도 계속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둘째 연의 “산다”는 다른 나라의 말에는 흔치 않은 “강조 재귀형(히트파엘 형)”이라는 것입니다. 단어의 뜻은 앞의 연에 ‘거하다’와 큰 차이가 없는 말로서 주로 영어에서는 (NIV 제외) abide (숙박하다, 머물다, 산다)로 번역했습니다. 재귀형은 때로 중간태와 비슷하게 번역됩니다. 중간태란 능동과 수동의 중간적 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위의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 그리고 행동 주체의 내면적 행위를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건너 뛰기도 그렇고 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그러면 ‘산다’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단순히 ‘산다’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다시 앞으로 가서 ‘거하다(dwell)’은 생각나면 한 번 들리는 것이나 뭔가 정해 놓고 왔다 갔다를 반복하는 것도 아닙니다. '정착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15장에서 주님이 ‘너희는 가지 나는 포도나무’를 말씀하실 때 “내 안에 ‘거하라’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거하는 것은 능동적입니다. 여기서 ‘산다’는 능동적인 면도 있지만 어떤 이유로 혹은 무엇인가가 ‘자신이 자신을 그곳에 살게 하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무엇인가가 은혜롭게도 그를 그렇게 안전한 곳에 살게 만들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 이를 abide로 번역하는 이유는 그 말이 가지고 있는 어떤 특성 때문인데 그것은 ‘철저히 의지하고 따르는’ 의미가 두드러지기 때문입니다(어휘 사전에서 dwell 과 abide 의 차이 참고).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 아직 그 지존자의 고귀하심, 거룩하심, 아름다우심을 충분히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몇 가지만 알아도 그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그 분의 은밀한 곳으로 찾아 들어온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입니다. 그렇게 하고 보니 이제 하나님 안에 있는 놀라운 영광에 더 깊이 사로잡혀갑니다. 그렇게 까지 놀랍고 놀라울 줄은 몰랐습니다. 들어가면 갈수록 날마다 놀라게 됩니다. 더욱 더 찬송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는 그것에 사로잡혀 “스스로 자신을 그곳에 살게” 합니다. 누가 나가라고 하여도 나갈 이유가 없고 다른 곳에서 유혹을 해도 그 은밀한 곳에서 나갈 이유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 ‘지존자의 은밀한 곳’은 ‘전능자의 날개 아래’로 더 구체화됩니다. 고대인들의 수사법은 주변 환경에서 얻어지는 정보를 활용하는 것에 비중을 둡니다. 그들이 경험한 바를 비유(metaphor)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고릅니다. 폭풍 속에서 가장 안전한 곳과 안전한 자는 ‘어미새의 날개 아래’있는 새끼 새들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만 그렇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은 동의하기 어려운 비유라면 이런 곳에 사용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중동 지역의 한 낮의 태양은 살인적입니다. 그것도 여름 건기에는 정말 위험합니다. 태양은 세상에 생명을 공급하지만 그런 혜택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뜨거운 태양 아래서 일하는 사람들, 사막이나 광야의 나그네가 생명을 구원받고 소생할 수 있는 것은 그늘입니다. 이 역시 누구나 다 공감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고 철저한 보호가 따릅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 거하는 자, 아직 어떤 질문이 많이 남아 있고 의심의 구름이 다 걷힌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지존자의 그늘에 거하는 자는 그 안에 “살게”되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어떤 세상의 풍파도 미치지 못합니다. 전염병도 미치지 못합니다. 세상의 육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다 두려워하는 어떤 것도 그것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사냥꾼의 올무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질병과 전쟁이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해변의 파도처럼 밀려오지만 그곳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면 두려움을 가질 이유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과 그 분의 날개 아래 있는 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쉴새 없이 들이닥치고 다양한 모습으로 닥아오는 염려와 근심 거리들, 우리가 세상 떠날 때까지 대면해야 하는 것이지만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가장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것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거울로 하나님을 보는 것같이(옛날에는 거울이 동(銅)으로 만들어 반짝거리게 닦은 것으로 아무리 잘 닦아도 직접 보는 것과는 차이가 많이 남) 희미한 면이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확실한 사역 몇 가지만 알아도 우리는 그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기적’을 한 번만 베푸셨다 하더라도 그분이 하나님이신 충분한 증거가 됩니다. 주를 따른 사람들은 축적된 많은 예수의 기적적 증거를 보고 연구 분석하여 그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결론을 내리고 나서 좇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많이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몇 가지 사실 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하나님의 은밀한 곳, 사람들이 보지 못하여 조롱하고 비방할 수도 있지만, 그 은밀한 곳에 ‘거하십시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분은 그 날개 아래 스스로 말뚝을 박고 스스로를 그곳에 살게 할 것입니다. 악한 것들이 와서 만지지도 못하는(요일 5:18) 영역 속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인가 해야 하는 것이라면 이것이 과연 은혜인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이 은혜라고 배웠습니다. 은혜는 “아무 공로 없는 자에게 거저 베푸시는 호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찾아 들어가야 하는 것이라면 이런 “행위”가 필수적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왜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말할까요? 어떤 사람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합시다. 이것을 관찰하던 분이 마음에 감동이 있어 그를 돕기로 하였습니다. “은행에 계좌를 개설하면 거기에 일정 금액을 계속 보내주겠다”고 합니다. 두가지 반응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나하고 별 관계도 없는 사람이 왜 나를 돕겠는가? 분명히 무슨 음모가 있다. 내게 그나마 남아 있는 것까지 빼앗으려는 술책이 아닌가?' 만약 이렇게 생각하면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그 분의 인격을 믿고 감사함으로 그렇게 하면 그 다음부터 그 계좌로 필요한 만큼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계좌를 개설’하는 것도 일종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 행위에 비하여 얻는 것이 비교할 수도 없이 큰 것일 때 그 행위는 더 이상 ‘공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계좌 개설이라는 것을 했기 때문에 그 결과 그런 도움을 받는다고 자랑한다면 얼마나 초라한 자랑이 되겠습니까? 은밀한 곳에 거하는 것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은혜입니다. 은밀한 곳에 '거하는 것'을 방해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무시하시고 주 안에 거하십시오. 그 다음은 큰 영광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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