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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능치 못하실 일 전혀 없네


# 전능 # 섭리 #성경의 반전 # 성경의 미스테리 # 동정녀 탄생 # 신약의 족보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능치 못하실 일 전혀 없네

근래에 ‘반전(反轉, reversal)’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어떤 사건이 예상대로 순순히 흐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결정적 순간에 일의 형세가 뒤바뀌는 것입니다. 반전은 극(劇)적인 효과를 높입니다. 일상적으로 우리가 대하는 드라마나 영화에 이런 것이 없다면 아마도 매우 지루할 것입니다. 성경만큼 반전이 있는 기록은 없을 것 같습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합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 안에 가장 귀한 것이 있고, 더 이상 어떤 존재가 존재할 수도 없을 것처럼 사건이 진행되다가 가장 귀하고 복된 존재로 일어섭니다. 죽음이 땅에 덮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생명의 새 빛이 찬란하게 보입니다. 주 안에 있는 모든 인생도 다 그렇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과학적 잣대로는 분명한 오류인 것도 있고, 같은 것을 서로 다르게 진술하는 구절도 있습니다. 좀 더 깊이 보면 마치 많은 자료를 종합할 때 흔히 발생하는 ‘일관 적이지 못한 진술’도 눈에 뜨입니다. 성경이 인간을 통해 주어진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정하는 자들은 이것을 ‘모순’이라 하여 매우 즐거워하며 ‘영감설’을 부인하는 자료로 사용 하지만 성경을 옹호하는 자들은 이를 표면적 ‘미스터리’라고 합니다. 얼핏 보면 모순인 것 같지만 자세히 살피면 오히려 성경이 더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로 기록된 것임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모순처럼 보이는 어떤 것은 간단한 설명으로 그 논란을 해결 할 수 있는 것이 있는 반면에 어떤 것은 성경 전체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초심(初尋) 자들에게는 충분히 설명해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런 모순 혹은 미스터리가 합당하게 설명될 때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가 더 밝히 나타나기도 합니다. 저는 이것을 반전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오늘 여기서 설명하려는 것이 그 중 하나 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경을 덮어 버릴 이유가 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 앞에 더 깊이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되고 또, 그 큰 영광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예수님의 부친 요셉의 아버지가 두 명?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미 알려진 대로 마태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까지 내려 오는 방식으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누가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으로 기술합니다. 많은 연구 과제가 이 가운데 있지만 금방 눈에 뜨이는 것 중 하나는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의 아버지 이름이 각각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동명이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입니다.

마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메시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여기서는 요셉의 아버지를 야곱이라고 소개합니다.

눅3: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 여기서는 헬리 (엘리)가 요셉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야곱과 헬리는 같은 사람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 아니라 ‘다른 사람’입니다.

족보가 서로 다르게 기록된 이유

어떤 사람은 혼자 말을 하듯 글을 쓰기도 합니다. 이 때는 누구에게 읽히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님으로 독자를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읽히고자 하는 글’을 쓸 때는 ‘독자’를 염두에 둡니다. 독자가 어린 아이 인지 성인 인지, 어떤 문화권의 사람인지, 교육 정도는 어떠한지 등등 세분 할 수록 더 효과적인 글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될 수 있는 대로 정확히 전달하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독자를 염두에 두고 나름대로의 수사법을 사용하여 기록합니다.

마태와 누가는 그들이 전달하려는 것이 서로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구세주라는 것은 정확히 일치하는 주제이지만 그 분이 메시야라는 것을 증명 하는 것과 그 분이 무엇을 하셨는지 진술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일단 마태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자 모든 인류에 대하여 왕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에는 유대인에게 매우 익숙한 것을 자료로 하여 이를 설명합니다. 그들을 독자로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그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가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 같은 인간이 아니고, 인간 같은 하나님도 아닌 하나님이시자 인간이심을 증명합니다. 누가의 글을 보면 그가 염두에 둔 독자는 당시 헬라 철학에 큰 영향을 받는 사람들인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헬라 철학을 기반으로 하면 ‘선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으로 오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태가 기록한 족보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윗과 솔로몬을 통해 요셉 그리고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유다 지파 그리고 다윗의 후손임을 밝힙니다. 유대 인 출신을 의식하고 기록한 것입니다. 누가의 족보는 예수님으로부터 거슬러 아담까지 올라갑니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요셉, 그리고 저 위로 다윗의 아들 솔로몬 대신 나단이라는 이름의 다윗의 아들 계열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넘어서 아담이라는 모든 인류의 조상으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했을까요? 여기에는 잠시 전에 소개한 서로 다른 기록 목적과 방법 외에 대단히 중요한 비밀이 있습니다. 그 비밀의 열쇠는 렘 22:30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이미 멸망 하였고 남 유다 역시 바벨론의 공격으로 미래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당시 왕이었던 여호야 긴은 하나님의 뜻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여고냐의 후손 중에는 형통하여 다윗의 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자가 없을 것이다.’’ 여고냐는 ‘고니아’라고도 부르는데 바로 유다의 마지막 왕 ‘여호야 긴’입니다. 같은 사람인데 이렇게 여러 이름으로 불리웠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순종 하기를 거부하는 어리석은 여호야 긴에게 그렇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창49장에는 ‘’규(珪, 일명 홀(笏). Sceptre, 왕권을 상징하는 봉)가 유다 지파에서 떠나지 않을 것(창49:10)이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메시야는 유다 지파에서 다윗의 후손에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다윗의 후손인 ‘고니아 (여호야 긴)의 후손’을 통하여 메시야가 오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신약 복음서에서는 사람들이 도움을 구하면서 예수께 ‘다윗의 자손’이라고 소리치며 부릅니다. 여호야 긴 시대에 와서 이 예언은 취소 된 것입니까?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그 규(珪)가 이미 이스라엘을 떠났다고 슬퍼 하였습니다. 그 시기를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로마가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고 나서 총독을 파견합니다. 총독은 로마 황제의 권세를 대신하는 자 입니다. 로마의 식민지 정책은 될 수 있으면 정치과 관련이 없는 문화나 종교 등에는 관여하지 않는 관용 정책을 썼습니다. 넓은 지역을 다스리려면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는 로마 총독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예로 유대인의 대표 기관인 산헤드린에서는 사형 언도나 집행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던 것을 아마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총독에게 그 최종적 권한이 넘어 간 것입니다. 곧, 그 규가 더 이상 유대인의 누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로마로 넘어가 버린 것입니다. 적어도 그 지도자들은 그렇게 알았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여고냐의 후손을 통해서 메시야가 세상에 오시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유다 지파 중에서, 다윗의 후손 중에서 오시리라는 메시야 예언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참으로 놀랍고 놀라운 말씀을 드리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그 답은 이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솔로몬이 있습니다. 마태는 다윗과 솔로몬을 통한 계보를 소개합니다. 그런데 다윗에게는 또 다른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나단입니다. 솔로몬 쪽으로는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태여 나고 나단 쪽으로는 마리아의 아버지 헬리가 태어납니다. 그 헬리의 딸 마리아를 소개 하는 대신 그의 아들로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을 언급합니다.

왜 사위를 아들이라고 하는가?

유대인의 관습에는 딸의 배우자를 아들로 소개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이 때는 딸의 이름을 나타내는 대신 사위를 아들로 표기합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다가 실패 하였으나 다윗이 자신을 진심으로 선대하는 것을 알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 다윗아(삼상 24:16)!’’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사위를 아들이라 하고 며느리를 딸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사위가 장인에게 ‘’아버님'' 장모에게 ‘’어머님’’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민등록이나 호적에 오르는 명칭은 아닙니다. 단지 친근감을 표현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경우는 그런 친근감의 표현이 아닙니다. 법적으로 아들입니다.

말씀 하신 대로 이루어지다

이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예언 즉, 유다 지파에서 규가 떠나지 않을 것이고 그 메시야는 다윗의 후손이라야 하는 그 예언은 이렇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호야 긴의 후손은 아니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후손이라야 합니다. 따라서 그는 다윗의 또 다른 아들 아들 나단의 계열로 이어집니다. 마치 창 49 장의 그 예언이 무위로 돌아가는 것같으나 사실은 말씀 하신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얼마나 오묘하신 섭리입니까?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이사야는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사7:14)’고 하였습니다. 물론 여기서 ‘처녀(히, 알마)’라는 말은 ‘처녀 혹은 젊은 여인’으로 번역될 수도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전적인 단어의 뜻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요셉의 유전자를 가지고 태여 나신 분이라면 ‘원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부정모혈의 방식으로 태여 난 모든 인간은 다 죄 아래서 태여 납니다. 따라서 ‘죄 없는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어야 함과 동시에 인간이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에게 출생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다윗의 자손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예언은 정확히 이루어졌습니다. 누가는 이것을 명백하게 이런 방식으로 증명하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으며 기도하면 응답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착한 산신령이 아니라 바로 이렇게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능력’이란 무엇을 계획하고 그것을 이룰 수 있는 힘을 말하며 여기에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지혜가 포함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모든 것, 실로 모든 것의 모든 것을 다 주관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란 이런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태어나는 장소와 시간 그리고 그 상황까지 다 주관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인류의 모든 역사를, 풀 하나 자라는 것까지도 임의대로 주관 하셔야 합니다. 돌맹이 하나도 우연히 거기에 놓이는 법이 없다고 해야 맞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의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그 일을 하시는 분이시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분입니다.

내 인생이 내가 기대하는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크고 작은 실망이 우리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한도 끝도 없이 아래로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상황 속에 놓여 있을 수 있습니다. 마치 그 규가 이스라엘을 ‘떠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그것은 인간의 한계로 인하여 그렇게 인식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규가 어디론가 사라졌거나 이방의 손에 넘어간 것이 아니라 나자렛에서 무럭무럭 지혜롭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되매’ 세상에 밝히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실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은 누가 설명하고 설득한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철학적이고 과학적 설명에 따른 이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창조의 비밀을 다 알 수도 없습니다. 그것을 알 수 없다고 해서 부정하거나 그저 하나의 신화와 같은 수준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창1:1의 선언은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라 것을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터 시작 하라는 것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지혜와 능력을 가지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 지고 있고 또 그렇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증거가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이 불확실한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가 그것을 극복하고 여전히 기뻐하고 찬양할 수 있는 삶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스스로 위로하는 어떤 것도 다 허망한 결과를 가져 올 것입니다. 어려움을 잊고 될 수 있는 대로 좋은 것만 생각하자,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원래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 ... 아무 소용없는 자기 최면 일 뿐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그 어려운 중에도 힘을 얻어 일어 날 수 있었던 것과 더 나아가서 기뻐하며 찬송 하였던 것은 단 한가지 원리 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키우십시오. 말씀의 오묘 함을 깨달아가는 것 만이 이 믿음을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성경은 오늘도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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