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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둔 밤에도 주의 밝은 빛 인도하여 주신다


어둔 밤에도 주의 밝은 빛 인도하여 주신다

눅 15:27

오늘 설교 제목은 "여기에 모인 우리 주의 은총 받은 자여라 …. " 이렇게 시작하는 복음 성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저는 이 성가를 매우 좋아합니다. 집회 인도를 할 때도 이 곡으로 마무리 짓는 적이 많습니다. 이 노래를 아는 분들은 아마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 속으로 불러 보신 경험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제 2절의 가사는 더 심금을 울립니다. "주님이 뜻하신 일 헤아리기 어렵더라도 … 그러나 주께서 함께 하심을 아노라 … " 며칠 전에도 비교적 긴 시간 운전 중에 이 노래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불렀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는 그런 노래가 삶 속에서 생생하게 체험되는 것이며 또 그것이 근거 있는 소망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이런 노래들이 얄팍한 감정을 건드리는 것이면 이렇게까지 성도들의 애창곡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그 노래가 매우 성경 적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지나는 어두운 터널

우리는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한 치 앞을 내어다 볼 수도 없는 환경에서도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빛을 보고 인도 받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예를 들라고 하면 삼 박 사 일의 시간이 주어져도 모자랄 것입니다. 어떤 믿음의 선배가 어두운 터널을 지나지 않은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받는 사람들도 어둡다 못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할 수 있는 곳을 통과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이 경험하는 어두움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일이 물러가야 기쁨이 오는 것이 아니라 "고통 중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표현들을 사용하여 본다면 "환란이 물러가야 평안이 오는 것이 아니라 환란 중 평안"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만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두움 속에서도 밝은 빛이 비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언급할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브라함 등의 족장들의 기사를 보거나 설교할 때 그 족장에게 초점을 맞추어 그들이 성공적인 인물이 되기 위하여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였는지를 말합니다. 결국 성공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강조되어 보이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이야기에서 설 자리가 없어지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성경에서는 누가 등장을 하던 그 내용 중에서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유명 인물들은 모두 다 하나님을 돋보이게 하는 주연급 조연들 입니다.

아브라함이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무엇을 하셨는지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든 이삭이든 야곱이든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 사역을 위하여 부름 받고 한 시대를 살며 사명을 감당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이루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 중에 매우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는 이야기는 "마치 하나님께서 더 이상 돌보시지 않은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변함 없이 그들을 이끌어 가셨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예외 없이 인간적 한계에 부딪칩니다. 어두움에 놓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것을 이루어 갑니다.

거기 계시는 하나님 (여호와 삼마)

당사자는 물론이고 성경을 보는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더 이상 돌보시지 않는 것 같은 상황 속에 이들이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밖에 없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들 혹은 그런 상황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처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들어 옵니다. 그런데 있을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점점 남방으로 내려 갑니다(창 12: 9)." 결국 가나안의 가장 남쪽 경계(약속된 땅의 경계)에 있는 브엘세바까지 갑니다. 브엘세바라고 이름이 주어진 도시에 간 것이 아니고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비어있는 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차지할 수 있는 곳은 이런 곳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족장은 부족의 생명을 책임지는 어른이자 지도자입니다. 그들이 잘 해야 하는 것 중 하나는 '물'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혹 있을 수도 있는 이족(異族)들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지역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곳에 우물을 파고 물을 얻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사람들이 달려 듭니다. 그래서 협약을 맺게 되는데 아마도 물을 나누어 쓰는 계약 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브엘세바(약속의 우물 혹은 일곱 개의 우물)라는 이름이 붙습니다(창21: 31-34). 약속된 땅에 왔으나 땅 한 뙈기도 쉽게 얻을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처음에는 마치 자신의 안목이나 경험적 판단에 의하여 어떤 것을 결정하고 얻는 것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으나 하나님의 선명하신 인도하심이 항상 함께 하였습니다. 그리 오래지 않아 아브라함은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그 분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창 24:7).

만약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았다면 애굽의 바로가 아브라함의 처를 잡아 갔을 때 그녀를 순순히 돌려주지도 않았을 것입니다(창12:10-20). 그 후 그랄에 도피 하였을 때 애굽에서와 같은 일이 또 발생 하였지만 또 다시 하나님의 놀라우신 간섭으로 아내를 되 찾고 많은 재물까지 얻습니다(창20:1-18). 그의 처를 이렇게 빼앗겼을 때 아브라함이 할 수 있는 것은 목숨을 잃지 않으려는 구차스러운 거짓말 밖에 없었습니다. 아내를 빼앗길 때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의심스러웠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그러나 아내를 다시 찾게 되는 과정을 보면 하나님께서 잠시 그 손을 놓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떳떳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야곱이 벧엘 광야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28:16)!"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벧엘 광야에도 계실 줄은 몰랐다는 뜻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벧엘 광야는 "아무도 없는 곳"입니다. 형을 피해 아침 일찍 무엇을 제대로 챙기지도 못한 채 기름 병 하나 들고 도망하는 중입니다. 이런 경우 누구에게 도와 달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의를 위한 핍박을 받으면 억을 함을 호소 하면서 도움을 청하는 것이 그래도 떳떳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난 후 목숨에 위협을 느끼고 도망하는 형편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선하고 떳떳하고 명분이 뚜렷한 일을 할 때는 "하늘이 도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 "하늘의 도움은 커녕 벌이 내릴 것 같은" 생각을 갖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말 대신 "하늘"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참으로 놀랍게도 떳떳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만 함께 하시고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고개 숙이고 다녀야' 하는 죄인 들에게도 함께 하십니다. 떳떳하지 못하게 도망하는 야곱에게도 함께 하셨습니다. 야곱은 그 말을 하는 것입니다. 벧엘이라고 하는 그 "지역"에도 하나님이 계시더라는 뜻이 아니라 이런 상황, 자신을 도와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곳에도 여호와께서 함께 하고 계심을 알고 놀라는 것입니다. 그가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표현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바로 그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약속을 주십니다. 이것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그렇게 해 오신 것을 "재"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5)."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수시로 확인시켜주시던 것이 여기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 후 야곱은 외삼촌 집에서 결혼합니다. 그 외삼촌 라반은 야곱보다 잔 머리가 더 잘 돌아가는 사람으로서 그의 술수에 야곱은 속수무책으로 당합니다.

20년 동안 그 외삼촌은 자신이 좀 불리해 질 때마다 계약을 변경합니다. 이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갑 질도 이런 갑 질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도우신다 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야곱에게는 그것이 부정 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아마 야곱은 "벧엘에서의 하나님의 약속은 유효한가" 의심 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창 31:42 에는 야곱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하시지 않았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 손으로 돌려 보내셨을 것입니다." 무슨 말 일까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외삼촌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그 시점이 언제 인지는 몰라도 언젠가부터 그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전혀 돕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함께 하시며 벧엘 광야에서 말씀하셨던 것과 같이 그를 "지키고 계셨습니다."

포로기 이후의 구약 역사 속에서도

심지어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불순종을 반복하다가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버린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소위 포로기 이후에 기록된 구약 성경으로 역대기와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서 등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이 책들은 모두 "이렇게 멸망한 나라의 백성들에게도 여전히 하나님은 함께 하시는가?"라는 민족적인 심각한 질문에 대한 답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그 답은 "그렇다"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 이 책 들입니다.

에스더는 부모 없이 사촌 오빠의 손에 성장한 참으로 배경이 없는 여인입니다. 그러나 어찌 어찌하여 (표현을 이렇게 하였지만 하나님의 섭리임) 왕비로 간택됩니다. 그리고 유대인을 몰살 하려는 고전적인 나치스 당 같은 하만의 술수로 인하여 큰 위기에 처한 유대인을 구원해 냅니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입니다. 그것도 어떻게 보면 불행한 여자입니다. 그를 통하여 유대인이 구원을 얻은 것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돌보신다 는 뜻"입니다. 매우 어두운 시절이었지만 하나님은 떠나신 것이 아니고 그들을 버린 것도 아니라는 것을 에스더를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특히 하만의 악한 계교가 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모르두개를 꽂으려고 세운 나무(막대기, 장대)에 자신이 매달렸 습니다 (더 7:10). 이것은 하나님의 철저한 보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르두개가 자신에게 숙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에게 이런 식으로 복수하고 이 참에 뭔가 고분 고분 하지 않고 또 민족적으로 자격지심을 갖게 하는 유대인을 몰살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보고만 계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비록 자신이 징계를 내리고 있는 자라 할 지라도 다른 어떤 세력이 함부로 대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느헤미야는 여러 가지 악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52일 만에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 하였습니다(느6:15). 이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루어졌습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은 단순히 건축 물이나 구조물 복원 이상의 의미를 갖는 매우 상징성이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리더쉽도 훌륭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한 것을 이룬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술 맡은 관원이 되어(느 1:11) 자신의 개인적 소원을 왕에게 말할 수 있는 것 역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특히 아닥사스다 왕은 세계사에서 소개할 때 매우 잔인하고 변덕스러운 왕으로 소개됩니다. 그런 왕에게 고국에 가서 성벽 재건을 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모험에 가까운 것입니다. 더욱이 십 수년 전 이 성벽 재건의 움직임이 있을 때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로 그 왕이 스스로 이것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스스로 취소 하였고, 또 느헤미야에게 이 일을 위하여 여러 자재를 공급하여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움직이셨다고 밖에는 이해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느2:7,8).

그리고 이어서 에스라의 부흥 운동이 일어납니다. 말씀을 전할 때 그 백성들은 모두 "말씀 앞에 일어서서" 그 말씀을 더 듣기 원 하였습니다. 말씀을 들은 이들은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습니다(느8:6). 이것 역시 하나님의 감동이 그들에게 전해 진 것으로 하나님의 역사 하심이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떠나셨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둔 밤에도 주의 밝은 빛이 계속 그들에게 주어지고 있었습니다.

어두움 속에서도 참 빛이 준비되다

세상은 계속 어두웠습니다. 문화가 없어서 어두운 것이 아니라 진리가 없어서 어두운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500여년 전에 세상의 큰 빛인 것처럼 보이는 석가 세존이 등장합니다. 고타마 싯달타라는 인도의 왕족이 출가하여 인간의 모든 고뇌를 해탈(解脫)하는 방법을 터득 하였다고 하여 그 원리를 정리하여 제시하였습니다. 불교입니다. 모든 고뇌는 집착에서 비롯된다고 하고 이것을 8가지의 정도(正道)로 해결하는 방법이 제시되었습니다. 그 원리를 따르는 자들은 그것에서 새 삶을 찾았다고 하지만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더 어두워져 갔습니다. 그저 마음을 좀 다스리는데 유익할 뿐이었습니다. 그 후 등장한 또 하나의 빛으로 여기던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 같은 참 보기 드문 현학자들에 의하여 가장 이상적인 사회가 제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어두웠습니다. 이 어두움이 가장 짙어졌을 때 요한이 말하는 참 빛(이전의 빛이라고 생각한 것들과는 다른)이 비추었습니다(요1:9).

그리스(헬라)의 철학자들은 세상을 있게 하고 또 그 세상을 조화롭게 이끌어가는 그 근원적인 무엇을 '로고스'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그들이 말하는 '그것'이 바로 '그 분' 성자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요1:1에 "태초에 계신 말씀"에서 말씀이라 번역된 그 말이 로고스입니다. 유대인에게 "말씀"은 오늘 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상호 전달을 위한 하나의 '기호'로서 말(언어)이 아닙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이를 '다바르(dabar)'라는 히브리어로 나타냅니다. 왕이 어떤 말씀을 하면 그것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어 왕이 서울에 있는 왕궁에서 "목포에 항구를 건설하라"고 말씀 하시면 얼마 후 목포에 항구가 건설됩니다. 다시 말해서 왕의 말씀은 곧 왕이며 그 왕의 뜻을 이루는 "어떤 것"으로 그 말씀은 '그것'이라는 사물을 나타내는 대명사가 아니라 왕을 의미하는 인칭 대명사로 받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말씀이며 요한은 <그 것>이 아니라 <그 분>, 바로 헬라 철학자들이 말하는 로고스가 사실은 바로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 하셨다고 할 때 말씀(로고스)은 이런 의미입니다.

헬라 철학에 익숙한 자들은 이해 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분이 오셔서 모든 인류를 어둡게 만드는 바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오게 하셨습니다. 이전에 빛이라고 했던 것들이 다 빛일 수가 없었던 이유는 이 '죄'의 문제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해결할 능력은 없었습니다. 말씀 즉 참 빛이 오심으로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그 새로운 세상이 이미 도래 하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세상을 밝힐 그 참 빛이 바로 성자 예수님이며 그 분이 마침내 하나님의 약속대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동안 잠시 떠나셨다가 다시 오신 것이 아니라 계속 해서 역사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됨에" 그것을 이렇게 세상 속에 밝혀 주셨습니다.

건강하게 돌아온 탕자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범한다고 떠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죄악이 관영 할 때는 좀 멀리 계시다가 좀 개선이 되면 가까이 오시는 분도 아닙니다. 그 분의 긍휼과 사랑은 어떤 것도 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눅 15장에 있는 탕자의 비유를 잘 아십니다. 놀랍고도 놀라운 것은 이 설교의 본문으로 제시한 눅 15:27 입니다. 그 집에서 머물러 있던 탕자의 형에게 그 집의 집사 한 사람이 이렇게 보고 합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 들이셨다!"고 합니다. 바로 그 사람은 자신 몫의 유산을 받아 나가서 허랑방탕하다가 돌아온 그 사람입니다. 그는 돼지 먹이로 연명 하였었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 마저도 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15:16). 저는 쥐엄 열매를 맛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지역 사람들은 이것을 말려서 간식으로도 먹기도 하는가 본데 제대로 가공한 것이 아닌 그 열매는 생선 썩은 냄새가 났습니다. 그 비릿한 비위 상하는 냄새는 하루 종일 없어지지를 않았습니다. 그 고생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 두 끼 이렇게 먹다가 고향 생각이 나서 집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다가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건강하게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우리들의 경험으로 보면 이렇게 살던 사람들은 대부분 건강을 잃습니다. 그것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장 죽지는 않아도 큰 병을 얻어 엉망진창이 되어 돌아옵니다.

'건강한 그 사람!'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고 그 결과는 집에 오자마자 병으로 죽었다고 해야 권선징악의 원리가 더 명백하게 보이고 어쩌면 그것이 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으로서 더 강력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중에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거지 꼴이 된 것 외에는 별로 잃은 것이 없습니다. 본인이 이것을 알고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아마도 본인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냥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아직 수중에 돈이 있을 때는 별 생각 없이 원 없이 즐겨보자고 생각하였을 것이고 돈 떨어지고 굶다가 돼지 먹이라도 훔쳐 먹어야 할 지경에 이르러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내리는 징벌을 의식 하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용서 해달라는 기도도 하기는 했겠지만 낯 뜨거워서적극적으로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 집"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거나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확실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신을 비관하며 높은 절벽에서 뛰어내리거나 아니면 깊은 물에 몸을 던지기 보다 '아버지의 집'을 생각한 것은 그래도 삶에 미련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감동"이 임한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돌아갈 곳이 있었다는 것도 은혜입니다. 전체적으로 이 이야기를 관찰해보면 버림 받아 마땅한 인간이지만 하나님은 그를 계속 인도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밖에는 이 말씀을 해석할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얄팍한 지식 조차도 이 해석을 정당 하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풍성하다 못해 낭비되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뜻을 따르다가 핍박 당하던 다니엘이나 그 친구들 같은 사람들에게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불순종을 일삼는 죄인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부터 구원 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러한 인자와 긍휼로 함께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회개 하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가는 것처럼. 의관을 미리 갖추고 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걸레 조작 같은 옷을 걸치고서라도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모습 그대로 족합니다." 이제 그 쪽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로 가야 합니다." 가서 "문을 두드리고 열리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 문은 반쯤 열린 후 '두고 보다가' 그 나머지가 어렵게 열리는 문도 아닙니다. 두드리면 그냥 활짝 열리는 문입니다. 물론 기계적으로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자동문이 아니기 때문에 (인격적으로) 전심으로 두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몇 가지 제스츄어로 하나님을 움직일 수는 결코 없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저주 하면서' 부인하였습니다(마 26: 74). 이제 다시 안 볼 사람 대하듯 말입니다. 어쩌면 주님을 다시 볼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살짝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렇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저주는 본래 욕설이 동반되는 그런 것입니다. 제사장 집의 뜰에서 (숯) 불을 쬐면서 그렇게 했습니다 (요18:18). 베드로가,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베드로가 이럴 수 있습니까? 혹시 그 저주까지는 주님이 듣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증인 만 없으면 주님도 모르실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 주님과는 거리가 좀 떨어져 있었고 제사장에게 심문을 받고 있었고 또 그 하속들이 주님을 주먹으로 치고 욕하는 와중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주님을 다시 갈릴리 해변에서 만났을 때 주님은 바로 그 숯불을 피어 놓고 고기를 구워 떡과 같이 그에게 주셨습니다(요21:9). 그 숯불은 헬라어로 "안드라키아(anthrakia, charcoal)"라고 합니다. 이 말은 베드로가 제사장 집에서 '(숯)불을 쬐었다'고 한 그 부분(요18:18)과 바로 여기 단 두 번만 나오는 말입니다. 요한은 그 <숯불>을 지금 꼭 집어서 우리에게 특별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통은 잡목을 주워서 불을 붙입니다. 이 "안드라키아'는 우리 말로 참 숯 정도 되는 것으로 흔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여기서 왜 그 숯불(안드라키아)를 사용 하셨을까요? 주님은 베드로가 그날 무엇을 하였는지 다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를 궁지에 몰아 넣어 부끄럽게 하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그날 무엇을 했는지 다 알고 있으나 용서하셨다"는 메세이지입니다.

특히 이 대목에서 주께서 베드로 등을 불러 앞에 앉혀 놓고 그냥 말씀하시면 될 것을 왜 '조반'을 먹자고 하셨을까요(요21:12,13)? 밤새도록 헛 그물질 하느라 지치고 배도 고팠겠지만 구태여 "식사" 장면이 꼭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에게 다시 사명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식사 이야기가 등장할까요? 일단 밥부터 먹고 나서 혼 내키시려고 하는 것입니까? 이들에게 '같이 식사'를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누구와 식사를 하는 것과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이들은 누구를 집에 들이는 것이나 같이 식사를 하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조건이 만족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주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다는 이유로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비난을 많이 받으셨습니다. '같이 식사'를 하는 것은 허물이 없는 친구 사이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죄인과 함께 식사 하신다는 것은 그들과 똑 같은 사람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씻을 수 없는 잘못을 하였다 합시다. 그런데 그 피해를 본 당사자가 가해자에게 거나하게 상을 차려 놓고 "밥 먹자"고 하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그 식사를 하면서 새삼스럽게 무슨 잘잘못에 대한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베드로에게 '조반 먹자'고 하신 것! 그리고 그 숯 불, 정말로 베드로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하는 그 숯 불 위에 잘 구워진 생선! '너 왜 그랬냐?'고 묻는 대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에둘러 그를 추궁하시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 스스로 사랑을 고백하게 하시는 인자와 자비가 넘치는 배려"입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라는 말이 꼭 필요 할까요? 다시 말해서 두고두고 이 문제로 부끄러워하고 자책하며 가슴 아파할 수도 있는 베드로에게 그렇게 용서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베드로뿐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이것을 보았습니다.

용서란 문제 삼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용서란 이런 의미일 수 있습니다. 문제 삼지 않겠다는 것은 "다시 한 번 이런 문제가 발행하면 그 때는 가만 두지 않겠다"는 뜻이 함축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그렇게 옮기시는 것입니다(시103:12). 동은 어디고 서는 어디입니까? 어디까지를 동과 서로 구분합니까? 이것은 의도적 표현입니다. 한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사셀 양은 제사장 반열의 사람이 광야로 삼일 길을 데리고 나갑니다. 거기서 죽게 합니다. 양은 귀소 본능이 없습니다. 돌아 올 수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가는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용서이며 자비이며 긍휼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극대화 한다 하여도 이것은 항상 제한적이지만 하나님의 용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을 바라보고 돌아가는 것

아버지의 집을 다시 바라보고 있던 자리에서 떠나 그곳으로 돌아 가면 됩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영접하십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에게 어디서 무슨 짓을 했는지 묻지도 않습니다. 일정 기간 두고 본 후 영접 하지도 않습니다. 탕자는 아버지 뵐 낯이 없어 종으로 받아 달라 하지만 아버지는 그를 여전히 아들로 받아들입니다. 신을 신겨 주셨습니다. 종들은 신을 신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들에게 신을 신겨 줍니다. 그리고 아들의 옷을 입혀주십니다. 가락지를 끼워 주십니다.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입니다. 허랑 방탕 하다가 돌아온 아들에게 지나친 환대입니다. 그 형은 동생이 돌아온 것이 불쾌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은혜의 낭비"가 불쾌합니다. 그런 동생은 이렇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막말로 제 버릇 개주는 것도 아니니 언제 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사람에게 이렇게 낭비 하듯 과한 은혜를 주는 것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벌이 가해져야 공의로운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아버지에게서 그런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형은 동생에게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화가 났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는 항상 이렇게 '낭비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공식에서 낭비인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는 이렇게 "풍성"합니다. 딤전 1:14 에서 바울은 형편 없었던 자신을 이렇게 충성 되이 여겨 직분을 주신 것을 생각하면 은혜가 '넘치도록 풍성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넘친다'는 말은 정량을 초과하여 마구 부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은혜 그 자체가 벌써 무엇인가 넘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적당히 주시는 것이 아니라 '넘쳐 흐르게'하십니다. 이 은혜를 아는 자는 주께 감사나 헌신을 해도 '넘쳐나게'합니다. 이들의 헌신은 낭비적으로 보입니다.

주께 구원을 얻은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발을 씻겨 드립니다. 그것도 머리를 풀어 머리카락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볼 때 너무 과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 지역에서는 귀한 손님이 오면 발에 감람유를 흠뻑 바르고 수건 같은 것으로 발을 한동안 감싸서 기름이 스며들게 합니다. 밑 바닥만 가죽으로 된 샌들 같은 신을 신고 돌맹이와 가시가 많은 길을 오랜 시간을 걷다 보면 발에 상처가 많이 나기 때문입니다. 귀한 손님일수록 이런 서비스의 질은 높아집니다. 이 여인은 수건 대신 머리카락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 옥합의 향유도 매우 비싼 것으로 노동자 연봉에 가까운 것이라 합니다. 모든 것이 과합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뭘 그렇게까지 할 것이 있나"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직접 비난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께 받은 "낭비적으로 보이는 과한" 은혜를 아는 자는 헌신도 이렇게 합니다. 그렇게까지 할 것이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합니다. 순교자들을 보십시오. 처자식이 있는 사람으로써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습니까? 어느 정도 헌신 하면 되는 것이지 목숨까지 그렇게 내 놓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나 그렇게 합니다.

한량 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주의 일을 하다가 어려움 당하는 동안 주께서 돌보신다는 것도 사실은 은혜 중 은혜이지만 그래도 그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스스로 수렁에 빠진 자에게도 '그가 자신의 백성이면' 그에게도 역시 한량 없는 은혜를 주신다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멸시 하던 자에게도 사랑과 긍휼을 베푸시되 낭비적으로 풍성하게 베푸시는 분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을 일단 위로하기 위하여 하는 말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자비하시고 은혜로운 하나님의 긍휼을 잊지 마십시오. 주께 나오는 것을 망설이지 마십시오. 새 삶은 다시 주님을 바라보고 그 분께 돌아가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전히 함께 하십니다. 땅만 보지 말고, 자신의 부끄러운 처지만 바라보지 말고 아버지 집으로 가십시오. 상상도 못한 파티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롬 5:8 말씀을 상기 해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 어떤 유명한 설교자는 "아직 죄인 되었을 때"라는 구절에 '죄인' 앞에 '구역질 나는'이라는 수식어를 첨가하여 설교하였습니다. 여기서 죄인이란 하나님을 마구 모독하고 하나님께 침을 뱉고 주먹질 하는 것과 같은 자세를 가지고 있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 생애에서 가장 저질적이고 악랄한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변에 약한 자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이유로 자신을 거의 신처럼 자랑스러워 하는 '구역질 나는' 사람일 때, 가장 용서할 수 없는 때, 용서 받기 어려운 때에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죽으셨다"는 사람의 몸을 가지고 오신 주께서 할 수 있는 가장 최종적인 행동입니다. 땀을 흘리는 것도 아니고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더 이상은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가장 악할 그 때에 이렇게 하셨습니다. 그 때 조차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거듭나고 적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런 삶이 만족스럽게 이루어지지 않아서 늘 슬픈 마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그 때보다는 '나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최악 일 때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지금의 나의 허물을 이유로 떠나실 리가 없습니다.

삶의 여정 중 밤과 같은 어려움을 만나는 수도 있고 한 발자국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간다 하더라도 주님은 나와 함께 하십니다. 공간을 같이 공유한다는 의미에서의 "같이" 혹은 "함께"라는 말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 놀라운 지혜와 능력으로 나를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필요한 것만 채우시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낭비하시듯 넘치도록 넉넉히 채워 주십니다. 이 신령한 경험을 아침 저녁으로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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