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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으세요

탁월한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가 말한 것과 같이 사단의 능력은 강할 뿐 아니라 매우 교묘합니다. 사람이 이에 맞서기는 불가능 할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할 정도이니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시험의 내용은 영리함과 교묘함의 극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단의 목적은 하나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범위를 좀 좁히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시려는 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에게 행복감을 느끼게 할 수도 있고 반대로 극도로 불행한 느낌을 갖게 할 수도 있습니다. 행복감 때문에 하나님께 무관심 할 수도 있고 반대로 불행감 때문에 하나님께 무관심하고 원망하고 또 반역을 꾀할 수도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에게도 사단은 떠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그를 자녀 답지 못한 자녀가 되게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서는 아버지 얼굴에 먹칠하는 자녀가 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또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들을 혼동시킬 수 있습니다. 구원, 믿음 등은 성도들에게 사활적으로 중요한 것인데 이 의미를 축소 왜곡하여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 시킨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히11:6)”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믿음을 성경이 말하는 그 개념이 아닌 다른 것으로 대체함으로 사단은 그 목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사단은 교묘한 거짓말장이

소위 적극적 사고(positive thinking)로 그 중요한 믿음의 의미를 변질시키는 것으로 사단은 한 동안 재미를 톡톡히 봤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아무 관계도 없는 것입니다. 마음먹은 대로 된다는 것인데 이런 것은 반드시 기독교에서만 언급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없이도 충분히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패배주의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구원을 얻는 믿음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것이 복음인 양 열광합니다. 또 어떤 경우는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는가”하는 것이 무엇이 중요하냐고 묻습니다. 예수가 실존 인물인지 아닌지, 부활이 사실인지 아닌지 이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믿는 것”,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들이 말하는 믿음은 사실과는 관계없이 공중에 붕 떠있는 하나의 관념(觀念)일 뿐입니다. 사람의 심리를 공략하는 하나의 기술일 뿐입니다.

히 11:7에는 그 믿음의 내용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것과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한다.” 위에서 말씀드린 왜곡된 믿음의 개념과 정 반대입니다. 히11:6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실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에 대하여 잠깐 멈추어 서서 이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쁘시게 한다(pleasing)”는 ‘신적 호감을 불러 일으킨다 (divine favour)”는 뜻입니다. 굳이 ‘신적 호감’을 말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과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과 구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아첨 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진리와 진심에서 나오는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인격적 관계는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를 갔습니다. 대부분은 강단에 서서 설교하는 자를 목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저 사람은 목사도 아닐 것이다. 그냥 우리를 현혹하기 위하여 목사인 척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 교회에서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관계에서 최소한의 시작도 믿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은 이제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그의 삶에 개입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가 직업이 무엇이든, 재산 규모가 어떠하든, 학력이 어떠하든 … 관계없이 “믿음”을 보시고 그의 삶에 개입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전지 전능하신 능력이 나를 세밀하게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황홀합니다.

베드로의 고백

눅5:1-11은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주를 따르게 된 사건”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주께서 베푸신 이적을 체험한 후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으나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으나 주께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라고 하시자 그대로 하였더니 엄청난 양의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이렇게 계산을 했어야 합니다. “이 분만 잘 따르면 평생 먹을 것이 나오겠구나!’ 그러면 바로 “감사합니다”라고 했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항상 그분의 도움을 받기 위해 어떤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주님을 “고기 많이 잡히게 하시는 분”으로 믿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표현은 어떤 위대한 한 인간을 만났을 때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실존 앞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하는 말입니다. 모세가 불붙은 떨기 나무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을 때 느낀 바로 그 감정입니다. “모세가 하나님 뵙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3:6).” 이사야가 성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베드로가 주로 잡는 고기는 유대인은 ‘암눈’이라 하고 아랍인들은 ‘무 쉬트’라고 합니다. 마치 지느러미가 빗(comb)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겨울이 되면 갈릴리 북쪽 수심이 낮은 곳에 서식하다가(그 지역에는 땅 밑에서 온천수가 나와 수온이 겨울에도 비교적 높음) 봄이 되어 수온이 높아지면 암수가 짝을 지어 사방으로 흩어진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벳세다(갈릴리 북쪽) 자역에서 이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배 두 척을 이용하여 폭이 1.5 미터도 안되는 그물을 쌍끌이 하여 잡습니다. 그 날 따라 밤새도록 헛 그물 질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 곳에 베드로가 원하는 고기가 있을 리 만무하지만 그대로 그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다시 그물을 챙겨 나가 내렸더니 그렇게 고기가 잡혔다는 것입니다.

오랜 경험이 있는 베드로는 바로 알아챘습니다. 물 속의 고기를 임의대로 움직이시거나 아니면 그 고기들이 어디 있는 지를 보고 계시는 분, 결코 우연일 수가 없는 이 놀라운 일을 통해 베드로는 그 분이 “신적 권위를 가지신 분” 혹은 ‘하나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누가 이런 역사 앞에서 담담할 수가 있겠습니까? 갈릴리를 모르는 자 같으면 “어쩌다 알아 맞춘 것”이라고 생각해서 상대가 “뭔가 비범한 자”라고 생각 하는 수준에서 멈추었을 것이고 또 그런 능력으로 인한 도움을 계속 받고 싶어했을 수도 있습니다. 베드르는 주님이 “고기 잡이의 비범한 달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베푸신 이적들의 목적

주께서 베드로에게 오셔서 이와 같은 이적을 베푸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고기를 많이 잡게 하는 분”으로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은 것입니다. 그의 고백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 주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은 이런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사건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예수님은 자신을 이렇게 계시하셨습니다. 단순히 낫기 어려운 병을 고치실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내셨습니다. 눅 5:12-16에는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문둥병을 하나님의 저주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것을 “헤렘”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저주하신 것을 사람이 다시 회복 시키려고 하는 것 자체가 정죄 받을 일이었습니다. 여리고가 무너지고 난 후 그 성을 재건하는 것자체가 금지되었습니다. 즉 헤렘입니다. 그런데 후에 벧엘 사람 히엘이 이를 어기고 여리고 땅이 놀고 있는 것이 아까워서 다시 정지 작업을 할 때 큰 아들을 잃고, 더 나아가서 문을 달 때(여리고 성의 재건을 의미) 둘째 아들을 잃는 저주를 받았다고 합니다(왕상 16:34).

그러므로 문둥병은 누가 고치려고 시도 해서도 안됩니다. 저절로 나으면 하나님께서 저주를 풀어주신 것임으로 그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감히 예수께 나아와 자기 병을 고쳐 달라고 한 것부터 믿음의 행위입니다. 그 문둥병자가 말합니다. “원하시면 나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5:12). 그냥 고쳐 달라고 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내가 원한다”고 하시고 그에게 손을 얹어 고치셨습니다.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는 것은 당시 문화로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죄의 저주를 풀어 주시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의 속성(屬性)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후의 기사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것입니다(눅 5:17-32). 이 때 주님은 환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변에서 수근댑니다.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을 감히 발설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저 사람이 누구길래 함부로 이런 말을 하는가?” 이 역시 주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어떤 곡식을 손으로 훑어 먹은 일로 비난을 받았습니다(5:33-39). 이 때도 자신이 신랑이라는 말씀을 하시고 신랑이 있는데 금식할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을 인용하셔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그 규례를 낸 당사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일을 보거나 듣는 자에게 전하시는 메세이지는 “내가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으라는 것”입니다. 병 고쳐 주시는 분, 먹을 것을 풍족하게 주시는 분이니 나를 따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놀라운 일을 제대로 이해한 자들의 믿음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것을 요구하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이런 것입니다.

죄사함

주님은 시시때때로 “나는 잃은 양을 찾으러 왔다” 혹은 “죄사함을 위하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힘에 진하도록 사방을 다니시며 버려진 자들(사회적 약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자들)을 찾고 회복 시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적극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까? 예수가 실존 인물이든 아니든, 그가 기적을 행 하였든 아니든 “그렇게 했다고 믿는 것이 마음에 평안을 주니 그렇게 믿자”는 것입니까? 이것은 사단의 진리 왜곡이 먹혀 들어간 것일 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것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를 위해 잃은 양을 찾으러 오신 분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죄사함”이란 과거에 저지른 어떤 어떤 죄들을 용서받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담을 통해 들어온 죄로 인하여 파괴된 모든 것을 회복하시는 분임을 의미합니다. 처음의 에덴은 우리가 경험하는 이런 세상이 아닙니다. 갈등과 미움이 천지를 덮고 죽음이 왕 노릇 하는 이런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경험한, 현재 경험하고 있고 또 앞으로도 경험하게 될 모든 악한 것은 다 아담을 통해 들어온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피하여 숨는 것,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하였던 아담과 하와의 갈등, 마침내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가인의 살인, 여자는 해산의 수고를 해야 어떤 기쁨을 맛볼 수 있고 남자는 평생 이마에 땀을 흘려야 소산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이것은 노동의 신선함을 폄훼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고생스러운 것’을 말합니다). 자연은 더 이상 사람에게 협조적이 아닙니다. 가시덩굴과 엉겅퀴를 내고 있습니다. 자연도 탄식 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 회복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바울이 말하였습니다(롬 8:18-22). 그리고 결국은 모두 죽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죽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오신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내 삶 만이 아니라 모든 것에 있어서 죄가 망가뜨리고 파괴한 아름다움과 영화를 회복 시키시는 분입니다. 이것을 개인에게 적용하여 보십시오. 죄로 인하여 잃은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다 포함됩니다. 죽음도 이기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회복

그 회복은 ‘원상복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회복하시는 에덴은 과거의 그 에덴이 아닙니다. 만약 원상복구가 목적이라면 처음부터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을 ‘허용’하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타락을 막으실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께는 충분히 있습니다. 당연히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합니다. 부모가 이를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가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허용할 때는 보다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 결과를 경험한 후 그 진리를 체험적으로 알게 되었을 때 그 자녀의 삶은 더 견고 해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성장을 위하여 선택한 부모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한가지 저의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의 아이가 두 세 살 정도 되었을 때입니다. 그 때는 대부분의 가정 집에서 성냥을 쓸 때입니다. 팔각으로 된 큰 성냥이 있었는데 아이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두었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찾았는지 성냥 알갱이를 가지고 노는 것을 봤습니다. 그럴 때 마다 뺏어서 보다 깊은 곳에 감추곤 했습니다. 나중에는 어른 들이 성냥 켜는 것을 보았는지 성냥을 켤 줄 알게 되었습니다. 불이 확 붙으면 까르르 웃으면서 획 내던집니다. 참 위험한 행동입니다. 그럴 때마다 엉덩이도 때리고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더 깊은 곳에 감추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러다가 손을 한 번 데고 뜨거운 맛을 보면 그 다음에는 가지고 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그러기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겨울 어느 날 아이는 마루에 있고 손님들이 오셔서 어른들은 안방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친척 어른 한 분이 갑자기 마루로 쏜살같이 뛰어나갔습니다. 그 잠깐 사이에 아이가 성냥을 또 켰는데 목에 매고 있던 명주(실크) 목도리에 불이 붙어 버렸습니다. 하마터면 얼굴에 큰 화상을 입을 뻔하였습니다. 그 친척 분이 아이를 향하여 앉아 있다가 마침 그것을 보고 뛰어나가 목도리에 붙은 불을 손으로 확 훑어서 껐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 후 아이는 성냥을 켜 보라고 앞에 주어도 그것을 쳐다보지도 않고 도망갔습니다. 그냥 못하게 한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를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으나 도움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원상으로의 회복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높고 영화로운 곳으로의 회복입니다. 처음의 에덴으로 회복이 아니라 그 보다 훨씬 더 높은 에덴으로의 회복입니다. 하나님을 피하여 숨던 죄인이 하나님 앞으로 나올 때 하나님은 그가 본래 가지고 있던 착한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영광을 중심으로 찬양하는 자로 회복 시키십니다. 그래서 더 이상 세상의 풍파에 흔들리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유혹에 정신을 빼앗기는 자가 되지 않게 하십니다. 오히려 그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하나님의 영광된 세계를 환하게 들여다보는 자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할 일이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겠지만 주를 섬기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이라는 것을 아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회복은 심령의 가난으로부터

혹 여러분의 삶에 죄가 들어와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있습니까? 아무리 노력을 해도 회복할 수 없는 상처가 있습니까? 쓰라린 실패가 계속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가진 것이 있든 없든, 아는 것이 많든 적든,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능력이 있든 없든 상관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어떤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문둥병자나 12년 혈루병자 그 밖에 별로 투자 가치가 없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리가 없습니다. 예수를 이렇게 믿으십시오. 모든 것을 회복 시키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도움을 청하십시오. 주님은 그것을 기다리십니다.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은 “하나님을 피해 숨어 다니던 자를 하나님 앞에 세우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닮으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처럼’되려는 교만을 꺾으십니다. 때로는 이런 것이 아픔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이 왜 이렇게 ‘비참해지는가’ 하는 서러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하게 되지 않으면 결코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더 나빠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회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과의 갈등이 치유됩니다. 여기서 부터 모든 것의 조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 삶에 “깊숙이” 개입하십니다. 더 이상 하나님은 그 전에 우리가 짐작하던 하나님이 아닙니다. 진정한 회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잠시 후에는 말할 수 없는 감사와 찬양이 중심으로부터 입술을 통해 터져 나올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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