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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부활하셨다(3)


눅24:13-35 엠마오 가는 길에서

한 유명한 신약 학자는 이 본문은 문자적으로나 영적으로 보석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본 사람이라면 이 말에 동의(同意)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씀 역시 예수님의 빈 무덤과 부활을 증거 하기 위한 것입니다. 엠마오라는 곳은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입니다. 약 10-12 Km 정도입니다. 점심 때 예루살렘에서 출발하면 저녁 식사 전에 도착하는 거리입니다. 글로바와 또 다른 한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그곳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 열 한 제자 중에 속한 자들은 아니지만 예수님을 아주 가까이서 따르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24:11 a). 그들이 왜 그곳으로 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배우던 자 들로서 십자가에서 주께서 죽으신 후 실망하여 더 이상 예루살렘에 있을 이유가 없어 아마도 고향으로 가는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보라! 그들 중 둘이 그 날에 엠마오로 …. (13)." '그리고'는 새로운 단락이 시작되기는 하나 바로 전에 기사(記事) 즉, 사람들이 빈 무덤을 보고 온 것과 연결 짓는 말입니다. 그리고 "보라"는 이 글을 읽는 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누가는 빈 무덤 기사 만으로는 부활의 사실을 다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두 제자가 부활 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을 첨가해야 만 했습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가 이들에게 목격 되었다는 것을 통해 부활 사실을 더욱 더 견고하게 하려는 부록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인지 설명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27). '보라'는 말로 더욱 이 사실이 독자들에게 인상 깊게 읽혀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들의 토론 내용

이들이 길을 가면서 서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15절에는 "이야기(talking)하며 문의(discuss) 할 때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문의(헬, suzeteo)"라는 말은 우리가 사용하는 질문과는 내용이 좀 다른 것입니다. 조사하다, 논쟁하다, 찾는다 등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서로 간에 뭔가 의견이 잘 안 맞고 해석 방식이 다른 것을 계속 주고 받은 것을 암시합니다. 이러던 중 주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이제는 세 사람의 대화로 바뀝니다. 이때 주님이 그들에게 질문하십니다.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은 이야기가 무엇이냐(17)?" '주고 받은 이야기(헬, antiballo)'는 "순서를 바꾸어가면서 던지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대화의 주제는 있으나 무엇인가 합의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심심해서 뭐라도 말하는 것도 아니고 계속 의문만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가 무엇이라 말해도 답을 할 방법이 없는 말들이 계속 던져지고 있었다는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답도 없는 질문을 반복하다

그들의 대화의 주제는 빈 무덤에 관한 것입니다. 동료 중 아침 일찍 무덤에 갔던 여자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고 또 베드로와 요한이 이를 확인하고 와서 증거 하였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토론하여 빈 무덤이 부활의 증거라는 결론을 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계속 해서 끝도 없이 의문만 제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예루살렘을 출발 하기 전부터 계속 주고 받은 것을 계속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날 성도 들도 이와 유사합니다. 부활을 믿는 대신 그것을 주제로 끊임 없는 대화를 나눕니다. 어떻게 보면 공허한 말의 잔치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부활에 관심을 갖고 고민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이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라 생각하고 그런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자신은 하나님께 혹은 기독교에 우호적이라고 스스로 평가합니다.

빌라도의 예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십자가 형을 언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부인이 꿈을 꾼 후 예수라는 사람을 건드리지 말라고 한 것도 있지만(마27:19) 사실 상 로마 법으로 볼 때 그것은 처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유대 내의 종교적 문제이니 분봉 왕 헤롯에게 보냅니다(눅 23:7). 빌라도와 예수 중 선택하라 하면 빌라도를 택할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그 묘책도 빗나갔습니다. 그는 이 일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어떨 수 없이 그가 내린 결론은 십자가 형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책임이 없다고 하면서 손을 씻었지만 그런다고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충분히 고민하고 대화를 시도하였다는 것으로 스스로 죄책감을 없애거나 경감시켰지만 그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두 제자는 빈 무덤 이야기를 듣고 고민도 많이 하고 대화도 많이 하였겠지만 그런다고 어떤 결론에 도달하여 믿음이 주는 평안에 이른 것이 아니라 여전히 슬펐습니다(17). 중요한 것은 빈 무덤에 대한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주는 진리를 믿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바로 옆에 계시는데

이들이 대화 하며 길을 가던 중 저만치서 예수님께서 한 동안 따라오셨습니다. 이윽고 주님은 그들과 나란히 동행하셨습니다. 주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지금 서로 주고 받은 말이 무슨 내용입니까?" 그들은 여인들이 빈 무덤을 본 것과 천사들이 전하는 부활 소식에 대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들의 말을 좀 자세히 들어보겠습니다. 이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은 예수를 모르지는 않는데 충분히 알지를 못합니다. 그들의 지식은 매우 부분적입니다. 어설프다는 것입니다. 12제자는 아니라도 매우 가까운 곳에서 예수님을 지켜 보며 가르침을 받았는데도 그런 수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입니다(19)."라고 진술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 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그 이상입니다. 물론 예수께서 자신을 선지자라고 하신 적도 있습니다 (마13:57).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사역 중 선지자 적인 면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그들은 대 제사장들이 그 분을 잘 이해하지 못하여 사형 판결에 넘겨 준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당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현대 신학자중에는 예수님을 이렇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 하려다가 종교 기득권 세력에 의하여 실패한 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연기 되었고 그 온전한 나라가 올 때까지 <교회> 시대가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두 제자의 말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매우 허술합니다.

좀 더 나아가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는 그가 이스라엘을 속량(贖良, redeem)할 자로 바랐노라(we were hoping)." 바란다(헬, elphizo) 는 말 역시 매우 아쉬운 말입니다. 이 말이 때로 '믿는다'로 번역 될 때도 있지만(KJ) 대부분은 여기서처럼 '바란다'로 번역되는 말입니다. 믿는다는 말은 다른 표현이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 말합니다. "그러나, 이 일이 일어난 지 사흘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흘이란 문맥에 따라 매우 짧은 시간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요즘처럼 비행기나 기차가 있던 시절이 아닙니다. 자동차로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이틀씩 걸어가야 했습니다. 이런 경우 삼 일은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에는 매우 짧은 기간입니다. 또 반대로 어떤 문맥에서는 '이미 사흘이나 지났다'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이 두 제자의 말은 이 중대한 소식을 들었으나 '이미 삼 일이 지났는데 별다른 진보나 변화가 없다'는 뜻입니다. 다 끝났다는 뜻이며 더 이상 어떤 기대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이들은 예수님이 메시야, 즉 하나님의 어린양이심을 확실하게 "믿고"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역할을 해주기를 바랐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묘하고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얼핏 보면 별 차이 없어 보이지만 누가는 의도적으로 지금 이런 어휘를 골라 쓰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자세히 보지 않고 지나간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고 나서 "너희가 나를 믿느냐(헬, phisteo)?"라고 물으신 적이 많습니다. 저는 지금 "바란다"와 "믿는다"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두 명의 맹인을 고치시려는 그 때에 주위를 둘러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능히 할 것으로 믿느냐(마9:28)?" 또, 나자로를 무덤에서 일으키실 때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6)?"

그저 행 하시거나 설명하시면 될 것을 왜 마지막에 "믿느냐 (헬, phisteo)"고 묻습니까? 형태는 의문문 이지만 묻는 것아라기 보다는 무엇인가 그들의 생각을 확실하게 정리하시는 것 같습니다. 바라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요14-17까지 성령에 관한 말씀을 길게 하셨습니다. 특히 예수께서 죽으신 후 승천하실 것이며 그 후에 다른 보혜사 성령께서 오실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셨습니다. 이 때도 마무리를 이렇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네가 믿느냐?"

이 두 제자 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이들과 같은 생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지식은 뭔가 불완전 해 보입니다. 이 말에는 "그렇게 기대 하였는데 결과적으로 그렇지 않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다시 좀 더 과장을 해본다면 "그렇게 바랐으나 이제는 다 소용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누가는 그것을 포착하였습니다.

18절에는 그 두 제자가 주님을 힐난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당신도 예루살렘에 있다가 오는 것 같은데 (유월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감)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한다는 말이요?" 이 말은 살짝 우습게 들립니다. 그들은 거기 머물면서 매우 자세히 이 일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들이 아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보고 들은 것은 많은 것 같은데 그러나 무엇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정작 부활하신 주님이 바로 옆에 계시는데 그 분께 "도대체 당신은 무엇을 보고 들었는가?" 힐난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많이 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전문가인 것처럼 행세합니다. 그러나 보고 들었다는 것, 즉 경험 하였다는 것도 사실은 진정한 지식과는 거리가 멀 때가 있습니다.

주님의 해석

주님은 이들에게 구원 사역에 대한 설명을 하십니다. 누가가 방점을 두고 있는 것은 이 말입니다. "모세와 <모든> 선지자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신에 관한 관한 기록을 자세히 설명 하시니라 (27)." <모든(헬, phas)>가이 두 번 반복됩니다. 그리고 '설명 (헬, dihermeneuo)' 하셨다고 합니다. 이 두 용어는 매우 중요합니다.

'모든'이라는 말이 강조된 것은 그들의 성경 지식이 부분적 이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알고 싶은 것만 알고 있었을 수도 있고 선택적으로 들리는 것만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 전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입니다. '모든'이란 성경의 모든 부분에서 작은 글자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았어야 했다는 말이라기보다 성경 '전체가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은 모세 오경으로부터 역사서, 선지서, 시편 등으로 구분하는데 이 모든 성경은 일제히 <메시야>에 대한 것을 증거 합니다. 다양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나 그것은 모두 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과 그 결과인 부활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의 증거는 도덕과 윤리를 포함하고 있고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는데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사역을 이루실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잘 이해하면 그 결과는 반드시 부활로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이 전 설교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부활은 또 다른 사건 이거나 혹은 성경의 부록이 아니라 구원 사역의 결과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 죄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인가, 그러기 위해서 그 여인의 후손이 어떻게 그 막강한 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인가를 예언 한 것이 구약이고 그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 진 것입니다. 죄를 이기셨다 함은 <반드시> 죄의 삯인 죽음을 이기는 것으로 결론이 나야 합니다. <모든> 성경을 안다고 말하려면 반드시 <부활>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으로 결론이 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성경을 알았다면 '빈 무덤'에 대한 소식을 듣고 이처럼 '슬픈 빛'을 띠고 우울한 걸음으로 엠마오로 갈 것이 아니라(17) 할렐루야를 소리 높이 외쳤어야 합니다. 즉 성경을 안다는 것은 성경이 주는 여러 종교적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 이라기보다 구원과 부활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성경을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여기서 설명이란 말은 "해석"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자기 나라 말(자신의 언어)로 번역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날도 해석학을 영어로 Hermeneutics 라고 하는데 바로 이 헬라어에서 온 것입니다. 이것은 "허메(Herme)'라는 제우스의 아들 이름에서 유래 된 것입니다. 그는 주로 제우스 같은 신들의 말을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 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말). 사람들이 바울이 기적을 행하였을 때 그를 제우스라 하고 바나바를 '헤르메스'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행14:12). 이 때 '헤르메스'가 여기서 말한 '허메'입니다. 좀 더 풀어서 말한다면 해석(설명하시다)이란 천상적인 언어를 지상적인 언어로 바꾼다는 것입니다. 때로 모국어로 번역된 성경의 말씀은 그 언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렇다 하더라도 외계어와 같을 수 있습니다. 읽기는 하나 의미를 잘 알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주께서 그들이 알 수 있도록 해석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두어 시간 정도였을 것입니다. <모든 성경을 이해하기에는 턱 없이 짧은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설명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32). 감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초신경에 자극을 받는 얄팍한 감정의 변화가 아니라 그들의 영혼 속에서 진리가 파악될 때 나타나는 깊고도 영적인 뜨거움이었습니다. 전 인격을 움직이는 진리의 힘입니다. 그들은 왜 이런 것을 여태까지 몰랐을까요?

16절과 31 절은 명쾌한 대조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누가는 이렇게 평가합니다. 16절은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이고 31절은 '그들의 눈이 밝아져'라고 기록합니다. '눈이 가리워졌다는 것은 헬라어를 직역하면, '그 전의 눈이 육신의 눈 그대로 지켜졌다'입니다(their eyes were prevented혹은 holden ), '눈이 열렸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눈이 열렸다(their eyes were opened)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그 이전에는 눈을 감은 채 성경을 보았고 이제는 눈을 뜨고 성경을 보는 것입니다. 시력을 이용하여 보는 것과 영혼으로 보는 것의 차이입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이것이 필요합니다. 눈이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환상이나 환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을 읽어내야 합니다. 주께서 그들에게 이것을 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주님 만 하시는 일입니다. 오늘날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아- 그렇구나!"하고 가던 길을 계속 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알고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가 보니 열 한 제자가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보이셨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제 그들도 그 회중에 듭니다. 그들도 자신의 말로 그것을 증거 하기 시작합니다.

누군가 부활의 메세이지를 들었다고 해서 다 그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빈 무덤을 보았다고 해서 다 그것을 믿는 것도 아닙니다. 닫힌 눈으로 수 없이 듣고 봐도 글로바와 또 한 사람의 제자처럼 슬픈 빛을 띠고 갈 수 밖에 없으며 그저 수 없이 많은 질문을 던지고 끝없이 토론 할 뿐입니다. 그리고 다시 제자리로 옵니다. 애석 하게도 이것을 믿음 생활인줄 아는 자들이 있습니다. 눈이 열려야 합니다. <모든 성경>의 원리가 눈을 열어 줍니다. 그리고 주님처럼 성령의 역사가 충만한 해석을 들어야 합니다. 부활이라는 사건을 열심히 들여다 본다고 해서 부활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가 부활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할 때 이 엄청나고 위대한 사실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을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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