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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완성


율법의 완성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이 문제에 대한 수 많은 토론이 있었으나 오늘까지도 이에 대하여 혼란스러운 주장들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고 직접 간접적으로 질문을 해 오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마5:17-10; 엡2:15; 롬7:1-14를 중심으로 율법의 완성에 대하여 설명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율법이란(마5:17)

율법은 좁게는 모세 오경 안에 있는 하나님을 섬기는 규범을 의미하지만 마 5:17에서 예수께서는 조금 더 광범한 의미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 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가 한 묶음으로 나옵니다. 이것은 <구약> 전체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주신 구약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좁은 의미에서의 율법과 선지자를 나누어 살펴본 후 율법의 완성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율법

율법은 모세 오경을 가리키는 말로 그 안에 있는 시민법(도덕법과 민법)과 의식법(儀式法)으로 구분됩니다. 복수의 인간이 모여 사회를 구성 하면 그 사회화에 따른 여러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그 사회의 질서 유지와 또 어떤 정책의 정당한 구현 수단으로 법이 필요하게 되는데 여기서 정책이란 <하나님의 의를 실현하는 수단>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서 이 율법 가운데는 공동체를 위한 개인의 의무와 또 공동체를 위하여 기여한 개인에 대한 보상의 원리가 규정되어 있는데 일종의 오늘날의 용어로 사회보장 제도에 대한 원리도 포함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상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가장 숭고한 삶의 내용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1) 의식법은 하나님과의 막힘 없는 소통(막힘이란 죄를 의미), 즉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의식(儀式) 규정으로서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표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짐승을 잡아 대속의 제물로 드리는 여러 가지 제사 의식이 포함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되어 더 이상 행하지 않는 법이 되었습니다. 모형은 실체가 올 때까지 유효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법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2) 시민법은 위에 언급한 대로 사회 질서 유지, 하나님의 의를 구현하는 수단이며 공공복리 즉 사회보장 제도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한 개인의 공동체에 대한 의무와 이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 했을 때의 보상의 원리가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 법은 모세 오경이 기록 되던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하던 당시 '특수한 상황' 속에서 주로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후일 삶의 정황이 달라진 가나안에 정착 하였을 때는 그 규정들은 그 시대 상황에 따라 적용 되기도 하였습니다.

(3) 도덕법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갖추어야 할 높은 수준의 도덕적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시민법과 혼용되어 있어 명백히 구분하기 어려운 면이 있어서 시민법과 하나로 묶어 다루기도 합니다. 이 법의 원리는 시대와 관계 없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동안 항상 준수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4) 위의 규범 들은 주로 사례를 들어 설명한 것으로서 그 조문 보다는 원리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5) 최상위 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위법으로 이를 구현하는 여러 법령이 있는데 이를 통틀어 율법이라 합니다. 따라서 율법을 해석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조문 이라는 "표현 형식"보다 그 배경에 있는 법 정신 혹은 입법 취지(趣旨)를 이해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 인들이 주께 계속 질타를 받은 이유는 이 법 정신은 생각하지 않고 표현 형식인 조문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 법 정신 보다는 자신들을 합리화 하기 위하여 조문을 왜곡시켜 해석 하였으며 더 나아가서 이를 악용하는 사례가 빈번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요구"에 다가 가기 보다는 자신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려' 거기에 자신을 맞추려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고르반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예물>이라는 뜻입니다(레 1:2-10; 민5:15; 막7:11, 레위기와 민수기에는 7-80 번 이상 언급.)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 한 예물을 의미하는데 나중에 이 서원을 무를 수도 있는 제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재산은 부모를 봉양하는 일에도 쓰일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모를 봉양할 재산을 '고르반' 한 후 부모 사후에 이를 다시 무르면 자기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부모 봉양을 합법적으로 거부하고 재물을 챙기는 악한 꾀입니다. 주께서 지적한 하나의 매우 악한 예이지만 이런 식으로 율법을 다루었습니다. 주께 큰 질책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선지자

선지자의 기능은 다음 세가지 입니다. (1) 은밀한 것을 드러내는 자(forth teller) (2) 예언자(fore teller, 사람들의 삶의 자세에 따른 미래의 결과와 그들을 구원하시는 방법에 대한) (3) 율법의 해석과 적용을 맡은자로서 시대 별로 율법 정신을 기반으로 율법의 바른 적용을 위한 해석자였습니다. 이들이 외치는 의(righteousness)와 공의(justice)의 기준은 항상 모세 오경에 명시된 하나님의 율법을 기초로 합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모세오경의 율법과 이를 적용하는 선지자들의 해석을 율법이라는 포함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마 5:17-20 율법의 완성

어떤 사람들은 신약 시대에는 구약의 율법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본문에서 보여주시는 이 말씀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신약 시대에는 그 율법이 사문화(死文化) 되었다는 말도 아닙니다. 18절에는"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 점 일 획도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 점이란 히브리어 알파벳 중 마치 점을 찍는 것 같은 것이 있습니다. '요드'라고 합니다. 이 보다 좀 더 길게 내려 긋는 알파벳이 있는데 이것은 '와우'라고 합니다. 요드는 < ' > 처럼 생겼기 때문에 '점'이라 하고 와우는 우리말 알파벳 중 ㅏ ㅑ ㅓ ㅕ 할 때 윗부분을 약간 구부리는 < ㅣ > 처럼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이는 내리 긋는 '획'이라 합니다. 율법의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도 결코 유명무실 해지거나 폐기 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법은 시대에 따라 또, 사람들의 도덕관이나 철학적 조류에 따라 바뀔 수 있습니다. 수 많은 법 조항이 폐기 되었거나 개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완전한 것으로써 변할 수도 없고 폐지 될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구약 시대에서만 유효하고 신약 시대에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말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으로 오셔서 하나님 공동체의 한 일원으로 그 법을 온전하게 수행 하셨습니다. 주께서 구약의 율법 중 매우 작게 보이는 것이나 혹 어떤 것은 시대의 요청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것을 무시하거나 고치신 적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께서 율법을 '재해석'하셨다고 하기도 하는데 재해석 하신 것이 아니라 그 법 정신에 따라서 잘 못 이해 되고 있는 것을 바로 잡아 주신 것입니다. 주께서 "나는 율법을 완전(fulfill)케 하였다"는 말씀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주께서는 산상보훈에서 "옛 사람들의 율법 해석을" 비판하셨습니다(마5:21, 33). 이것도 구약의 율법을 비판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옛 사람은 단순히 예수님보다 먼저 태어난 구 시대 사람을 지칭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에게 율법을 잘 못 가르치고 있는 전통을 그대로 전수 받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은 "살인 행위"를 하지 않는 한 살인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라가'라 한 사람도 이 법에 저촉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22,23). '라가'는 오늘날 '멍청이'나 '바보 같은 놈' 정도에 해당합니다. 물론 이 말에 대한 어감은 그 때와 오늘 날이 좀 다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누구나 화가 나면 내 뱉을 수 있는 흔한 욕설이었다는 것입니다. 아주 악의에 찬 감정을 표출 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대를 모욕하는 말로 그것도 살인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방식으로 재 해석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살인하지 말라는 법의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마:21,22).. 하나님이 이 법을 수여 하실 때 원하신 것이 그것이라는 말입니다.

옛 사람들의 특징은 당대나 혹은 그 전대(前代)의 유명한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끊임 없이 인용합니다. 당시에는 그렇게 해야 그 가르침의 권위가 있었습니다. 저명한 학자의 해설을 인용하면서 살짝 자신의 해설을 가미 하는 정도였습니다. 주께서 "옛 사람"의 말들을 지적하신 후에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로 시작되는 가르침을 주시는데 이를 듣고 사람들이 놀라면서 "이는 권위 있는 가르침"이라 하였습니다(마7:28-29). 권위 있다는 것은 첫째, 주님은 전대의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불충분한 설명이나 왜곡된 하나님의 법을 인용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율법의 수여자(授與者)이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 말씀 자체에 이의를 달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진리가 주는 감화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율법에 나타난 성부 하나님의 뜻 외에 독자적인 어떤 법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법을 신약적 시대에 맞게 수정 혹은 개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창작적 요소도 그 말씀 안에는 없습니다. 율법의 수여자이신 제 2위 하나님으로서 그 법의 본래 정신을 설파 하신 것입니다.

엡2:15 법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지 하시다

"법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시고" 라는 구절은 마 5장의 예수님 말씀과 모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폐기 되었다는 것은 "법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입니다. 조문(條文)이란 율법을 나타내는 형식으로 '글'을 말합니다. 계명과 율법도 때로는 차이가 없이 쓰이지만 바울은 좀 더 내용을 상세화 하기 위하여 이 두 가지 단어를 병치(竝置)하여 "계명의 율법"이라고 표현합니다. 계명은 '도그마'라는 헬라어입니다. 영어에서도 'dogma'라는 말이 아직 쓰입니다. 이것은 교의, 교리 등으로 번역됩니다. 계명은 율법에서 추출한 신학 혹은 교리와 같은 말입니다.다시 말하면 바울이 폐기되었다고 하는것은 "글로서 표현된 계명으로서의 율법"입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말은 '조문'이 폐하여 졌다는 것인데 이 말은 신약의 성도가 율법으로 부터 해방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계명을 기록된 조문'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매우 헷갈립니다. 좀 더 보시기 바랍니다.

렘31:31-34 새 언약

그러면 법 조문이 없이 어떻게 율법의 정신이 구현될 수 있는지 의문이 발생하는데 예레미아는 이 구절에서 "새 언약(신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예레미야 시대를 시점으로 앞으로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맺으실 언약에 대하여 예언합니다. 잠깐 '언약'에 대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고대에서는 "왕과 그 백성"이 계약 관계에 있었습니다. 이를 종주권(宗主權) 언약이라고 합니다. 종주란 가장 높은 지위와 권세를 가진 왕이나 황제 등을 의미합니다. 고대 법전인 함부라비 법전 등에도 나타나는데 첫 부분에 "나는 너희의 왕"이라 해서 그 언약이 누구로부터 수여 된 것인지 명기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율법을 수실 때 "나는 너를 애굽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20:2)"라고 먼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소위 우리가 알고 있는 십계명의 조항들이 열거 됩니다(출20:3-17). 이러한 고대 법의 내용은 주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되어 있습니다. 전반부에는 그 왕을 어떻게 섬길 것인지 후반부에는 백성 상호 간에 어떤 관계를 가질 것인지 소개 됩니다. 그리고 끝에는 상벌 조항이 있습니다. "이 계명을 준수하면 왕으로부터 은혜를 입을 것이고 불 순종하면 왕으로부터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에는 이러한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주신 계명은 고대 사회의 종주 언약으로서의 율법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내용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학자들 중에는 구약의 율법이 함무라비 법전의 표절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그 형식이 유사합니다. 그러나 내용 상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볼 때(인터넷 등에서 함부라비 법전 검색하면 누구나 볼 수 있음)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왕'으로써 계약 관계에 있다는 것을 당시의 눈 높이에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주로 고대 시대에는 이런 법 조항을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커다란 돌 비에 기록해 놓습니다. 그 당시에는 개개인이 소장할 수 있는 책이 없었다는 것을 고려하시기 바랍니다. 계명은 율법에서 추출한 일종의 '도그마'이며 조문이란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헬라어 '그람마(헬, gramma 는 문법이라는 뜻이 아니라 글자(letter)로 소통되는 것들을 가리킴)" 를을 우리말 계명으로 번역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차이는 거의 대동소이합니다.

다시 새 언약으로 돌아갑니다. 모세를 통해 주신 언약은 옛 언약(구약)인데 이것을 그 백성들이 다 깨뜨렸습니다.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그 율법의 저주 뿐입니다. 모두가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언약'을 공표하셨습니다. 이것은 옛 언약이 실패로 돌아가자 후속 조치로 낸 것이 아니라 처음 에덴 동산에서 '아직 조문이 없는 언약'을 하실 때부터 준비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가죽 옷'등이 그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옛 언약 안에 이미 새 언약이 들어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예수님 시대가 가까워 올 수록 옛 언약 안에 들어 있던 그 새 언약은 점점 더 밝게 드러납니다. 신학 용어로 이것을 계시의 점진성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확실하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새언약은 하나님께서 임의로 그저 슬며시 채찍을 거두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봐 주는 형식"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속성(屬性, 본래의 하나님의 특성) 중 의와 공의(의는 항상 옳고 바르다는 뜻이고 공의는 상벌에 있어 공평하고 모순이 없다는 뜻)와는 모순 됩니다. 죄는 죄 대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 역시 율법(특히 의식법) 안에 내포 되어 있던 것입니다. "흠 없는 어린양의 대속"이 계속 해서 성경에 제시 되는 것이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요 1:29)..

예레미야가 말하는 새 언약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33절,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의 내 백성이 되리라 " <내 법을 그들의 그들의 속에 두다>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겠다>는 평행 대구(對句) 로서 "속"은 즉 "마음"이라는 의미입니다. '마음'은 대부분의 경우 구약에서는 "사람의 중심" 혹은 "영혼의 좌소" "자발적"이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돌 비에 써있었던 율법이 이제 사람의 마음에 기록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 밖에서 강제 하던 율법이 이제 마음으로 들어가 스스로 그 율법을 따르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율법이 몸 밖에서 강제한다는 것은 그대로 따르지 않을 경우 따르는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 하여 '내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최소한의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마음(중심)으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 언약이 이루어지면 그 법의 저주와 관계 없이 이제 기쁜 마음으로하나님의 법(요구)를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새 언약은 '은혜'의 언약입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 은혜 아래 있게 하는 언약입니다.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 날 밤 제자들과 만찬을 하시면서 잔을 들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마 26:28; 막14:24; 눅22:20)." 옛 언약은 모세를 통해, 새 언약은 예수를 통해 주신 것입니다. 옛 언약은 새 언약의 가치를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새 언약의 설명을 좀 더 합니다. 렘33:34은 "더 이상 이웃을 향하여 "여호와를 알라"고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유는 작은 자(어리석고 별 볼일 없는 자)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절로 알아지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완성으로 오시는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입니다.그렇다고 해서 성경을 배울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그 분의 영광을 알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완성으로 성령께서 강림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 대속 사역을 믿는 자에게는 성령이 오십니다. 그 성령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성부께서 주신 완벽한 법을 성자께서 개정하시는 것이 아니듯이 성령께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달라진 것은 저기 어디에 기록되었던 조문 혹은 의문(儀文)이 이제 마음에 기록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율법을 범하였을 때 임하는 저주가 두려워 최소한의 행위로 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법을 즐거워하여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새 언약의 백성은 율법에서 자유로워진(해방)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저주가 없어진 것이지 율법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오시면 새 언약의 백성들은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법 정신을 점점 더 밝게 이해 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의미를 더 밝히 알게 됩니다. 이것을 이해 하면 이방인과 선민을 구분하던 할례와 같은 규정, 당시 독특한 환경 속에서 주어진 음식물 규정이나 제사 법이나 절기 등은 더 이상 조문이나 의문으로서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법 정신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 같은 제도를 재현 하지는 않아도 하나님께서 그런 조문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뜻"을 이해 합니다. 물론 아직도 해석의 어려움은 있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어떤 원리가 이해 되면 이를 상세화 한 하위 법은 충분히 이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조명으로 말씀의 원리가 이를 "점진적"으로 이해 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비로소 제 기능을 하게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율법이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로운 삶의 내용"을 담은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만약 하나님께 "어떻게 사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인지" 질문하면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원리로 답하실 것입니다. 그 답은 십계명에 명백하게 요약 소개 되어 있습니다.

롬 7장

여기서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도'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는 행위주의 교리를 비판하고 있습니다.이 구절은 마치 율법은 폐기 처분 된 것이고 한시적으로 만 유효 했던 것처럼 오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를 위하여 로마 교회의 배경에 대하여 간략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초대 로마교회가 설립 되고 나서 '글라디오스' 황제가 어떤 이유로 로마 시에서 유대인 추방 령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그 후 약 20 년 후에 다시 그것을 취소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유대인 출신 교인을 바탕으로 교회가 설립되고 그 후 이방 출신 교인들이 교회에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아무래도 유대 출신 교인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약 20년 정도 유대 출신이 추방 되었던 관계로 이방인 출신 교인들이 교회 운영을 주도 하였는데 20여년 후 다시 돌아온 유대 파와 이방 파 간에 사상적, 교리적 분쟁이 발생합니다. 돌아온 유대 파가 그 동안 교회 운영에 대한 많은 문제를 제기 하면서 '믿음으로만 얻는 구원'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할례 문제는 유대 파 교인이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나온 것으로 이것은 "율법"을 축약한 것으로 율법의 대명사처럼 쓰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에 편지를 보내면서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하여 말을 많이 하고 있고 또 9-11 장에는 "그러나 선민인 유대인을 무시하면 안 된다"는 내용의 글을 포함시킵니다.

유대파 출신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지만 그래도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하여 율법의 기능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이 7장입니다. "율법은 악한 것이 아니고 유명무실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율법을 행 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즉 율법은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율법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이 너무도 타락하여 율법을 행하기에 너무 약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너희에게 있어서 율법은 구원의 방편이 아니라 너희가 얼마나 무능한 죄인인지 알게 하는 방편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서도 율법 폐기론이나 무용론이 나오지 않습니다.

바울은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를 죄로 알지도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롬7:7). 그런데 7:5에는 이해 하기 어려운 말이 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사망을 위한 열매를 맺게 하였다." 또 8절에는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다" 이 말만 보면 "율법"이 나쁜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 폐기론 자들은 이 구절을 열심히 인용하여 자기 주장의 근거로 삼습니다. 이것은 율법이 나쁜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죄"가 그렇게 교묘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죄가 사람 안에서 역사하는 한 의로운 율법을 이렇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것같이, 순결을 위한 성교육을 하면 성에 대하여 새로운 호기심을 가지고 눈을 뜨듯이 "죄 아래" 있으면 아무리 선한 율법도 그런 결과를 초래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새 언약 아래에서만 율법의 참 정신이 이해 되고 그것을 따름으로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개선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율법이 필요 없게 된 것이 아닙니다. 새 언약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율법은 참다운 가치를 드러냅니다.

요14:21

요한복음 14장은 예수님이 설명하시는 성령 론입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 설명하시는 가운데 21절이 있습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계명을 꼭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령이 오시면 주의 계명을 기뻐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억지로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 계명의 가치를 알고 자발적으로 따른다는 뜻입니다. 렘31;31-34 의 새 언약의 내용과 표현이 다를 뿐 동일한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하나님을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법 혹은 방식, 뜻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여기서 "나(예수)의 계명"은 구약과 다른 계명이 아닙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의 계명은 구약의 계명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사랑이 법이다...?구약에서는 율법으로구원을 얻고 신약에서는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 ..? 정말로 말이 안 되는 소리를 버젓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삶의 원리로서 율법과 성자 하나님이 주시는 원리가 다를 수 있습니까? 성령께서 이와 전혀 무관한 신비체험이나 하게 하시는 분일까요? 비록 우리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법을 우리가 다 따르지 못하지만 그 법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부족함을 많이 느낍니다. 그래서 주께 기도합니다. 한 발자국 이라도 점점 더 진리에로 다가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더 이상 정죄 함이 없습니다. 정죄가 두려워 주의 법을 따르는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마땅하고 그것이 나를 위한 최선의 길이며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살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율법에 따른 저주가 없어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율법"과 "율법 적"

우리는 때로 "저 설교는 너무 율법 적이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 용어 사용에도 많은 오해들이 있습니다. 율법을 말한다고 해서 율법적인 것은 아닙니다. 십계명을 강해 하면 율법적인가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내용을 설명해 줍니다. 거짓말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도 거짓 말만 안 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된 어떤 것도 마음에 품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생각이 내게 스쳐지나 갈 때 그것이 내 마음에 둥지를 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제 10 계명은 "탐내지 말라"입니다. 이것은 행위 이전의 마음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음욕이나 살인적 감정을 품는 것조차 마땅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직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드러난 행동 이전에 마음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갈 때 그것이 내 마음 안에 둥지를 틀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율례)를 묵상하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율법 적"이라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첫째, 예수께서 이루어 놓으신 새 언약을 놓치면 율법 적이 됩니다. "이러 저렇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저주가 임한다." 마치 아직도 성도들을 '율법의 저주'아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이에 해당됩니다.둘째, 죄에 대한 지적 만 있고 이미 이루어 놓으신 죄 사함을 말하지 않을 때 율법 적이라고 말합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확연히 드러나지 않을 때 '율법 적'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한 인간을 하나님의 은혜 대신율법의 강제로 이끌어 가려는 시도가 모두 율법 적입니다.

어떤 이는 은혜를 말하다 보면 성도들이 방자해 질까봐 율법 적으로 설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율법이 가지고 있는 저주를 강조하여야 성도들이 조심스럽게 살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나 율법이 가지는 저주를 아무리 강조 하여도 사람은 그 죄 된 습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두려워 하기도 하고 후회 하면서도 그것을 청산하지 못합니다. 그만큼 죄의 역사가 강하고 교묘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임하시면 새로워 집니다. 성령께서 말씀과 더불어 역사 하시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가르치시면 그 때 비로소 죄의 습관을 고쳐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율법 적 설교는 사람을 주눅들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근심 걱정 속으로 들여 밀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죄악의 옷을 벗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알아야 비로소 사람은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끝으로 비근한 예를 들면

예를 들면 "십일조는 구약의 법임으로 신약에서는 지킬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눈에 뜨이게 대두 되고 있습니다. 유투브 같은 곳에서 노골적으로 현직 목사들이 나와 거품을 품고 십일조권유를 성토 하기도 합니다. 이것도 하나만 알 고 둘은 모르는 소리입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은 다 폐지, 완성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십일조는 왜 강조 하느냐고 항변합니다. 왜 구약의 법을 신약 시대에 가져와 강조 하느냐는 것입니다. 심한 사람은 교회가 성도들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이는 마땅히 지탄 받아야 한다고 열을 올립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이 박수를 칩니다. 아마 그 맛 때문에 그렇게 오늘날의 교회를 폄하하는가 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자신은 매우 의로운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무리한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물론 목회자 중에는 새 언약에 대하여 이해가 부족한 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 적 삶에 익숙한 나머지 강단에서도 이를 율법 적으로 해설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종의 일부 부작용을 전체에 대입할 수 없습니다.

동창회만 해도 모임을 하면 비용이 발생합니다. 교회가 귀한 뜻을 펼치려면 비용이 발생합니다. 교육도 해야 하고 선교도 해야 하고 교회를 활성화 하는 프로그램도 있어야 합니다. 또 이 모든 것을 안정적으로 펼치기 위하여 모임 장소(센터)가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에 비용이 발생합니다. 회원이 그 발생하는 비용의 일부를 담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 때 "나는 그 전체 비용 중 어느 정도를 부담해야 하는가?" 교회의 일원이면 누구나 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예에 따르면 십 분의 일은 그 소득이 있게 한 주인에게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런 고백의 일환으로 멜기세덱에게 드렸던 십일조의 예가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소득의 십 분의 일을 바쳐 레위 인 등의 삶에 쓰도록 하였습니다. 즉 누군가가 맡아야 하는 성역(聖役)을 위하여 제정하신 법으로서 이것은 다른 지역에서 왕에게 바치는 조세 보다 훨씬 더 저렴한 수준이었습니다. 심지어는 다른 왕국에서는 일에 따라 50%의 조세를 바치기도 하였습니다. 민간에서는 지주에게 소작이 50-70% 바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도급인 경우 생산량이 이에 미치지 못하면 이것은 갚은 수 없는 빚으로 거의 종신 종으로 살았습니다. 이와 같은 것은 우리에게 매우 선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소득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할 때 구약의 그 예를 생각하고 그것을 좋게 여겨 <율법과 관계 없이> 자발적 십일조를 하는 것입니다.그러한 헌신에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보상을 하십니다. 이것을 아는 자로서 당연히 이를 권장할 수 있는 것이며, 이에 충실한 것과 믿음은 비례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닙니다. 따라서 집사나 장로 선출 시 이를 고려하는 것은 지탄 받을 만한 일이 아닙니다. 보다 적극적 헌신을 하는 것을 믿음과 비례 되는 것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헌신도 하지 않는 사람을 교회의 지도자로 삼을 수 있습니까? 단지 십일조라 할 때 조(條)라는 말이 조세와 관련이 있어 의무적인 어감이 듭니다. 영어로도 십일조는 tithe라고 하는데 이것도 국가에 바치는 조세를 의미하던 말입니다. 이것 때문에 거부반응을 가질 수 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용어 사용의 문제입니다. '조'라는 말이 거슬리면 다른 용어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어느 교회도 십일조로 교인의 권리를 제한 하지 않습니다. 십일조 내지 않았다고 예배를 못드리게 합니까? 성찬식에 참여를 못하게 합니까? 제직 중 십일조 드리지 않는다고 제직 회 참석을 못하게 합니까? 발언 권을 제한 합니까? 그런 교회는 없습니다. 단지 지도자를 선출 할 때 그의 교회에 대한 기여도와 헌신 정도를 이것으로 참고할 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기록해 주신 율법은 돌 비에 기록한 조문이나 도그마로서가 아니라 마음에 기록된 것으로 그 법 정신을 깨닫게 하심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게 하십니다. 율법은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에서 해방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강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법이 내게 생명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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