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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나 소나 다 집사


개나 소나 다 집사?

딤전 1:12-14 제직 헌신예배 설교

디모데 전후서는 바울이 아들처럼 생각하는 디모데 목사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목회 전반에 걸친 모든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젊고 경험이 별로 없는 목사는 여러 가지 문제에 당면하여 질문하고 또 바울은 그것에 대하여 답을 하는 식입니다. 물론 묻지 않은 것까지도 광범하게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의 고귀함을 설명하고 있는 것인데 디모데에게 맡겨진 직분이 얼마나 존귀한 것인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설명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때로 말하는 자(가르치는 자) 자신의 이야기가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주의 부르심을 받기 전과 그 후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직분을 주신 것을 생각할 때 마다 감사와 기쁨이 "콸콸 흘러 넘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4). 사실 바울이 하나님께 사도로 부름을 받지 않았다면 얼마 후 유대 최고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기독교 말살에 앞장 섰던 사람으로써 이런 일은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한 위치에 있어야 하며 당연히 어떤 권세를 위임 받아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야 휘하의 사람들이 그의 명령에 따라 움직입니다. 이것은 곧 가말리엘 다음의 후계자 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무한한 명예가 주어지고 이에 여러 가지 혜택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주의 부르심을 받고 난 후에 겪은 고생은 말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입으로 고백한 것만 해도 충분히 그의 고난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40에 하나 감한 매를(태형) 세 번이나 맞았다고 합니다. 한 번 만 이런 것을 겪어도 그 다음에 소위 "골병"이 듭니다. 40가닥의 가죽 끈에 납 덩어리와 날카로운 갈고리 같은 것이 달려있는 채찍으로 40번을 치는 것입니다. 한 대만 맞아도 등에 살점이 뜯겨져 나가는 태형입니다. 그 태형을 바울이 당한 것입니다. 또 성경에 나타난 것만 해도 지중해를 건너면서 유라굴라(지중해의 독특한 폭풍)를 만나 파선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성경에 소개 되지 않은 사건도 있을 것입니다. 더욱 더 그가 당한 힘든 일은 터어키 반도 중간에 서북쪽에서 남동쪽으로 이어져 있는 높은 산맥을 넘어 전도 여행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의 불가능한 일을 한 것입니다. 또 길 가다가 강도도 만나는 등 그 고생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습니다. 남들이 보면 다 사서 고생한 것입니다. 이런 고생스러운 일들로 인하여 그도 육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말년에는 매우 약한 몸으로 병든 채 살았습니다.

직분 맡아 고생한 것 생각하면 '저 둥근 달을 볼 때마다' 눈물도 날 것도 같은데 오히려 그는 감사와 은혜가 "넘치도록 풍성하다(1:14)"고 말합니다. 이것이 디모데 목사에게 어떤 깨우침을 주기 위하여 일부러 살짝 꾸며서 하는 말이겠습니까? 성령 충만한 자들은 선한 거짓말도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 감사가 충만하였습니다. 비록 고생스럽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직분을 (이 말은 '집사'와 같은 말) 주신 것이 이렇게 기쁨이 넘치고 감사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수종을 드는 자는 다 집사(執事, 일을 잡았다, 즉 일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 중에 목사도 있고 장로도, 집사도, 권사도 다 들어 있는 말입니다. 이렇게 직분으로 인하여 감사하고 기뻐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잘 알고 직분의 고귀함을 잘 아는 자의 말입니다. 디모데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중 하나가 그에게 주어진 직분이 이렇게 고귀하고 복된 것이라는 것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목사 뿐 아니라 모든 일 맡은 자가 알아야 하는 내용입니다.

개나 소나 다 집사?

반대로 여기서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의 말을 한 번 들어보십시오. 오래 전 교회에 어떤 여 성도가 등록을 하여 심방한 적이 있습니다. 심방 시 예배를 드리고 나서 바로 조그마한 상에 차와 과자를 내 왔습니다. 그 분과 대화 내용은 다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길게 이어진 대화 내용은 심방하는 자에게 최소한의 예의도 없어 보였습니다. 자기는 말을 돌려서 하는 것을 싫어해서 모든 것을 직설적으로 말한다고 하는데 제가 볼 때는 직설적이라기보다는 무례 하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대충 화제를 바꾸어 이렇게 물었습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에서 보다 쉽게 정착 시키려면 그에 대하여 좀 더 알아야 할 것이 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전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 "네, 찬양대도 하고 교사도 좀 했었어요." "집사님이셨지요?" "네, 집사였어요" "아 –네, 귀한 직분을 맡아 하셨군요" 그랬더니 바로 또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였습니다. "귀하긴요, 그 전 교회에서는 개나 소나 다 집사예요."

바울이 말하는 직분과 이 분의 직분에 대한 생각을 비교해 보세요. 하나님의 세계를 아는 자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자의 말이 이렇게 다릅니다. 역시 오래 전이지만 어떤 비교적 젊은 남자 성도에게 "열심히 해서 장로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저의 덕담이자 축복이었습니다. 그런대 답이 이렇게 돌아왔습니다. "저는 장로 같은 것 관심 없습니다." 그 말 로 인하여 그 분은 저에게 크게 꾸중을 들었습니다. 바울의 직분에 대한 이해와 이 사람이 이렇게 다릅니다.

이렇게 말을 하는 사람들의 속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희소가치'에 대한 말 일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희소한 것에 가치를 둡니다. 흔하지 않은 것은 귀한 것이고 흔한 것은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집사나 장로는 많다는 거지요. 사실 교회 출석하고 세례 받고, 어느 정도 더 출석하면서 이것 저것 봉사 하다 보면 (서리) 집사 직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중형 교회의 경우 집사는 많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개나 소나 … 라고 말하는 이상 그 분은 집사의 자격이 아직은 갖추어 지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구원 받은 성도가 많다고 해서 '개나 소나 성도'라고 해서 되겠습니까? 희소가치는 없다 하더라도 그 한 생명 한 생명이 얼마나 귀한 존재입니까? 자녀가 많으면 많을 수록 그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은 덜 귀한가요? 세상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별 것 아니게 취급해서 되겠습니까? 교회 안에 집사가 많고 또 엄격한 자격 심사 없이 된다고 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직 영안이 매우 어두운 것입니다. 그 수에 대하여서 만 알지 그 직분의 고귀함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직분이 그렇게 귀한 것인가?

바울이 이 직분을 맡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이렇게 감동하고 기뻐하는 이유를 13절에 말합니다. 그의 간증입니다. 자신은 사실 하나님의 혹독한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자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을 충성 되이 여겨주셔서 직분을 맡기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과거의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여기 나오는 세 가지 단어는 바울이 쓸 수 있는 말 중에 가장 저질적이고 악질적인 죄에 해당합니다. 자기는 비방 자였으며 핍박 자, 또 폭행 자(이전 번역에는 포행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주님을 만나기 전 확신범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을 핍박하는 것이 나름대로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며 그것이 가장 공의로운 행동이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후 성령께서 밝게 조명해 주신 후 살펴보니 그것은 용서 받을 수 없는 가증스러운 범죄였을 뿐이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심판 대신 하나님의 한량 없는 은혜로 자신에게 고귀한 직분을 주셨다는 사실 앞에 감사가 넘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비방이란 사람을 중상 모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이것의 대상이 하나님인 경우 신성모독 ( blasphemy )으로 번역되는 말입니다. 지금도 이 말은 영어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자신은 누구보다도 공의를 행한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사실은 '죄도 없는 자를 중상모략'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핍박이란 정당한 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추종하지 않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리 누르고 온갖 불이익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악질적인 죄악으로 만약 회개하지 않으면 반드시 하나님의 보응이 따릅니다. 요즘 소위 도가 넘는 갑 질이라는 것도 일종의 핍박입니다. 그 사람의 피가 땅에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창4:10).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또 폭행 자는 이 세가지 유형의 죄악 중 가장 나쁜 것입니다. 당시 이 말은 남에게 고통을 주면서 쾌감을 얻는 변태적 가해(加害)자를 말합니다. 이것이 설교가 아니라면 이 보다 더 추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당시 가장 나쁜 유형의 범죄 세가지를 말하면서 그것이 바로 자신이 행하던 것이라고 스스로 폭로하고 있습니다. 혹시 자신을 너무 나쁘게 과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종종 어떤 사람의 간증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비하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데 이것도 그런 차원의 말이 아닌가 의심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하는 또 한가지는, 다시 강조하지만, 성령 충만한 자들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더 좋게 포장하기 위하여 나쁜 것을 더 나쁘게 말하지 않습니다. 살짝 과장 하지도 않습니다. 정직하지 못한 것은 성령의 영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이런 범죄는 충동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유형의 것이 아닙니다. 매우 계획적이라야 하며 또 어느 정도 지능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범죄가 아닙니다. 권세도 있어야 하고 또 그 권세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좋은 것"들을 이렇게 사용하는 것으로써 "매우 악한" 것입니다. 남에게 없는 어떤 탁월한 "좋은 것"을 이렇게 쓰는 것은 "더욱 악한 것"입니다. 악을 "도모"하는 것으로 매우 심각한 것입니다.이런 것들은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인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그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 감사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는 원리(롬5:20)"를 알게 되었습니다.

넘치도록 풍성한 은혜

특히 이 구절을 주목해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맡기셨는데 (1:12) 그 사실을 생각하면 "은혜와 감사가 넘치도록 풍성하다"고 말합니다(14). 풍성하다는 것은 그 말 자체가 원래 무엇이 넘치는 것을 말합니다. 정량 그 이상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5개를 주어야 하는데 6,7개, 그 이상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 <넘치도록>이 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헬라어 <휘페르>가 접두 된 것인데 <휘페르> 가 있으면 뒤에 있는 말을 훨씬 더 강화 시킵니다. 롬 8:37에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다>"할 때, 이 말도 <이긴다>는 말 앞에 <휘페르>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이기는 것이 아니라 '넉넉한 승리' 혹은 '가장 영광스러운' 승리를 말합니다. 풍성도 그 자체가 넘치는 것인데 그 앞에 이 말이 있음으로 <더욱 더 넘치는 풍성>이 됩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옥에 갇혔을 때 '찬송'하였습니다. 그 때 지진이 일어났다고 합니다(행 16:25). 16:22,23에는 옥에 들어가기 전 "매로 치라 하여 많이 맞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옥에서는 착고에 채워졌다고 합니다. 이 착고는 그저 걷지 못하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온 몸을 비틀어 묶어 놓는 것입니다. 최대한 괴로운 자세로 있게 하는 고통스러운 형벌입니다. 이렇게 옥에 던지우기 전 그 악랄하고 살인적인 태형을 당한 것입니다. 그 형을 당하면 온 몸이 찢어지는 고통과 함께 고열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그 몸으로 그 습기차고 열악한 지하 감옥에 던져졌습니다. 그런데 한숨 짓고 억울 하고 서러워서 우는 것이 아니라 찬송 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이 대목에서 보다 감동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신음 소리를 찬송으로 둔갑시키는 과장을 하였을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바로 바울 같은 사람들은 이런 직분을 얻어 이렇게 고생하는 것이 서럽고 괴로운 것이 아니라 <넘치도록 풍성한 은혜>로 직분을 맡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당하는 고통으로 이것을 일종의 하나님께서 자신을 충성된 종으로 인정 해 주시는 증거로 이해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감사와 찬송은 누가 누른다고 눌러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입을 막으면 돌들이 소리칠 것입니다. 막는다고 막아지는 것도 아니고 없앤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마구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주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것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찬송이 터져 나오게 하는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것도 현실입니다. 고통이 없어져서 찬송한 것이 아니라 그 고통 중에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좀 더 위로가 되고 고통이 줄어들기 때문이 아니라 <이 같은 죄인을 은혜로 용서하시고 게다가 직분까지 맡기셔서 그 거룩한 일에 동참케 하신 기쁨과 감격>이 더 큰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직분은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많다 하더라도 아무에게나 던져 주는 것이 아닙니다. 개나 소나 다 받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왜 그리 기쁜 일인가?

첫째, 직분을 받기 전 거치는 필수 과정은 죄로부터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죄 사함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것 만으로도 평생 감사가 충만해야 합니다. 비방 하던 죄, 핍박 하던 죄, 남이 고통 당하는 것을 즐기던 죄가 보통 죄입니까? 배고파서 빵 하나 훔친 것과는 다른 죄입니다. 이 죄는 악 하고도 교묘한 계획에 따르는 것입니다. 충동적으로 짓는 죄와는 성질이 다릅니다.하나님께서 법대로 이것을 다루시면 정말 큰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편에서는 이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는데 은혜와 긍휼 가운데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이 파렴치한 죄인을 위하여 '그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주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용서 된 것입니다. 이 용서는 당분간 문제 삼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고, 일단 넘어가기는 하나 두고 보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죄과를 멀리 옮기시는 것입니다(시 103:12). 이 후에 하나님께서 비록 (그럴 리는 없지만) 아무 것도 해 주시지 않아도 감사에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이 구원 안에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와 긍휼을 아는 사람입니다.

둘째, 더 나아가서 바울이 이렇게 <넘치도록 풍성한 은혜>를 말하는 것은 그 구원 받은 자 가운데서 특별히 이런 직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는 이 직분이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영광된 것이었습니다. 그 직분은 가장 귀한 하나님의 양들을 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양)를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셨습니다. "피 값"이라는 것은 더 이상의 표현이 없는 최종적 표현입니다. 노력은 땀으로 대언 됩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땀을 흘리셨어도 그것 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땀보다 더 한 것은 피입니다. 그 이상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별로 가치도 없는 것에 독생자의 피 값을 지불 하시겠습니까? 피 값이 푼돈입니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별 것 아니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 주변의 사람도 나를 별 것 아니리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천지만물의 주인이시며 생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존재가 바로 그 피 값으로 사신 주의 양 들입니다. 그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그렇게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가장 값진 것이 하나님 자녀 들입니다. 그 귀한 양을 위하여 특별한 직분을 주셨다는 것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양은 가장 존귀한 존재

하나님께서 그 귀한 양(자녀)들을 아무에게나 맡기시겠습니까? 교회는 바로 이 사람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여 영생을 얻게 하는 곳입니다.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을 직분자라고 합니다. "나는 직분을 맡기는 하였으나 직접 누구를 전도한 일도 없고 또 그런 일을 맡은 적이 없는데요." 다시 말해서 바울이 행한 일들과 같은 것을 해 본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직분은 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전쟁을 하는 군대도 작전을 하는 분야가 있고 또 이것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하여 행정을 하는 분야가 있습니다. 군복도 만들고 식량도 보급해야 하고 총도 만들어야 합니다. 이들은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지만 다 그 일을 위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승리를 했다면 전투하는 사람 만이 승리의 기쁨을 독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을 향해 총 한 번 쏜 일이 없어도 승리에 동참합니다. 최 전방에 서 전투를 하는 용사들을 위해 영양가 있는 식사를 제공한 것이 시시한 일입니까? 부상당한 자들을 치료하는 일이 시시한 것입니까? 이것이 직분입니다. 베드로에게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 것은 죄인에게 주시는 최고의 복인 것입니다. 바울 같은 성령의 사람들은 이 직분을 이렇게 이해 하였습니다. 개나 소나 다 받는 것이 직분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입에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이 직분을 맡은 것에 이렇게 감격하고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세계를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직분을 맡으셨습니까? 상대적으로 그다지 중요한 직분이 아닌 것 같습니까? 그것은 여러분 스스로 평가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사람이 편의에 따라 나누어 준 것이면 마음대로 생각해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그것은 무엇이든 신성한 것이고 거룩한 것이며 존귀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존귀하게 여길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를 잘 아실 것입니다. 열 달란트나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들은 "잘 하였도다 충성된 종"이러 하나님의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악한 종"이라 평가됩니다. 그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하였겠으나 하나님의 평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그것을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희소 가치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것이 적용되는 것이 있고 적용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직분을 개나 소나 다 받는 것으로 알던 그는 스스로 속은 것입니다. 모든 직분은 그것이 상대적으로 비중이 있는 것이든 아니면 그 반대이든 간에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물론 사람을 통해 부여되는 것이긴 하지만 그 출처가 하나님입니다. 이것을 잘 분간 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직분은 세상에서 말하는 것 같은 계급이 아닙니다. 제주도의 돌 담을 보셨을 것입니다. 크고 작은 돌이 조화를 이루어 담이 쌓이고 웬만한 바람은 다 막아 냅니다. 큰 돌만 귀한 것이 아니고 그 속에 있는 작은 돌도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어떤 것이 더 소중하고 덜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무엇이 맡겨졌든지 그것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생각하지 말고 주어진 직분에 충성"하시기 바랍니다(롬12:3). 승리의 날에 그 영광은 같이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자나 똑똑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충성된 자를 찾으십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고전 4:2). 하나님은 귀한 일을 맡기시기 전 작은 일을 통해 그 맡은자의 충성도를 시험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끝으로 제가 신학교 입학 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학교 예배 시간에 어떤 분이 설교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제목이 '맛디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은 맛디아 같은 사도가 되지 말고 베드로 같은 사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베드로 등의 사도들은 성경에 이름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맛디아는 사도로 편입 되었다는 구절 단 하나 밖에 없다. 이렇게 시시한 사도가 되지 말고 유명한 사도가 되라!" 이 설교를 듣고 아멘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다 결국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이것이 합당한 설교일까요? 맛디아는 정말 하는 일도 없는 이름 만 올린 시시한 사도일까요? 성경에 그가 한 일이 기록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사도들은 모두 다 순교하였습니다. 이런 발상 자체가 틀린 것입니다. 이름이 나고, 눈에 뜨이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사람들을 이리저리 몰고 다녀야 훌륭한 일을 한 직분 자일까요? 사사기의 삼갈 사사는 그의 일을 한 절로 설명합니다(삿 3:31). 다른 사사보다 시시한 사사입니까? 삼손은 비교적 긴 기사가 있습니다. 삼갈은 삼손 보다 못한 사사일까요? 삼손은 삼갈 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라 길게 설명됩니까? 양화진에 묻힌 선교사들은 다 훌륭한 선교사이고, 반면에 이름도 없이, 무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순교자 선교사들은 시시한 자들입니까? 설교하는 자는 훌륭하고 그것을 위하여 자리를 정돈 하는 집사는 시시합니까? 모든 직분은 "모두" 귀합니다. 특별해야 귀한 것이 아닙니다. 주의 일을 맡으셨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귀히 여기고 충성하십시오. 사람이 태여나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귀한 것이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모든 직분은 그것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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