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Posts
Join My Mailing List

바람을 꾸짖으시다

바람을 꾸짖으니 아주 잔잔해지다

마8:23-27 ; 막 4:35-41 ; 눅 8:22-25

근래 우리 나라는 코로나 19라는 바이러스에 공격을 받아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2월 28일 오전 현재 전국적으로 2000명이 넘는 확진자가 발생. 특히 대구 경북 지방의 확진자는 이 중 상당부분을 차지합니다. 체감적으로는 수 년 전 메르스 보다 더 심한 것 같습니다. 온 국민이 다 마음을 졸이면서 속히 이런 어려움이 지나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개신교나 천주교, 불교 등의 종교 집회도 당분간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럴 때 우리가 하지 말든지 아니면 매우 조심스럽게 해야 하는 것

먼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더라도 나중에 충분히 검토하고 조심해서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이런 일로 인하여 어려운 일을 당하는 자들에게 심판론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어려움이 올 때 마다 참으로 지치지도 않고 등장하는 것은 심판론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으로서 말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과도한 주장일 수 있습니다. 오늘 날 이 사태 중심에 중국과 신천지가 있고 또 확진자 중 절반 이상이 신천지 추종자들임으로 이런 말이 많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참에 신천지의 모든 것이 드러나 해체 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고 또 중국 역시 기독교 박해를 멈추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도 하긴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일을 보면서 이런 재앙을 당하는 자들을 다 도매금으로 심판론 안으로 몰아넣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하나님의 심판과 무관 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중국 우한에서 이것이 발생하였을 때 그곳의 어느 선교사가 국내의 목사에게 보낸 편지가 갑자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우한 시에서 가장 먼저 이 바이러스로 사망한 자는 중국 종교성 고위직으로 교회를 가장 심하게 핍박한 자라는 것입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그 안에 어떤 메세이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의미가 확대되어 기독교를 핍박하는 시진핑 곧 중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는 주장이 뒤 따라 나왔습니다.

한 술 더 떠서 이 재앙은 현재 한국의 정부를 심판하는 것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실제로 한 대형 교회 설교자가 설교 중에 그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총리의 이름이 정세균이라 세균이 이 나라에 득실거린다고. 만담도 아니고 저자 거리 한량의 말이 아니라 말씀을 맡은 주의 종의 말인 것이 믿어지지를 않습니다. 우리 나라의 도덕적 타락으로 인한 하나님의 채찍이라 하는 사람도 있고 그 외에도 (누가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서 그런지 막말들이) 넘쳐 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일 말고도 큰 재앙이 일어날 때마다 기독교의 한 모퉁이에서는 ‘심판론’이 꾸준히 나왔습니다. 1959년 9월경에 경상도 일대를 강타한 태풍 ‘사라’ 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통계를 보니 사망 849, 실종 206, 이재민 373,459(명) 이었습니다. 필자가 그 당시 어주 어렸을 때였지만 저희 집에 들락거리던 교인들이 이를 “심판 받은 것”이라고 수군 대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1987년에는 KAL 858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랍에미리트의 수도인 아부다비를 출발하여 방콕으로 향하던 중 북한의 사주로 김현희라는 공작원 등에 의하여 공중에서 폭발된 것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승무원 11명과 115명 승객이 전원 사망하였습니다. 이 당시는 필자가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었던 때인데 어떤 일간지에 모 목사가 컬럼 중 “그 항공기 안에 죄인들이 많이 있어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2004년에는 인도양에 쓰나미가 발생하여 230,000 명이 사망하고 150,000 명이 부상하였습니다. 누가 찍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상황 동영상 여러 편이 있습니다. 영상으로 봐도 무섭습니다. 2008년, 미얀마에서 사이클론으로 인하여 128,000 명이 사망하였습니다. 또 2011년에는 일본 후쿠시마 앞 바다에서 일어난 쓰나미로 원전사고까지 발생하였습니다. 18,000 명이 죽고 그 후유증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타락한 부자들(인도양 쓰나미), 그리고 한국을 괴롭히던(혹은 지금도 괴롭히는) 일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론이 단골로 등장하였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 쓰나미와 관계없었던 사람들은 그 때 사고를 당한 자들보다 더 의롭습니까? KAL 858 기를 타지 않은 자들은 그 때 사망한 자들보다 더 의롭습니까? 지금까지 비행기를 백 번도 넘게 타고 다녀도 아무 사고 없었던 자들은 “대단히 의롭습니까?” 그래서 아무런 사고도 없이 세계를 구석구석 다닐 수 있는 것입니까? 코로나 19에 감염되지 않은 자들은 감염된 자들보다 더 의롭습니까? 이 일로 이미 사망한 사람들은 비밀리에 무슨 죄를 지은 것이 틀림없군요. 이 와중에도 아직 살아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보다 훨씬 의로워서 여태 살아있는 것입니까? 누가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사람이 죽다

여기서 우리는 누가복음 13장의 예수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회개 하라는 주제의 말씀입니다. 여기 두 건의 사고가 소개됩니다. 하나는 어떤 갈릴리 사람을 빌라도가 잡아 죽여서 그 피를 자신의 제물에 섞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로 그들이 그렇게 죽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빌라도가 이렇게 한 것을 보면 갈릴리 지역에서 누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잡혀서 죽은 것 같습니다. 그냥 죽었으면 이런 말을 안 할텐데 빌라도가 “제물에 그들의 피를 섞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저주스러운 죽음을 말합니다.

이런 사건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것에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빌라도에게 그렇게 죽은 자가 다른 갈릴리(살아있는 자인지 죽은 자인지 모름) 사람보다 특별히 더 죄가 많아 그런 것으로 여겼습니다. 주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렇습니다. 3절에는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와 같이 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사건은 죄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것이긴 해도 “그들이 특별히 더 악해서 그런 일을 당한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실로암이란 예루살렘 성 남쪽 문 옆에 있는 물 저장소입니다. 그곳에 망대가 있었나 본데 그것이 무너지면서 18명이 죽는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당한 자들에게는 “날벼락”같은 것입니다. 이 역시 사람들은 심판론을 말한 것 같습니다. 주님은 이 사건도 역시 같은 의미로 설명하셨습니다. 거기서 죽은 자가 죽지 않은 자보다 훨씬 더 죄가 많아 죽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일 앞에서 그 일을 당한 사람을 놓고 어떤 평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죄로 인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있는 자, 그런 사고를 당하지 않은 자보다 더 죄가 많아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심판론으로 고통 당하는 자들을 비난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혹시 그렇게 느껴진다 하더라도 그런 것을 쉽게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책임 있는 자는 더욱 더 신중해야 합니다. 오히려 입을 다물고 겸손히 엎드리는 것이 맞습니다.

고난의 의미들

이럴 때 심판론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는 우리가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신비한 이유가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자녀가 당하는 어려움은 간단하게 평가하고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욥이 그 큰 어려움을 당했을 때 친구들이 와서 한 말은 “화개 하라”였습니다. “네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이런 고난을 당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한결같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욥기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적어도 모든 고난이 다 “죄과”로 말미암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신묘한 이유가 있습니다.

히 12:8 에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는 징계를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징계가 없다는 것은 사생자라는 매우 강한 표현을 서슴지 않습니다. 징계는 심판과 모양은 비슷하게 보여도 전혀 다른 것입니다. 징계와 심판은 그 외형이 비슷합니다. 사실 육신의 눈 만으로는 눈치 채기도 어렵습니다. 서툰 평가는 그것으로 지신의 영적 수준을 공개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사 57:1,2는 더욱 더 놀라운 진술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현재 쓰는 개역개정 성경에는 그 뜻이 좀 약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요지는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 할 때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나는 의인 들이 있는데 이들은 “하나님께서 화액(禍厄) 전에 데려가신 것(개역성경)”이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화액을 당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평안으로 부르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죽음의 모양이 어떻든지 간에, 평안하게 부름을 받는 것처럼 보이든지 아니면 매우 큰 고통과 어려움 속에 불행해 보이는 죽음을 맞든지 그 속의 내용은 우리가 잘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징계하시는 자를 우리가 심판 받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고, 또 화액 전에 부름을 받은 자들을 저주받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비슷하게 보이는 것도 어떤 이에게는 연단이고 어떤 이에게는 심판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속 깊은 사랑을 심판이라고 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코로나로 고난을 당하는 중국 사람 중 어떤 사람은 심판을 받은 것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연단이나 징계를 받는 것일 수 있습니다. 비행기 폭발 사고로 세상을 떠난 자들 중 어떤 이는 심판을 받은 자가 있을 수 있을 지 모르나 어떤 자는 “화액 전에 부름을 받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일일이 그것을 다 알아 낼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을 다 싸잡아서 심판론을 말하는 것은 “자신도 용서를 받아야 할 대상인 한 인간으로서” 그렇게 자신 있게 할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입을 다물고 겸손하게 삶을 뒤돌아봐야 합니다. 자연이 인간에게 이렇게 비협조적이 된 것은, 즉 가시덩굴과 엉겅퀴를 내고 깜부기를 내며 메뚜기가 날아드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한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우습게 여긴 자들에게 급성 전염병으로 심판하신 것도 사실입니다. 찾아보려고 든다면 성경에서도 이런 예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하나님을 조롱하던 헤롯이 충(벌레)이 먹어 죽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심판이고 저주가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 불행하게 보이는 모든 것이 다 심판이고 저주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오묘하신 진리 앞에서 입을 다물 줄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면서 너무도 쉽게 심판론을 말하는 것은 자신의 의에 도취된 또 다른 구역질 나는 죄입니다. 이런 식으로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코로나 19도 무서운 것이지만 이런 죄가 가중되는 것, 심판론을 너무도 쉽게 말하는 것도 그런 죄를 즐기는 또 다른 죄입니다. 그것도 스스로 숯불을 머리에 쌓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기도입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올려드리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목사들의 결론은 이렇게 뻔하게 맺어집니다. 그러나 할 말이 없어서, 아니면 그저 그렇게 틀이 짜여져 있기 때문에 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에 소개한 본문을 봅니다. 복음서 중 마태 8장, 마가 4장, 누가 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로 자세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는 막4:35-41을 본문으로 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풍랑이 일어나는 갈릴리 호수를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건너 가던 중 발생한 일입니다. 협곡으로 둘러싸인 갈릴리는 해발 -200 m에 위치합니다. 그래서 갑자기 골짜기에서 합쳐진 바람이 그 호수를 뒤집어 놓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사역과 관련하여 갈릴리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갈릴리가 마치 우리 인생살이의 현장과 같기 때문입니다. 잔잔하다가 갑자기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든 것을 집어 삼킬 것 같은 풍랑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양식이 여기에서 나기도 하지만 또 자칫하면 죽음의 현장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의 삶의 현장과 매우 닮았습니다.

막 4:37에는 “큰 광풍이 일어나 배에 물이 들어와 가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큰 광풍”은 큰 바람을 말하는데 이것은 갑자기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갈릴리 바다에 부는 바람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준비할 새도 없고 예측도 할 수 없은 순간에 갑자기 불어 닥치는 바람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다루어 볼 수도 없는 바람입니다. 그로 인하여 주님이 타신 배는 침몰할 위기에 놓였습니다. 이 배는 많아야 7명 정도 탈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배 고물을 베고 주무시는 주님을 불러 깨웠습니다. 주께서 일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셨습니다. 여기서 이 말을 주의 깊게 보십시오. “꾸짖는다(헬, epitimao. 영, rebuke)”는 "반대편에 서서 상대방을 신랄하게 힐책하는 것"입니다. 힐책하다, 꾸짖다, 야단치다 등의 의미를 갖습니다. 꾸짖음의 대상은 “바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람을 의인 화 한 것일까요? 그래서 한 인격체에게 하는 “꾸짖는 행위”를 바람에게 하신 것일까요? 예수께서는 표현의 달인이시라 때로 의인화 같은 매우 숙련된 수사법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단순한 수사법이 아닌 것 같습니다.

여기서 꾸짖다는 이 말이 쓰인 곳을 잠깐 보겠습니다. 소경 바디메오가 소리 높여 예수님을 불렀을 때 사람들이 그를 꾸짖었다고 할 때 똑 같은 단어가 쓰였습니다. 막1:25, 예수께서 귀신들린 자 앞에서 귀신을 꾸짖으셨다 할 때 똑 같은 단어가 쓰였습니다. 막 8:33, 베드로가 주님의 십자가 지심을 막으려 하자 주께서 그를 꾸짖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실 때 그 꾸짖음과 같은 말입니다. 눅23:40, 주님의 십자가 옆의 두 강도 중 하나가 예수님을 비난하는 강도를 꾸짖었다고 합니다. 이 때도 같은 말입니다. “꾸짖는다”의 분위기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가지 의미가 있겠으나 그 중 하나는 "더 이상 무엇을 계속 하지 못하게 제어"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일단 인격적 대상에게 쓰입니다. 뭔가 대단히 잘못한 자에게 하는 행동입니다. 주님은 바람을 이렇게 꾸짖으셨다고 합니다. 바람은 비 인격적인 것입니다. 기압의 차이로 인한 공기의 흐름일 뿐입니다. 주님께서 단순히 그 바람을 꾸짖으시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자연 현상을 나무라시는 것은 뭔가 이상합니다. 바람이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습니다. 지금 주님은 바람 그 뒤에 있는 한 인격체를 지금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그 자”를 꾸짖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배경에 있는 귀신이나 사단을 꾸짖으시는 것처럼 지금 그런 장면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보든 바람이 다 악한 것들의 장난인가?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연을 이용하셔서 요단 강도 멈추게 하시고 여리고도 무너뜨리실 수 있는 것처럼 사단도 때로 그렇게 할 수 있음을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풍랑 그 자체가 사단의 역사라 할 수는 없지만 사단이 이에 교묘하게 개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어디든지 무엇에든지 개입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를 건너는 이 때 사단이 노린 것이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한 배에 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풍랑을 통해 배를 뒤집으면 “- 어? 어? 이거 뭐야. 주님이 계셔도 배가 뒤집히나? 그러면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이나 안 하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나?” 뭐 이렇게 되기를 기대하지 않았겠습니까? 사단의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람을 일으켜 모종의 일을 꾸미는 사단을 꾸짖으셨습니다.

39절에 나타난 그 결과는 “아주 잔잔하여지더라”입니다. 여기서 “아주”는 헬라어로 “메가레” 즉 우리가 “메가 톤” “메가 바이트” 할 때 쓰는 그 “메가”입니다. “아주 크게 잔잔하여지다”, 이것은 “완전하게(perfectly) 잔잔하여지다”는 뜻입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유리바다 같은 것입니다. 바다는 다다인데 풍랑이 없는 상태 마치 표면이 유리 같은 상태를 말합니다. 완벽한 평화를 말합니다. 사단은 맹렬하게 일을 일으킬 수는 있으나 주님의 꾸짖음 앞에서 일단 그 일을 포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 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사용하라

다시 코로나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이 재앙이 어디로부터 왜 왔는지 잘 모릅니다. 단지 현실적으로 매우 심각한 상태에 있어서 언제 이것이 나를 덮칠지 아니면 사랑하는 나의 가족을 덮칠지, 더 나아가서 우리 성도들을 잡아 흔들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는 상상 이상의 일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려야 할 때입니다. 코로나 앞에 엎드리라는 것이 아니라 주 앞에 엎드릴 때입니다. 주께서 이 광풍을 꾸짖어 주셔야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주 잔잔해 질 수"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같은 배에 타고 계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세계 몇 위라는 한국의 의료수준을 믿고 거기에 맡겨야 하겠습니다. 실제 한국 의료 수준은 세계적인 것같습니다. 제자들이 탄 배에는 베드로를 비롯하여 갈릴리에서 잔뼈가 굵은 내로라 하는 어부들이 타고 있습니다. 어느정도까지의 풍랑은 이들의 숙련된 기술로 감당할 수 있겠지만 때로 그 한계를 넘는 미친 바람이 불 때는 그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 뒤에 아주 악한 것이 도사리고 앉아서 이를 조종하는 경우에는 이 어부들의 기술은 초라 해집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처음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을 깨우는 것도 안 해본 것이 아닙니다. 이럴 때 정답은 바로 주님을 깨우는 것 밖에는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부르짖으면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는 주님이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주를 모르는 자들은 이 모든 말이 그저 허공에 대고 소리라도 지르고 마음에 위안이라도 받자는 말로 들릴 수 있겠으나 우리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늘 그렇게 하고 살지만 이제는 더 특별히 주를 부를 때입니다. 주여! 우리를 위하여 일어나소서! 그리고 저 바람을 꾸짖어 주옵소서!

믿음을 사용해야

물결이 아주 잔잔해 진 후 주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마8장 평행 구절에는 “믿음이 작은 자들아” 눅8 에는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없는 말을 서로 만들어 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건 종료 후 믿음에 대하여 주께서 여러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이 때 하신 말씀은 제자들이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있다가 없다가 하는 수준” 이런 것을 “믿음이 작다”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지적을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면 지금 손에 훌륭한 무기가 주어져 있고 또 어느정도 다룰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거대한 적을 만나면 당황한 나머지 그 무기가 자기에게 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있는 줄은 알아도 갑자기 사용법이 생각나지 않는 것, 그래서 이미 가지고 있는 것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하는 상황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친 바람도 주님이 꾸짖으시매 아주 잔잔해 질 수 있다는 것, 주님은 그런 분이시고, 그 분이 나와 같은 배를 타고 함께 가고 계신다는 것을 제자들은 다시 한 번 체험합니다. 이번에 우리를 두렵게 하는 이 코로나 바람도 주님께서 한 번 음성을 발하시면 물러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믿음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잘 알 수도 없는 심판론을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좀 더 나중에 한숨 돌린 후에 신학적인 고찰을 통해서 조심스럽게 해도 되는 말입니다. 회개는 그들만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심판일 수 있는 것이 또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의 징계이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화액 전에 평안으로 부르시는 은혜로운 복일 수 있습니다.

잘 알 수도 없는 것을 의로운 척하면서 뱉아 내는 것이 아니라 돌이켜 봐야 합니다. 혹 내가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이것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이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수 있겠는가? 이것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저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나와 우리 가족 그리고 우리 성도들과 이 백성들을 긍휼히 여겨주소서! 주여 일어나셔서 저 바람을 꾸짖어 잔잔하게 하옵소서!

찬송가 : 피난처 있으니 (70)

​문의하기

 

작은큰교회프로젝트

rev-hur@hanmail.net

010. 3813.9041

© 2017 by Churchmentor.org 

이름 *

이메일 *

제목

메시지

This site was designed with the
.com
website builder. Create your website today.
Start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