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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메세이지 < 마리아의 노래>

마리아의 노래 Magnificat

눅 1:46-55

성경에는 여러 곳에 하나님의 영화로움을 찬양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출 15 장에는 출애굽 이후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찬양하는 모세와 미리암의 노래가 있습니다.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로 시작됩니다. 삼상 2장에는 아이를 갖지 못해 눈물로 살던 한나의 노래가 있습니다. 삿 5 장에 비교적 긴 드보라의 노래도 많이 알려져 있는 것 중 하나 입니다. 시편은 이런 종류의 노래가 무수합니다. 오늘 말씀 드리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될 것이라는 천사의 고지(告知)를 받고 이에 응답하는 마리아의 노래입니다. 라틴어로 Magnificat이라고 합니다. 성모 마리아 송가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아! 성령충만이

놀랍습니다! 이 말씀을 먼저 해야 하겠습니다. 마리아는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조롱 하려는 것이 아니라 놀랍고도 부러워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안에 잠재되어 있는 시심(詩心)에서 우러나온 것이 분명히 아닙니다. 천사의 고지도 당연히 신령한 방식으로 이루어졌지만 마리아의 이같은 반응도 분명히 성령께서 역사하신 결과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미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마리아는 아직 결혼 전의 처녀입니다. 앞으로 마리아에게 닥칠 수 많은 어렵고 혹독한 경우의 수를 생각한다면 당연히 심하게 거부를 했어야 합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 만일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야만 하신다면 “하필이면 그게 왜 나 여야 하는가?” 따져 물을 수도 있습니다. 또 마리아가 마침내 설득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마지 못해 “팔자가 그런가 보다”라는 식의 체념 속에서 이런 일이 벌어져야 합니다. 노래는 무슨 노래이고 찬양은 무슨 찬양입니까? 온 가족이 다 슬픔에 잠겨서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당시에 미혼 모에게 내려지는 사회적인 혹독한 비난과 징벌에 대하여는 이미 우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노래 전 편에는 찬양과 감사, 희열이 넘치고 있습니다. 마리아에게 성령께서 감동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수 많은 경우의 수는 무시되거나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열악한 오지로 파송 되는 선교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거기 가서 어떻게 살까 싶은데 정작 그 선교사는 ‘희망에 들떠’있었습니다. 그 가족들과 친구들은 매우 복잡한 표정으로 함께 하였지만 당사자는 오직 그것에서 벌어질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대한 기대 만 말하고 있었습니다. 세상 물정을 모를 나이도 아니고 그렇게 단순한 성격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 벌어질 또 다른 일들이 왜 없겠습니까? 뉴스나 그 밖에 들려오는 소식 만으로도 고난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그를 사로잡으신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없으면 수 많은 계산이 따릅니다.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합니다. 그래서 고민은 많이 하지만 결국은 다음에 하기로 하거나 아니면 ‘누가 하겠지’하고 포기합니다. 바울이 말년에 에베소 교회 장로를 모아 놓고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겠다는 말을 하였을 때 장로들은 한사코 말렸습니다. 그 뒤에 벌어질 일이 뻔하기 때문입니다(행20:17-38).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 할는지 알지 못하노라(22).” '알지 못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거기 가면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에서 결박되어 로마로 호송되고 거기서 순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를 머뭇거리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유는 “성령에 매여”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보여주고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그것의 영광을 알게 합니다. 그래서 다른 생각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을 내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찬양

마리아는 이 고지를 듣고 이렇게 노래를 시작합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 함을 돌보셨음이라(46-48).” “이 여종을 사지로 몰아넣는도다”가 아니라 자신을 영광스럽게 들어 올리심을 찬양합니다. 비천하다(헬, tapheinosis)는 신분이 낮아서 아무렇게나 취급 받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도 그를 주목해 주지 않습니다. 그런 자신을 인간이 경험할 수도 없이 높은 곳으로 들어 올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자녀가 출세해서 높은 지위만 얻어도 그 부모는 어깨에 힘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세상을 구원하시는 메시야가 자신을 통해 세상에 오실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임으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번도 누구에게 인가 귀히 여김을 받아 본일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이 없을 것 같은 자신을 하나님께서 주시하시고 선택해 주셨다는 것을 찬양합니다. 그저 바닷가에 있는 모래 알 중 하나 같은 자신을 하나님이 주목 하셨다는 것입니다. 개울 옆에 있는 작은 자갈 중 하나와 다름없는 자신을 불러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저 밥이나 주고 물이나 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형언할 방법’이 없는 영광스러운 일의 당사자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생각할수록 놀랍고 감사합니다. 사람들에게 조명 만 받아도 말할 수 없이 자랑스럽고 기쁘다고 하는데 지고의 하나님께서 이런 일에 선택해 주신 은혜를 크게 노래해야 합니다. 찬양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찬양이 영혼으로 부터 터져 나옵니까? 비천한 내가 하나님께 선택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게는 이제 모든 저주는 물러가고 나는 은혜 아래 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나를 통하여 무엇인가 영화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별히 내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내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어떤 방식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인식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고 계시는 일에 내가 지금 쓰이고 있습니다. 교회의 일원으로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한 부분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탁월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하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하나님이 나를 두셨습니다. 그 역할의 영광을 안다면 우리 역시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리아가 노래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 하심'

마리아의 노래는 ‘자신의 노래’가 아닙니다. 흔히 누군가 노래를 할 때는 대부분이 ‘자기 이야기’인 경우가 많습니다. 얼마나 어려운 인생을 살았는지, 내가 얼마나 슬픈 상태에 있는지, 무엇 인가를 이루기 위하여 얼마나 수고 했는지, 결국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말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한 분들의 노래는 현저하게 다릅니다. 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말하는 것들입니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 하셨으니(49).” 마리아는 평소에도 하나님의 능력에 관심이 많았는가 봅니다. 그런 것은 한 순간에 갑자기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침내” 알아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믿음 사이에는 어떤 갈등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은 피상적으로 볼 때 하나님이 능력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가르침을 비웃는 듯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확연히 드러내어 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능력이 환하게 드러나는 것을 지금 놀라운 방식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능하신 이”는 신구약을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 붙는 “전능(almighty)”라는 말입니다. 창17:1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히. 엘 샤다이, El shadai)”라고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은 ‘약속한(하시고자 하는 일)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신약에서도 용어만 다르지 같은 의미를 사용합니다. 마리아는 그 분이 “큰 일(탁월하고도 놀라운 위대한 일)”을 행하셨다고 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가 “큰 일”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고 또 무시당한다고 해서 작은 일이 아닙니다. 꼭 우레 같은 박수를 받아야 위대한 일이 아닙니다. 사실 가장 위대한 일은 그 존재조차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에 의하여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노래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도 저기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통해서 이루신다는 것이 놀랍고도 기뻤습니다.

비천한 자를 쓰시는 하나님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51,52).” 쥐꼬리 만한 권세와 재물을 가지고 마치 하나님이나 된 것처럼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는 것을 마리아는 이제 확실하게 경험합니다. 흩어진다는 것은 언제나 저주스러운 어떤 것 혹은 하나님의 징벌을 언급할 때 나오는 말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믿고 있던 것이 선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얼핏 보면 하나님의 법과는 무관하게 양육강식(Law of the Jungle)의 원리에 의하여 돌아가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강해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재물로 안되면 지식으로, 그것으로 안되면 권력으로. 무엇을 거머 쥐든지 강한 자가 되어야 잡혀 먹히지 않는다는 생각을 함으로 피 튀기는 경쟁을 하여 승리자가 되려고 합니다. 어느정도 그렇게 되면 성공한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죄인들의 시각으로 볼 때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태여 나자 마자 헤롯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생겨 나다가 사라졌을 것입니다. 12제자 같은 사람은 자의적으로 어떤 뜻을 펼 수 있는 인물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저 왕궁에 있는 어떤 귀족 여인의 몸이 아니라 비천한 마리아, 아무 것도 아닌 마리아를 통해 가장 위대한 일을 이루셨습니다. 세계를 정복한 가이사는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겠지만 절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헤롯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믿음의 눈으로만 이것을 보고 있었던 마리아는 몸소 이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냥 마음 속으로만 귀한 감사를 품고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가 찬양하지 않으면 길에 굴러다니는 돌들이 찬양 했을 것입니다.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자’가 이깁니다.

출애굽 당시 홍해에서 일어났던 일, 사사시대에 그 약한 백성을 통해 주변 강국 들을 다스리신 하나님의 능력은 전설에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이루어진 일이고 또 실제로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 일 들입니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십시오. 어떤 학자는 구약에 700종의 예언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까지 많지 않다 하더라도, 그냥 10가지만 있다고 하더라고 그 예언이 이루어지려면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길바닥 돌맹이 위치까지 다 주관 하셔야 이것이 가능합니다.

조금 우스개 소리를 해야겠습니다. 어떤 처녀가 신랑의 조건으로 이런저런 것을 말합니다. 조건이 별로 없을수록 결혼이 쉬워집니다. 그런데 성격은 이래야 하고 재산은 얼마정도 있어야 하고 외모는 또 이렇게 저렇게, 시댁은 또 어떠해야 하고 …. 조건이 많으면 점점 어려워집니다. 메시야가 어디서 태여 난다는 정도의 예언이면 그다지 까다로울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언제, 어디서, 어떻게 등등의 조건이 많을수록 난해합니다. 그러나 그 수많은 예언을 다 이루신 분이 하나님 이십니다. 실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주관하실 수 있어야 비로소 그것이 가능해집니다.

나자렛에서 살다가 호적 문제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으로 가야 했습니다. 아기가 조금 일찍 출산 되었다면 메시야는 그 예언대로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태여 나지를 못합니다. 조금 늦게 태여 났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고보니 하나님은 만삭의 마리아의 걸음 속도까지, 그가 타고 있었을 나귀의 걸음까지 정확하게 주관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길이 조금 험하면 보행 속도가 늦어지겠지요. 그래서 “길에 돌맹이 위치 하나까지” 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탄생의 시기 또한 얼마나 놀랍습니까? 마리아를 통해 출생하게 하실 것은 하나님의 작정에 따른 것입니다. 돌발적인 아이디어로 이렇게 행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이리저리 찾으시다가 마리아가 갑자기 눈에 띄어서 그렇게 하시기로 한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의 부모를 세상에 그 때 보내 셔야 하고 요셉을 그 때 그렇게 세상에 보내 셔야 합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아니라 부모를 통해 세상으로 온 것입니다. 이런 필수적 인과관계에 의하여 세상에 태어나게 되는 것인데 그 모든 것을 세밀하게 전지전능하신 능력과 사랑으로 이 모든 것을 다 주관하신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저 놀랍고 놀라울 뿐이었습니다.

주리는 자에게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 불리셨으며(53)” 주리는 자는 방금 말한 권세 있는 자,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줄 모르는 자들, 심령의 가난이란 것이 도무지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과 반대(對句)되는 말입니다. 식량이 없어 배가 고픈 자라기 보다는 항상 은혜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단순히 지위가 높고 재물이 많다고 해서 “나쁜 놈” 취급 하지는 않습니다. 가난 역시 반드시 재물이 없는 것 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심령의 가난(마5:3)이 복 있는 가난입니다. 이렇게 볼 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운 부자”도 단순히 동산과 부동산이 많은 자를 가리킨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배부르다”는 말도 음식을 많이 먹은 상태로 비유하는 “만족”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만족,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더 이상 그 무엇도 필요 없다고 느끼는 지고한 행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그 이후에도 소득이 별로 없는 가난한 계층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능력으로 배부른 삶을 살았습니다. 마리아는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진정한 배부름을 이제 생생하게 체험합니다. 노래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 이루시다

“우리 조상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55)” 다시 말해서 조상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예언하신 그 말씀이 자신을 통해 이제 현실화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 날을 기다렸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루어질지 궁금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그에게 현실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 하시되> … (54).” 긍휼, 도우심, 기억하심.. 우리는 마지막 숨 쉴 때까지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분의 능력과 사랑과 은혜 아래 있습니다.

마리아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비천한 우리, 배고픈 우리에게도 여전히 그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 때, 그곳에, 그런 방식으로 보내신 정확하신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과 긍휼은 결코 그 백성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반드시 믿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대는 일들은 어제도 그리고 방금 전까지도 있었을 것이고 내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굳세게 붙잡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마리아같이 메시야를 출산하는 영광을 누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게 그렇게 행하시고 찬양 받으시는 그 분이 비천한 우리를 통해서도 영광스러운 일을 하십니다. 우리는 무심코 하는 일일 수 있으나 그것을 통하여 엄청난 영광을 보이실 수 있습니다. 그저 매주 출석하는 교회, 그 안에서 일어나는 거의 일상적인 예배나 기도, 주목받을 만한 것도 아니고 내 기억 속에도 별로 남아있지 않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가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침내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날이 옵니다. 후일 우리에게 상을 주실 때 내가 기억도 못하던 것으로 인하여 면류관을 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명과 사람들을 귀히 여기십시오. 그런 일로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마치면서

주만 보고 사는 삶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헌신 했을 때 내게 다가올 일들은 많습니다. 내가 원치 않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손해 나는 일도 있을 것이고 공연히 비난의 대상이 될 가능성도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위축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하늘의 영광만” 보입니다. 우리들의 계산에는 두려운 것이 너무 많습니다. 지능이 높아서 그런 것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생각하여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을 스스로 포기하고 숨어 버리는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성령에 매이면’ 그런 것들이 별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성령에 매이면 하나님의 영광의 가치가 제대로 보입니다. 마리아가 울고불고 해야 할 순간에 찬양하는 것은 그것으로 밖에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오직 주만 보고 또 주의 영광 만을 사모하시는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번 성탄절에 마리아가 기뻐한 만큼의 기쁨이 심령에 넘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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