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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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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노아

창9:18-27우리는 적나라(赤裸裸)라는 말을 이따금 사용합니다. 덧붙여진 것 없고 전혀 포장 되지 않는 원 모습을 드러낼 때 쓰는 말입니다. 당대의 의인으로 홍수 심판에서 유일하게 구원을 얻은 한 가족의 대표 노아가 평소와는 전혀 다른 '수치스러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에 대한 노아의 세 아들의 반응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은 이것을 보고 형들에게 고하고 나머지 두 형은 뒷걸음질로 들어가 그 하체(수치)를 덮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함에게는 저주가 임하고 두 셈과 야벳은 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왜 저주를 불러 옴과 동시에 복을 받는 이유가 되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수치를 드러낸 노아

이 야기는 노아의 큰 실수로 시작됩니다. 홍수에서 건짐을 받은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후 포도주에 취하여 하체를 드러내는 실수를 하였습니다. 하체를 드러냈다는 말이 정확히 어떤 행동을 말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실을 완곡(婉曲)하게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보이지 말았어야 하는 것을 자식들에게 보인 것입니다. 이때 함이 먼저 이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형들에게 그 사실을 알립니다(창9:22). 이 일로 인하여 함은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습니다. "그의 형들의 종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25)." 이것은 격한 감정으로 내 뱉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만한 사유가 충분한 것입니다.

이를 좀 더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노아는 "포도주를 마시고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21)." 이것을 23에는 "하체가 드러난 것"으로 다시 진술합니다. 많은 해석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의미를 깊이 알려고 하는 것은 불필요한 것입니다. "벌거벗었다"로 충분합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적나라(赤裸裸)'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술이 취하지 않았을 때는 어느 정도 자신을 포장할 수 있습니다. 말도 어느 정도 가려서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합니다. 의식적으로 자신을 관리할 수 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의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 하였으며(창6:9)" 또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노라(7:1)" 하나님이 노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노아는 모든 것에 흠 잡을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눈이 그래도 있는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며 또 자녀들 역시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런 그가 포도주에 취하여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함이 아버지 장막에 어떤 일로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그 의롭고 점잖고 훌륭하시던 아버지가 평소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모습으로 장막 안에서 누워 있었다는 것입니다..

함이 행한 일

함의 행동을 잘 살펴보겠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형들에게 알렸다고 하는데 여기서 "보다"는 여기 쓰인 단어는 일반적으로 그냥 보는 것일 수도 있고 사안에 따라서는 비교적 자세히 관찰한다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여기서는 문맥 상 '자세히 들여다 보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이런 행위로 인해 저주를 받았다고 했는데 이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장면은 평소와 다른 아버지의 모습이지만 순간적으로 보는 것 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런데 왜 비교적 자세히 봤을까요? 혹 아버지 몸에 상처라도 났는가 해서 보았을까요? 건강에 이상이 생겼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본 것일까요? 분명한 것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자세히 본 것이 아니라 실망으로 인한 비난의 목적으로 자세히 들여다 본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이 저주의 이유가 될까요?

그러나 '술 취해서 벌거벗은 것'은 정황 상 금방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함이 이 모습을 슬쩍 보았을 때 보이는 것 말고 '더 자세한 흠을 찾았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이렇게 추측할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습니다. 문맥을 고려하면 함과 그 형들의 태도가 "대조"되어 있습니다. 대조를 하는 것은 여기서 쓰인 용어의 한계 너머에 있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서 형들에게 "알렸다"고 합니다. 이것을 꼭 이렇게 해야 합니까? "알리다"는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는 것을 말합니다. 보이는 것에 대하여 만 사실을 간략하게 통보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자세히 봐야 보이는 것까지, 어쩌면 그 이상의 것을 상상하여 상세히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 객관적 사실 외에 이 사건에 대한 함의 부정적인 감정이 포함되었습니다.

셈과 야벳이 행한 일

이제 다른 아들들이 한 행동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셈과 야벳이 함으로 부터 이 말을 듣고 사태를 대충 파악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장막에 들어가 더 깊은 관찰을 하고 실망 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장막에 들어가기 전 "옷"을 준비 하여 어깨에 매고 뒷걸음질 하여 들어갑니다(23). 어깨에 매고 들어 갔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이유는 아버지의 몸을 덮을 준비를 하고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이들의 옷은 오늘날 처럼 셔츠와 바지 같은 것이 아니라 몸을 휘휘 감을 수 있는 큰 천입니다. 함이 '보는 것'과 너무도 대조 적입니다. 함이 그것을 보았다고 할 때 저는 그 '보다'가 자세히 관찰하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사실 그 '보다'는 관찰 이상의 행동을 의미 합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다른 이 두 아들의 행동과 대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들은 마치 그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눈을 감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반대로 함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보려고 한 것"의 차이입니다.

덮음의 미학

그리고 그 벌거벗은 몸을 "덮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악의 적이지는 않지만 호기심에서라도, 혹은 함의 말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얼굴을 돌려 아버지의 몸을 볼 수 있을 터인데 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덮다" 혹은 "덮음"이라는 말을 꼭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야벳과 셈이 복을 받은 이유를 바로 이런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흐름 중에서 근저에 흐르는 중요한 말씀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 '덮음'이라는 것입니다.

성막 안에 있던 언약 궤의 덮개를 시은소(은혜가 베풀어지는 곳)라 합니다. 언약 궤 안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기록한 돌 비가 들어 있었습니다. 물론 만나 항아리도 있고 아론의 싹 난 지팡이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엘리 제사장 시기에 전쟁에서 블레셋에 이 궤를 빼앗긴 적이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이 궤를 벧세메스라는 곳으로 옮겨다 놓았는데 그곳 사람들이 호기심에 "그 궤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래서 (오만) 칠 십 명이 죽었다(삼상 6:19)"고 합니다. 그 궤를 들여다 보았다는 것은 그 궤의 덮개 즉, 시은소를 제거 하였다는 뜻입니다. 율법의 저주를 덮고 있는 것을 열어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잘못된 것을 덮으면 더 나빠지는 것임으로 그런 행위는 잘못 된 그것 만큼 나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사기를 쳤다든가 범죄를 하면 발본색원(拔本塞源)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적합한 벌을 주는 것이 공의로운 것입니다. 요즘은 마치 "폭로"의 시대 처럼 보입니다. 고소 고발이 난무합니다. 정치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민간에서도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 18장에 주께서 이렇게 교훈 하셨습니다. "누군가 잘 못한 것이 드러나면 일단 혼자서 그를 권면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권면,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고하라 그래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 취급 하라(15-17)." 그것을 드러내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일단 "덮어 두는 것"입니다. 혼자서 가서 권면, 또 한두 사람이 권면 한 후 교회에 공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악을 키우거나 방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 그 사람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심판이 아닙니다. 은혜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 기간은 짧지 않습니다. 영원히 참으시는 분은 아니지만 오래 참으십니다.

이 "덮음"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다루시는 방식입니다. 언약궤의 뚜껑은 히브리어로 '카포렡(kaporeth)' 이라 합니다. 이것은 '카파르(kapar)'라는 동사에서 온 것인데 이것은 '덮는다'라는 뜻입니다. 노아 방주는 목재로 만들어졌습니다. 나무와 나무 사이로 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역청 같은 것을 칠 하였는데 그것도 "카파르"입니다. 본문에서 두 아들이 아버지의 몸을 옷을 덮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카사아(kasah)'라는 말을 씁니다. 카파르와는 다른 말이지만 비슷한 용어로서 서로 바꾸어 써도 무방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이렇게 덮어 주심으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다시 강조 합니다 마는 이것은 죄악을 오히려 배양한다는 공격도 받을 수 있는 것이지만 사실은 "죄인에게 회복의 기회를 주시는 은혜의 방편"입니다. 이 원리를 잘 새기고 있어야 합니다.

의인 노아, 그도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자

노아가 포도주를 많이 마시고 벌거벗었다는 것을 어떤 사람은 범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목 소리 높여서 정죄할 일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술"이라는 것으로 접근하여 이것은 구약에서 보이는 금주(禁酒) 의 교훈이라고도 하지만 과연 그런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노아를 두둔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정죄를 받을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본문의 의도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함이 저주를 받은 것은 그 아버지 노아의 책임이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아버지가 술 취하지 않았다면 함이 그렇게 할 일이 없으니 노아가 원인제공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잘 살피지 않고 본문만 미시적으로 보고 공자님의 교훈을 대입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사상을 강력하게 주장하기 위하여 성경을 등에 업는 행위입니다.

당시에는 물 보다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그런데 포도주가 너무 독하게 발효 된 것인지 노아가 너무 많이 마신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으로 인해 노아는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하지 못하였습니다. 평소에는 내면이나 외면의 자아를 잘 다스리던 사람이었지만 "술 취함"으로 인하여 그런 포장이 다 벗겨져 버렸습니다. 지금까지 잘 관리하던 자신의 내면에 있던 가장 추한 것이 드러나 버린 것입니다. 노아가 "벌거벗었다"는 것은 매우 의롭게 보여도 그도 한 인간으로서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창 6:8에는 분명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그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노아 역시 죄 아래 태어났습니다. 노아가 의인이었다는 것은 모든 것이 완벽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의로움" 역시 "덧입혀진 의"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노아에게 그 은혜가 필요 하였다면 여러분에게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의로워졌습니다. 그러나 저 뼛속까지 다 하얗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가 덧입혀진 것입니다. 소돔 고모라가 멸망할 때 롯도 의인이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어떤 면에서 의인입니까?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도 의인이었습니다. 의가 덧입혀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덮음은 사회악의 배양이 아니라 죄인에게 기회를 주는 것

우리는 주변 사람들이 벌거벗은 것을 봅니다. 우리들 자신도 벌거벗을 때가 있습니다, 가끔 만나서 좋은 이야기를 나누면 벌거벗은 것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해관계에 놓여지면 슬슬 그 적나라 한 모습이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 역시 다른 사람의 눈에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자 등의 맹수가 배가 부를 때는 약한 동물을 잘 공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금 막 설렁탕도 먹고 비빔밥도 먹고 갈비도 몇 인 분 먹은 사자가 눈 앞에 지나가는 토끼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착한 사자는 아닙니다. 배가 고플 때 사자가 본래 사자의 공격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아무 때나 막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계속 성공적으로 감추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자극을 받거나 근심과 염려 속에 있을 때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노아의 벌거벗음은 우리가 비웃을 내용이 아닙니다. 이것은 거울과 같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단 까발리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덮는"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회복을 기다려야 합니다. 개과천선을 기다리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치유의 역사를 기다리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오래 기다립니다. "기다림의 기간"은 여러분 속에 들어있는 사랑의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에게 이것을 기대하십니다. 작은 허물을 불필요하게 관찰하여 더 많은 것을 보려고 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비난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함이 저주 받은 이유를 우리는 너무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함은 피해자가 아닙니다. 받을 것을 받았습니다. 이와 유사한 행동과 자세는 저주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 자신의 삶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셈과 야벳의 정신을 배우고 연습하시기 바랍니다. 일단 나의 마음이 평강을 누리게 됨을 알 수 있고 또 가정이 안정되고 화목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 주변의 작은 사회가 평안하게 됩니다. 덮음은 악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가 회복되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다려 주심 없이 오늘날의 '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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