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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와 천국


어린 아이와 천국

마18:1-4

"어린 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많이 들어 본 말씀입니다. "어린 아이처럼"이란 무슨 의미 일까요? 어린 아이의 특징은 많습니다. 아직 덜 자란 인간이지만 완벽한 한 인간, 순진무구(純眞無垢) … 등등 재치 있는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은 특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주께서 '어린 아이처럼'이라 말씀하실 때 어떤 특징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 일까요? 주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 때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충분히 이해하도록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어린 아이가 의미하는 것이 고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주께서 말씀하실 때의 문맥 ( context ) 을 통해 당시 사람들은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오래 전에 이런 설교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대충 이런 것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어린 아이 같아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를 생각해 보겠 습니다. 어린 아이란 어떤 특징을 갖습니까? 어린 아이는 잘 싸우기도 하지만 금방 잊어 버리 고 화해를 잘 합니다…… "

이런 식의 설교였습니다. 그 당시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그것이 어린 아이가 갖는 하나의 특징일 수는 있어도 주께서 과연 그런 의미에서 어린 아이를 세우고 말씀 하셨는지는 의문이 남습니다. 그 설교자는 재치는 있으나 제대로 설교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어린 아이를 이런 의미로 말씀하셨다면 어떤 일로 분쟁이 있은 후 화해 하지 않았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복음 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모순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를 제자들 앞에 세우신 배경

예수님의 공 생애가 후반으로 갈수록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크냐"는 다툼이 꽤 일어난 것으로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생각 할 때 주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날이 점점 가까워 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던가 봅니다(마18:1-4; 눅9:46). 물론 주께서 생각하시는 그 나라와 제자들이 생각하는 그 나라는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말입니다. 마20:20에는 세베대의 아들들(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주께 청탁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면 그 아들들을 하나는 우편에 또 하나는 좌편에 두어 달라 하여 다른 제자들의 분노를 산 적이 있습니다.

주께서 감람 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시기 바로 전 유월절 만찬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십자가에 대한 비장한 말씀을 하셨는데(눅 22:14-23), 바로 다음 내용인 눅22:24에는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는 다툼이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좀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의 낮아지심의 극치가 십자가의 수치와 고난입니다. 그것을 충분히 듣고 난 후에도 제자들은 높아지는 다툼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크냐?" 다시 말해서 누가 더 위대하냐? 누가 더 공로가 많으냐? 누가 더 똑똑하냐? 누가 더 잘할 것 같으냐? 누가 더 많은 권세를 누려야 당연한가? 누가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 할 것인가? 이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들 앞에서 주님은 어린 아이를 세우시고 "이 어린아이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크고 위대한 것"과 반대의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분쟁과 그 결과로 인한 파괴의 원인은 자신의 위대함을 나타내고 증명하려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어떤 분쟁도 그 씨앗은 이것입니다. "크다" "위대하다"는 자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한 것을 말합니다. 자기 자신 뿐 아니라 자기에게 의탁하는 자들에게 원하는 대로 해 줄 수 있음을 과시하고 싶은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것을 내 걸고 자신에게 충성 하기를 요구하고 그런 충성을 받고 싶다는 뜻입니다.

어린 아이는 그 반대입니다. 특히 여기서 어린 아이는 헬라어로 "파이디온(phaidion)"이라 합니다. 이 말은 유아(infant)라는 뜻입니다. "큰 자"가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어린 아이(파이디온)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자 입니다. 다시 말하면 철저히 부모의 힘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생명입니다. 사실 모든 인간은 스스로 존재할 수도 없고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한 순간도 존재조차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사는 자가 어린 아이 같은 자 입니다. 거듭 나긴 하였으나 하나님의 전적인 보살핌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아는 자가사실 상 큰 자 입니다.

실제로 은혜를 받은 자는 은혜를 받을수록 "은혜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낮아집니다. 스스로 작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 존재를 주장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아집니다. 이것이 어린 아이입니다. 어린 아이가 되라는 것은 무엇이 되라는 것도 아니고 어떤 공로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의 고행을 통해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이런 주님의 말씀을 불교에서 가르치는 해탈과 비슷한 것으로 말하고 싶어하지만 그것과는 전혀 다른 과정을 거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만약 이것을 그런 식으로 설명하게 된다면 구원을 은혜로 얻는다는 가장 기본적인 복음주의 교리를 스스로 망가뜨리는 것이 됩니다. 주께서는 어린아이를 통해 은혜로 얻는 구원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모든 복은 심령의 가난으로부터 시작됨

우리가 은혜 받은 가장 큰 증거는 심령이 가난해 지는 것입니다(마5:3). 어떤 탁월한 설교자는 8복을 순차적인 복이라 설명하였습니다. 즉, 심령의 가난이 애통하게 하는 것이며 그래야 온유해 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렇게 8복은 논리적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것은 고행이나 수행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알게 되고, 어떤 노력으로도 그 죄를 없앨 수 없다는 것과 구원을 얻을 만한 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연히 "은혜"가 아니면 설 수 없고 살 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어린 아이 즉 '파이디온'의 상태입니다.

주님은 어린아이를 통하여 이런 진리를 말씀하신 후, 마 18:15-35에는 특별히 '용서'의 도(道)를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어린 아이' 설교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연장 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마태는 그것을 그렇게 연장 선상에서 본 것이 틀림 없습니다. 누가 용서라는 것을 할 수 있는가? 사실 용서는 쉬운 것이 아닙니다. 별 것 아닌 손해를 입었을 때는 없던 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각한 손상을 입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계속적 후유증이 남는 경우는 그 해를 가한 상대를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잊어버리고 있다가도 "용서"하라고 하면 다시 생각이 나서 더 분노할 수도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였을 때 원수는 그냥 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 받았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그 무한 한 용서를 받은 일이 없는 자가 원수같은 자를 용서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이 전적으로 은혜로 용서함을 받고 은혜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만 용서가 가능합니다.

또 마18:10-14에는 '작은 자를 업신여기지 말라는 교훈을 주십니다. 이 역시 같은 맥락 속에서 주시는 교훈입니다. 자신이 한 없이 작다는 것을 아는 자 만이 이것이 가능합니다. 어린 아이 처럼 되라는 교훈은 그 뒤의 기독교적 미덕을 이끌어 내는 가장 중요한 원리입니다. 율법은 이렇게 해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업신여김은 큰 죄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죄행(罪行)이 아니라 수 많은 죄행의 뿌리입니다. 이 뿌리에서 줄기가 나오고 거기서 다양한 줄기가 나옵니다. 이것이 자라서 열매를 맺으면 인명을 경시하여 살인에 이를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이 살인을 말씀하실 때 이웃에게 라가(바보같은 놈)라고 한 것부터가 이 죄에 해당하다고 하신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인이 이런 심령 상의 범죄를 피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을 '이겨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는 바로 어린 아이 같음에 있습니다. 순진무구(純眞無垢) 나 '빠른 화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를 기초로 한 "은혜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근본적인 깊은 깨달음입니다. 이것이 천국에서의 삶을 합당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은 '거듭남'입니다. 누구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그 거듭남의 증거는 바로 심령의 가난과 애통으로 이어지는 심령의 상태입니다. 이것이 은혜를 아는 것의 시작입니다. 이것은 해탈을 위하여 고행을 해야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수 개월 동안 벽을 보고 앉아 참선을 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위대한 자들일수록 어린 아이 같아

수 많은 믿음의 선배들의 한 가지 공통적인 특징은 바로 '어린 아이'같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유치(幼稚)하다거나 무엇인가 미숙한 것이 아닙니다. 너무 순진해서 상황 판단을 제대로 못한다거나 너무 단순하여 깊이 있는 개념을 이해 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인간의 사고로는 헤아릴 수도 없는 깊은 영역의 문제를 통찰할 수 있는 사람들이며 세상의 모든 이치를 또 다른 혜안으로 꿰뚫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을 '어린 아이'같다고 하는 것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임을 알고 철저히 주께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어린 아이"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세 같이 위대한 종도 이런 면에서는 어린 아이와 같았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였습니다. 바울과 같은 천재적인 주의 종도 그랬습니다.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는 더욱 더 그랬습니다. 신실한 종들, 위대한 업적을 남긴 종들은 다 그랬습니다. 반대로 기독교 역사를 통해 볼 때 자신의 위대함(큼)에 기초한 신학자들이나 지도자들은 오히려 기독교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데 일조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어린 아이와 같지 않은 지도자들에 의하여 오히려 기독교는 방해를 받고 있습니다.

알만큼 알고 훈련 되어야 할 만큼 충분히 훈련된 자들이 왜 그토록 엎드려 기도합니까? 더 이상 기도를 안 해도 될 것 같은 예수님께서는 왜 그토록 기도하셨습니까?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들은 어린 아이 같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은혜로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에게 그토록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가 주어졌다면 그것은 은혜의 결과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잘 할 수 있었다면 그것도 은혜의 결과입니다. 어떤 큰 일을 이루었다면 그것도 은혜의 결과입니다. 이런 분들이 왜 그렇게 감사하며 찬양하였을까요? 그들이 이루어 놓은 일은 다 은혜의 결과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 같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소원이 있다면 그 중심에는 바로 어린 아이처럼 되는 것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다. 큰 일을 하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 아니라 낮아지는 것이 소원이라야 합니다. 주님의 일은 그런 자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교회사적으로나 우리 주변에서 하나님의 큰 일에 쓰임을 받는 자들은 모두 다 이 은혜를 아는 자들입니다. 똑똑하다고 해서,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추종자들이 많다고 해서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알고 어린 아이처럼 된 자들이고 더 나아가서는 그 은혜를 아는 자들이 쓰입니다. 작아보이지만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일도 이런 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은헤를 아는 자들의 현저한 특징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또 이런 자들은 항상 감사가 넘치고 찬양이 넘칩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다시 점검해 보시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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