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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부활하셨다(2)


예수 부활하셨다 (2)

고전 15:20-22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믿기 어렵다고 해서 어떤 사실을 부인 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그것에 대하여 무관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한 인간이 죽음으로부터 부활 하였다는 사실은 그저 '그런 일이 있었나 보다'하고 넘어갈 수도 없는 일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정말로 부활 했다고 하면 그는 나하고 별로 상관이 없는 사람일 수는 있으나 그 "사건"은 결코 나와 무관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것은 전 인류와 관련 된 사활적인 사건입니다.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는 인간 중 한 사람이 부활 하였다는 것은 전 인류에게 부활의 길이 열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고전 15:20 에는 부활하신 예수를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부활이 '잠자는 자 (깨어날 것을 전제로 하는 말로 죽은 자, 혹은 죽을 것이 확실한 자들)'들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첫 열매란 추수할 때 먼저 거둔 것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고 같은 종류의 씨 중 먼저 열매를 맺은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첫 번 째 씨가 열매를 맺었다면 그 다음 씨도 열매를 맺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부활은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자의 부활을 보증하는 증표라는 뜻이 됩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 죽음과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 부활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어떻게 모든 인류의 부활로 이어지는 것인지 알아보겠습니다. 계속해서 고전 15: 21, 22의 논증을 검토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구원을 설명하던 한 방법과 매우 유사한 논증입니다. 이를 위해 잠시 로마서로 가보겠습니다. 5:12-21에는 "한 사람 예수님의 의로우심이 어떻게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있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학자들 중에는 바울이 전개하는 이런 식의 논리가 전혀 '논리적이지 못하다'고 평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모든 논리 중 최고의 논리입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롬5:12)"고 말합니다. 여기서 죄(sin)란 죄행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행이란 거짓 말, 폭행, 도둑질 등등 복수(複數)형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인데 여기서 죄란 이런 죄행들을 생산하는 보다 근본적인 것으로서 "사단의 역사"와 같은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창2장에는 모든 피조물이 완벽하게 지어졌다고 말씀합니다. 하나 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즉, 창조주 하나님의 뜻하신 대로 완벽하게 지어졌다는 이 말씀이 후렴처럼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3장에서 이 아름다운 세상에 '죄가 들어"옵니다. 여자에게 뱀이 접근합니다 (3:1). 엄청난 내용을 보다 선명하게 이해 시키기 위하여 '이야기' 체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사단이라 는 추상적 개념 보다 이를 은유화(metaphor) 시킨 뱀이 등장합니다. 여자는 뱀에게 속고, 그것을 남편인 아담에게 그대로 가져가 결국 아담이 그 간교한 제의를 받아들임으로 "그 죄"가 세상에 들어옵니다. 그렇게 들어온 죄가 모든 아름다운 피조물을 오염 시켰습니다. 이것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죄가 들어왔다"고 표현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렇게 들어온 죄가 모든 사람을 죽게 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죽음이란 항상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다 포함합니다. 영적 죽음이란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분리 되는 것"입 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분리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의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뜻입 니다. 마치 나무에서 가지가 꺾인 것과 같습니다. 꺾인 가지도 당분간은 살아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미' 죽은 것입니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물기 하나 없이 다 말라 죽어버립니다. 인간의 생명도 이렇게 하나님과 분리된 채로 육신 만으로 살다가 결국 그 육신도 죽게 됩니다. 성경은 영적 죽음뿐만 아니라 육신의 죽음도 "한 사람을 통해 들어온 죄가 가져온 것"이라고 가르쳐줍니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그 다음에 있는 진술 때문입니다. "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롬5:15)"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그대로입니다.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7절에도 이렇게 계속됩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죽음이 <한 사람> 아담을 통하여 들어온 것이라면 <한 사람> 예수를 통하여 생명이 들어올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대목을 좀 더 살펴보기 바랍니다. 아담을 통해 들어 온 죄가 너무도 확실하게 사람을 죽게 하지만 그러나 이 보다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을 통해 인류가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은 <더욱(much more)> 더 확실한 것이라고 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부활을 다룬 고전 15장으로 돌아가봅니다. 바울은 여기서도 지금 말씀 드린 방식으로 예수님의 부활과 그 안에 있는 성도들의 부활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21절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45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담은 산 영(a living soul)이 되었다 함과 같이 아담은 살려주는 영(a quickening spirit)이 되었다 함과 같다." 아담은 그냥 살아 있는 인격체 혹은 영혼이지만 예수님은 "살리는 영"이시라는 뜻입니다. 아담에게는 '프슈케(영)' 예수님께는 '프뉴마(영)' 이라는 어휘가 쓰입니다. '프슈케'는 정신, 혼, 영 등으로 번역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쓰인 '프뉴마' 와는 다른 뜻입니다. 프뉴마는 주로 성령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프슈케는 인간의 영혼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어떻게 그와 함께하는 성도들의 부활을 가능하게 하는지 설명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철학적 사유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으로는 이 비밀을 풀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죄가 한 사람을 통해 들어와 모든 사람을 죄인 되게 하여 죽음을 피할 수 없게 한 것처럼 하나님의 의도 오직 한 사람 의인이신 예수를 통하여 통하여 들어와 주의 백성들을 의롭게 하며 그들을 죽음에서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의 부활과 인간의 부활

예수님은 인간 같은 하나님도 아니고 하나님 같은 인간도 아닙니다. 하나님이시면서 인간 입니다. 성육신(成肉身) 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성자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낳으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사람이 낳은 존재는 사람이고 개가 낳으면 개이듯 하나님께서 낳으신 그 분께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은 마리아의 몸에서 태여 나신 인간입니다. 죄가 없다는 것이 세상의 인간과 다른 점일 뿐 그 분은 우리와 똑같이 인간의 피와 살과 감정을 가지신 분입니다. 이런 분은 인류 역사 상 단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외아들 혹은 독생자라고 합니다.

주님은 일을 많이 하시면 피곤해 하셨습니다. 숨을 쉬셔야 살 수 있고 잠을 주무셔야 했습니다. 슬픈 일을 보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기쁜 자리에서는 기뻐하셨습니다. 채찍으로 치면 다른 사람처럼 고통을 느낍니다. 아무래도 하나님이시니 고통을 좀 덜 느끼시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 군인이 십자가 위의 예수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을 때 물과 피가 나왔다고 했습니다. 우리와 똑 같은 몸을 가지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께서 무덤에서 살아나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으면 끝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 상 누구도 보여준 일이 없는 놀라운 부활이 주님에 의하여 증거 되었습니다. 주님이 첫 열매라는 것은 이제 그 뒤를 따라 부활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시기

그러면 언제 이런 일이 있을까요? 살전 4:13-18에도 이 부활의 때를 언급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특히 1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 하시리니 (그 때)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공중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 이 구절은 해석이 매우 다양합니다. 소위 휴거 주의 자들이 단골로 인용하는 구절 이기도 합니다. '호령, 나팔 등'은 당시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개선 행진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의 재림을 알리는 위엄 있는 사인(sign)입니다. 초림(初臨)과 반대되는 장면입니다. 예수께서 처음 세상에 오실 때는 매우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특정인이나 알 뿐 사람들은 그 분의 태어나심을 알지 못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는 숨 막히는 장엄한 영광 중에 누구나 다 그것이 주님의 재림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이 때 이미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고 뒤이어 살아서 재림을 맞는 자들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시간적 간격"이 있을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 순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공중으로 끌어올려진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휴거(携擧, 이끌어 들어올리다. rapture) 로 이해 하는 분들이 많은데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공중"이란 헬라어로 '에르(aer)'라고 하는데 이 말은 엡2:2에서 "악한 영이 공중의 권세를 잡고 있다"고 할 때도 쓰인 말입니다. 공중의 권세란 이 세상 어떤 특

정 지역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역 아래에서 사단에게 허용된 영역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는 세상 보다 훨씬 더 넓은 영역입니다. 그러나 사단이 아무리 막강한 힘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한도 내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한편, '구름 속으로 끌어 올린다' 할 때 구름은 실제 보이는 구름일 수도 있으나 거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위용과 영광을 나타낼 때 쓰는 말이기도 합니다. 주께서 재림하실 때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것은(마24:30) 마치 손오공처럼 근두운 같은 것을 타신 다는 것일 수 없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주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는 매우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재림의 모습은 모든 세상이 다 보고 알 수 있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 산 아래 있고 모세는 그 산 위로 올라가 하나님을 대면할 때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강림을 알리는 방식으로 산이 빽빽한 구름으로 가리워 보이지 않았다고 묘사합니다(출 19:16; 24:15). 구름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본래적 영광을 나타낼 때 나오는 표현입니다. 그런 영광 중에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허용 하셨던 영역을 그 백성을 불러 맡기신다는 표현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의 시점은 복잡한 설명을 섞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로 봐야 합니다. 이미 죽은 자들이 일어나 썩지 아니할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살아 있는 자들은 육의 몸이 홀연히(시간을 측정할 수 없는 순간) 변화되어 영의 몸 즉, 주께서 보여주신 부활체를 입게 될 것입니다.

육체로 부활

성경은 성도가 부활 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되 육신을 입을 것이라 말합니다. 흔히 영생을 말할 때 '영혼 불멸설' 같은 것으로 얼버무립니다. 육은 죽어 무덤으로 가서 티끌로 돌아가고 영혼은 죽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간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전혀 다릅니다. 육체로 부활합니다(고전 15:1). 여기서 또 많은 사람들은 혼란에 빠집니다. 매장을 하거나 화장을 한 몸이 어떻게 부활을 할 수 있는가?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바로 그 분해 되어 없어진 몸이 어떤 신비한 방법으로 다시 모여 재 합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부활할 때 지장이 있다는 이유로 화장(火葬)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그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일단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입고 있었던 몸은 죽음과 함께 티끌로 돌아갑니다. 매장 하면 그 기간이 비교적 오래 걸리고 화장은 불과 몇 시간 만에 티끌이 되는 차이 밖에 없습니다. 부활 시에는 이 몸이 재생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새로운 몸이 입혀진다'고 합니다(고전 15:49). 우리가 이 땅에 태여 날 때 그 몸을 '입혀진 것'이라고 표현하는데 '입다(헬, phoreo)'는 의상(衣裳)을 입는 동작 만이 아니라 무엇인가 '부여'되는 것을 말합니다. '세금을 부과 한다' 할 때도 이 말을 사용합니다. 현재 우리의 육신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이 세상에서 한 인간으로 살기에 가장 적합한 몸입니다. 우스개 소리로 하는 말들이지만, 눈 섶이 눈 위에 있는 것도 기막힌 디자인입니다. 코 구멍이 위를 향하지 않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 밖에 현재 몸의 오밀조밀한 유기적 조화는 경탄할 수 밖에 없는 디자인입니다. 그러나 이 몸으로 영원을 살 수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 안에 이 세상의 삶을 위하여 지금과 같은 우리의 몸이 부여된 것입니다.

고전 15:43로 다시 가 봅니다. 여기서 바울을 현재 우리의 몸과 부활 이후의 몸을 이렇게 대조합니다. "썩을 것과 썩지 않을 것으로, 욕된 것과 영광스러운 것으로, 약한 것과 강한 것으로, 육의 몸과 신령한 몸으로. " 현재 우리 몸은 썩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퇴화와 분해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 체는 썩지 않습니다. 또 현재의 몸은 욕된 것이라 하는데 이것은 죄의 유혹에 약한 특징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 체는 그럴 일이 없는 영화로운 몸입니다. 약한 것이란 우리가 늘 체험하듯이 늘 병이 나는 몸을 말합니다. 전성기를 지나면 약해져 갑니다. 둔해지고 잘 들리지 않고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 체는 그럴 일이 없는 강한 몸입니다. 현재의 몸으로 영원히 산다는 것은 오히려 저주입니다. 영원한 삶을 위하여는 그 영원에 맞는 몸이 부여되어야(입혀져야) 합니다. 바울은 이 대목을 이렇게 마칩니다. "육의 몸(현재 인간의 몸)이 있는 것같이 신령한 몸(부활 체)가 있다." 육의 몸이 그런 방식으로 부여 된 것 같이 신령한 몸도 (그 과정을 알지는 못하지만) 그렇게 부여(입혀)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몸을 보이시다

주님은 이런 몸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일단 그것과 관련된 기록들을 먼저 열거해 보겠습니다. 여기 소개되는 복음서의 구절들은 평행구절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을 개별적으로 모두 확인해 보면 큰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동산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에게 (막 16:9-11), 보이셨고 또 다른 여인들에게(마28:9-10) 나타내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눅24:13), 예루살렘에서 베드로 에게(눅24:34), 다락방의 10명의 제자들에게(눅24:36-43), 다락방의 11명의 제자들에게 (막16:14), 고기 잡던 7명의 제자들에게(요21:23), 산 위의 11명의 제자들에게 (마 28:16-20), 500여명의 제자들에게(고전 15:6), 승천 시 제자들에게(눅24:44-49), 사도 바울에게(행9:1-19)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이 목격 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이렇게 공개적으로 드러난 일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은밀하게 이루어 지고 또 그것을 소수의 사람들이 전해 들은 것을 다시 전하여 소문이 확산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생생하게 이를 지켜보면서 자신의 눈을 의심하던 여러 제자들이 부활을 증거 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도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여러 방식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갈릴리 풍랑을 잠잠케 하셨습니다. 그러나 닫힌 문을 통해 방안으로 들어 오시거나 아니면 동시에 여러 곳에 나타나신 적이 없습니다. 인간의 육신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는 몸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만질 수도 있는 몸이지만 그것을 초월하는 몸입니다. 제자들과 식사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지셨습니다. 영화로운 몸, 영원을 사는 신령한 부활의 몸을 이렇게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그런 것이 부활체입니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아주 조금 밖에, 초보적인 것 밖에 모르지만 그러나 확실한 것입니다. 어린 아기가 아빠에 대하여 잘 모르지만 그 분이 아빠라는 것을 확실하게 아는 것과 같습니다. 더 많은 것은 그 날에 다 드러날 것입니다.

집단환상?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이 500여명 이상의 제자들에 의하여 눈으로 확인되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 이번에는 '집단 환상 설'이라는 것을 제기하였습니다. 이 집단 환상이란 것은 종교적인 모임 등에서 간혹 있는 일입니다. 사실 뜨거운 열기 속에서 별별 체험을 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것은 반드시 그 환상에 대한 "암시"가 전제됩니다. 그리고 그 암시에 대한 기대치가 상승되게 하는 어떤 조치가 필요합니다. 그 기대가 상승하다가 누군가 황홀경 (ecstasy) 에 들어가면 여러 사람이 이에 동반되는 체험을 하기도 합니다. 마가의 다락방 같은 곳에서 이런 것이 체험되어 당분간 지속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는 그런 암시와 그것을 상승시키는 요인이 작용 하지를 않았습니다. 주께서 이미 부활을 말씀 하셨으나 제자 중 누구도 그것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눅24장에 기록 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절망 속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께서 설명을 하셔도 잘 몰랐습니다. 만약 제자들을 비롯하여 사람들이 이런 것을 어느 정도라도 기대 하였다면 여인들이 빈 무덤을 봤을 때 즉각 "부활"을 떠 올렸어야 합니다. 그러나 처음 빈 무덤을 목격한 마리아는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알지 못하겠다 (요 20:2)"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 곁에서 울지 말라고 위로 하실 때조차도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시신을 어디 두었는지 말하라고 하였습니다(20:15). 도마 역시 부활하신 주님을 보면서도 인정 할 수가 없었습니다(20:25-29). 도마만 의심이 많은 제자가 아닙니다. 이 때 도마는 모든 제자의 원형(prototype, 전형적인 예와 같은 것)으로 부활에 대하여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대변합니다.

따라서 암시와 그 암시에 대한 기대치를 상승시키는 어떤 것도 그들에게는 없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집단 환상을 자주 경험하는 모임에서는 처음부터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강한 암시'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이것을 계속 상승(escalating) 시키는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반복되는 암시와 마음의 경계나 논리를 약화시키는 비트가 강한 음악 등이 동원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추종 자들에게는 이런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본 것은 환상이 아니라 실제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공개적으로 이루어 진 것이며 공개된 증거 속에서 그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조사되고 검증된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이라 주장은 되고 있지만 그것을 확인할 길이 없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너무도 충분한 단서들이 널려 있으며 그 사건의 증인이 허다 합니다. 그 증인들이 본 것은 귀신도 아니고 환영도 아닙니다. 집단적으로 환상을 본 것을 사실이라고 우기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정직하기만 하다면, 성령의 도움을 조금이라도 받는다면 이것은 우리가 확인 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 중 가장 확실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사랑으로 이루어 진 것입니다. 부활의 진리를 견고하게 붙들고 살아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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