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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부활하셨다 요20:1-10


2019년 부활주일에

어느 교회에 집사님이 있었는데 그 분은 담임목사님과 고교 동창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없을 때는 서로 말을 놓고 지내는 친한 사이였습니다. 부활 주일에 목사님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소리 높여 증거 하였습니다. 예배 후 그 집사님이 목사님을 약간 외진 곳으로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화 내용을 이렇게 간추릴 수 있겠습니다.

"목사님, 그런데 진짜 부활이 있는 거야?"

"야 이 사람아 기독교에서 부활을 빼면 뭐가 있나!"

"에이, 그러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봐 진짜 부활이 있는 거야? 목사님은 진짜 부활을 믿는 거야?"

"허어 .. 이 사람 그게 무슨 말이야.. 허어 … "

"우리끼린데 뭘 그래 .. 솔직히 말해봐"

물론 제가 들은 말을 재 구성한 것이지만 참 재미있습니다. 이 집사님 뿐만 아니라 사실 (이런 분이 많을 것이라고 예상 됨) 성도들 중에는 이렇게 묻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저의 할아버지 목사님께서 가정 예배 등에 이런 말씀을 하시면 다시 아버지께 여쭈어보곤 하였습니다. 할아버지 목사님은 진짜 부활을 믿는 건가? 그때 아버지나 어머니 역시 그 사실을 믿고 아멘 하셨나? 이런 유의 질문을 하였습니다. 아무래도 할아버지께서는 목사님이시니 그렇게 말씀 하셔야 할 것 같았고, 이를 수긍하는 아버지는 저의 생각에 매우 현명 하시어 앞서가시던 분인데도 그 전설 같은 사실을 믿는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어른들께 계속 따져 묻는 것도 좀 그렇고 해서 저는 그냥 "부활의 소망이 있으면 좋은 거지 뭐 나쁠 것이 있겠나" 하는 정도에서 멈추어 섰습니다.

제가 신학교 초년병 시절에 주로 중증 폐결핵으로 거의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로 구성된 병원 선교회에 가입하여 따라다녔습니다. 그 회원 중 어떤 사람은 자신이 죽었던 경험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자신이 죽었는데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우는 것을 침대를 내려다 보는 위치에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후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밝은 빛으로 빨려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다시 눈을 뜨니 영안실 냉동고 바로 앞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다시 살아난 것을 알고 그 직원 들이 당황하여 자신을 다시 병실로 옮겼다고 합니다. 이것 역시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 분은 이런 경험을 통해 천국이 있는 것을 확신 하였고 또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부활 하였다"고 주장 하였습니다.

그 후에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중 이런 것을 NDE (Near Death Experience) 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말로 굳이 번역하면 "죽은 것은 아니지만 죽음 직전의 임상 경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알고 보니 이러한 경험을 가진 분들은 꽤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런 경험을 통해 천국과 부활을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소중한 경험이긴 하나 사실 상 이것과 천국 내지는 부활과 연결하는 것은 매우 그릇된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분들 중에는 부활을 마치 기독교 교리의 부록처럼 생각하여 믿어지면 믿고 또 안 믿어져도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거나 또 부활과 같은 중요한 것을 위에 말한 체험을 연장하여 유추하는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활은 성경의 부록도 아니고 죽음 체험과 같은 선상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의 장례식 장 같은 곳에서 "님은 가셨지만 우리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계실 것입니다"라는 그런 것도 아닙니다.

부활은 기독교의 부록이 아닌 결론

부활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핵심입니다. 예수께서 부할 하신 것은 돌발적 사건이 아니라 성경의 처음부터 예언 되어 온 것입니다. 바울은 "성경대로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전 15:4)"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성경이 계속 예언 해 오던 것이 마침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결과) 사망입니다" 주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 하셨다는 것은 "죄 사함"이 이루어 졌다는 것입니다. 창 3:15에 "여인의 후손이 죄(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 합니다.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치명 타를 가한다는 뜻입니다. 죄를 이기실 것을 말합니다. 죄를 이겼다 함은 죄가 가져온 사망을 이겼다는 것입니다. 사망을 이긴 증거는 부활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생애를 다양하게 소개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은 일제히 주님의 승리의 증거로 부활을 말합니다. 부활이 없으면 죄를 이긴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는 죄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예수님은 승리하신 것이 아니라 '뭘 좀 하려고 하였지만 실패하신 것'입니다.

부활은 어떤 사람의 고백이 아니라 엄연한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믿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누가 이 사실을 쉽게 믿을 수 있습니까? 오늘을 사는 우리들 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시, 초대교회 사람들도 이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늘 "부활 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살았던 예수님의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얼른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부활에 대한 것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믿을 수 있는 것이면 그냥 "믿으라"고 하고 넘어 갔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활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을 재현(再現)해 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주장입니다. 어떤 사실이든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것은 재현 될 수 없습니다. 유사한 사건이 다시 발생할 수는 있어도 '그 사건'이 다시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건이 실제로 있었던 것인지는 "단서(端緖, clue,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첫 부분)"를 통해서 아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의 전모를 밝히기 위하여 수사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단서를 확보하는 일입니다.오래 전 형사 콜롬보라는 미국의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복잡한 사건을 해결하는 유능한 형사의 이야기입니다. 범인으로 의심되는 자가 아무리 부인을 해도 기어이 사건의 전모를 밝힙니다. 이때 그는 머리 핀 하나, 담배 꽁초, 떨어진 단추 등의 매우 단편적인 단서 만으로 사건을 해결합니다. 이전 설교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부활의 단서들

성경은 일제히 가장 확실한 부활의 단서로 빈 무덤 기사를 제공합니다. 물론 이것 만을 말하지는 않지만 가장 기본적으로 이것부터 제공합니다. 무덤이 비어 있을 만한 이유는 몇 가지 있습니다. 부활을 부인하고 싶어하는 자들은 별별 이론을 다 만들어 냅니다. 무덤이 비어있었던 이유는 (1) 누군가 시신을 훔쳐 갔을 수도 있고 (2) 무덤을 잘 못 찾아 갔을 수도 있고 (3) 주로 초대교회 당시 이단 들이 주장하던 것인데 이 모든 일이 가상적 체험 즉, 환상과 같은 것이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4) 예수께서 완전히 사망한 것이 아니었는데 무덤(굴) 속에서 다시 정신을 차려 스스로 무덤을 열고 나갔다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기상천외 한 주장 들이 있지만 일일이 언급할 가치가 없어 보입니다. 여기서 (1)과 (4)에 대하여 만 언급을 하겠습니다.

시신 도난 설

(1)은 소위 시신 도난 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마지막 부분에는 (마28:1-15) 예수님의 무덤 앞에 성전 경비대 (로마 군인이 아니라 제사장 수하의 유대 병력)가 지키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외에도 어떤 기록들을 통해 이런 "정치범" 사후에는 종종 이런 조치를 하는 것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신 훼손 사건도 자주 있는 일이고 또 추종자들에 의하여 그 위대한 인물의 죽음이 공론화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시신을 훔치는 일이 있습니다. 실제로 시대의 영웅들은 그 무덤 위치를 영원히 비밀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십자가 이전에 자신이 부활 할 것이라는 말씀을 여러 차례 하신 것을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이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신 도난에 대한 특별한 조치를 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경비 병들이 갑자기 일어난 지진과 같은 어떤 현상으로 인하여 정신이 혼미 하였다가 나중에 시신이 없어진 사실을 인지합니다. 그리고 제사장에게 이를 보고 하였습니다. 제사장은 장로들과 협의 하여 경비 병 들에게 "돈을 많이 주고" 그 시신은 제자들이 가져갔다고 소문을 내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기절 설

(4)에 대한 해설입니다. 이것을 기절 설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십자가 형이 어떤 것인지 알면 도저히 입에 올릴 수 없는 주장입니다. 십자가 형 언도가 내려지면 그것을 집행 하기 전 사형수에게 채찍질을 합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는 고증을 거쳐 그 장면을 세세히 나타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이때 사용하는 채찍은 그 가닥이 가죽으로 된 것으로 약 1.5 미터, 그것이 40 가닥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가닥 가닥에는 납을 달아 충격을 크게 하고 또 거기에는 작고 날카로운 고리들이 달려 있습니다. 사형수를 엎드리게 하고 양 팔을 앞으로 잡아 다녀 등이 쭉 펴지게 한 다음 그것으로 등을 내리칩니다. 40 개 가닥의 채찍이 등에 떨어질 때 납의 무게를 이용하여 그 날카로운 고리가 등에 박히게 합니다. 그리고 그 채찍을 잡아당깁니다. 그러면 등의 살점이 떨어져 나갑니다. 이것을 40회를 반복하면 등에 살점이 남아 나지를 않습니다. 등 쪽 갈비뼈와 척추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인간의 잔인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최고로 악질적인 형벌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게 하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거리를 지나게 합니다. "너도 그런 짓 하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때 죄수가 지고 가는 나무는 십자가의 가로 형 나무입니다. 십자가의 세로로 세워지는 나무는 이미 형장에 땅 속 깊이 박혀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지고 가는 길을 오늘날 "고통의 길(비아 도로로사, via dolorosa)"이라고 부릅니다. 요즈음 성지 여행을 가시는 분들은 이 길을 꼭 가 보실 것입니다. 그렇게 긴 길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길을 지칠 대로 지치고 고통으로 위축 된 예수께서 무거운 나무 형틀을 지고 가실 때 자꾸 쓰러지셨습니다. 예정 시간보다 지체 됨으로 로마 군인 중 형 집행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이 좀 건장하게 보이는 구레네(아프리카 북부 지역) 출신 시몬에게 이것을 대신 지고 가라고 명령합니다. 사실 약한 사람들은 채찍 맞다가 죽은 경우도 허다하다고 합니다.

형장에 도착합니다. 그러면 죄수를 그가 지고 온 형틀 위에 눕히고 손에 못을 박습니다. 손 바닥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팔목에 박습니다. 팔 목 뼈(손목 뼈)는 팔꿈치에서 두 개의 뼈가 손목에 이르러 합쳐집니다. 그 사이에 못을 박습니다. 다시 말하면 큰 못에 그 팔목(손목) 뼈가 걸리는 것 입니다. 손바닥에 못을 박을 경우 몸무게로 인하여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손 목 뼈 가운데는 '정중신경'이 있습니다. 팔에 힘을 줄 때 이것이 사용 되는데 못으로 인하여 그 신경이 파괴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팔에 힘을 줄 수가 없습니다. 양 팔목에 못을 박은 다음 도르레 같은 것을 이용하여 본래 설치한 십자가 세로 기둥으로 끌어 올린 후 가로 기둥을 고정하고 그 세로 기둥에 발을 못박습니다. 이때 정중신경이 파괴 되어 팔에 힘을 줄 수가 없으니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어깨가 탈골 되어 몸이 밑으로 축 쳐지게 됩니다. 그러면 폐 아래 있는 횡경막이 올라 붙어 숨을 쉴 수가 없게 됩니다. 이제 숨을 쉬려면 못 박힌 발에 힘을 주어 몸을 들어 올려야 합니다. 그래야 횡경막이 내려가 폐에 공기가 들어 옵니다. 숨 한 번 쉴 때마다 극도의 고통이 따릅니다.

이 날이 금요일입니다. 오전 9시에 십자가 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금요일 오후 6시가 되면 이제 새 날이 시작됩니다. 그들의 하루는 오후 6시에 시작됩니다. 다음 날이 안식일임으로 규정 상 시신을 나무 위에 달아 둘 수가 없음으로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있는 자들을 죽여달라고 집행 관에게 부탁합니다 (요19:31). 그래서 군인들은 십자가 위에 있는 사람들의 다리(무릎)를 꺾어 줍니다. 창을 다리 사이에 넣고 심한 충격을 가하면 무릎이 탈골 됩니다. 그러면 더 이상 다리로 몸을 들어올려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3-4 분이 지나면 혈액이 급하게 산성화 되어 '산독 증(acidosis)'으로 죽게 됩니다.

집행 관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가서 보니 이미 죽어있습니다 (요19:33). 그래서 다리를 꺾지 않고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34). 죽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그것을 보고 이렇게 기록합니다. "피와 물이 나오더라(34)." 이것은 이미 죽은 지 시간이 어느 정도 경과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혈액과 혈청이 이미 분리되기 시작된 것입니다. 혈액은 붉게 보이고 혈청은 마치 물처럼 보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심장이 파열되어 이미 돌아가신 것 입니 다. 옆에 있던 강도들은 아직 죽지 않았음으로 다리를 꺾어 죽게 하였습니다.

여기에 유대인의 간교한 술책이 숨어 있었다고 요한이 증거 합니다. 유월절 어린양은 뼈를 꺾지 않습니다(요19:36). 통째로 바베큐 하듯 구워서 먹습니다. 여기서 만약 예수께서 다리가 꺾였다면 그들은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봐라, 자신이 유월절 어린 양이라 하던 자가(메시야를 말함) 다리가 꺾였다! 하하 그가 무슨 어린양이냐 .. " 그러나 성경의 예언 대로 되었음을 요한이 놓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다 이루신 것"입니다.

이제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비교적 부자가 시신을 인수 받아 자기의 묘실에 장사를 지냅니다 (요19:38). 이때 시신을 닦고 염을 합니다. 세마포, 폭이 3-40 cm 정도되는 고급 천으로 팔은 팔대로 감고 다리는 다리대로 감습니다. 감는 이유는 침향과 몰약이 시신에 보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감으면서 몰약 등을 바릅니다. 몇 겹을 감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몸통은 몸통대로 이렇게 처리 한 후에 큰 세마포로 몸 전체를 감고(이것을 수의라고 합니다) 역시 세마포 천을 접어서 끈으로 만들어 시신을 묶습니다. 이 때 얼굴 부분은 하악(아랫 턱)이 윗 부분과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머리 수건(헬, 수달리온)으로 덮습니다. 덮는 다기 보다는 감싸서 묶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굴 안에 준비된 곳에 눕힙니다. 가난한 자들의 묘는 작은 굴 이라서 앉은 채로 뒤로 집어 넣습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 같은 사람들의 묘는 비교적 큰 동굴로 사람이 서서 들어 갈 수 있는 정도입니다.

그리고 묘실(굴) 입구는 큰 돌로 막습니다. 빈대떡 모양의 납작한 돌을 굴려 막는 것이 이니라 큰 공 모양의 돌입니다. 묘실을 들 때 어느 정도 경사지게 판 다음 문으로 쓸 돌을 미리 입구에 두었다가 장사가 마쳐지면 아래로 굴립니다. 공 모양의 돌이 그 무게로 인하여 굴러 내려가 "쾅"하고 닫히는 형태입니다. 이것을 만약 다시 열려면 지렛대를 사용하여 틈을 벌린 후 장정 대여섯 명이 들어가 경사진 입구에서 그것을 밀어내야 합니다. 예수님 무덤으로 새벽에 달려간 여자들이 그 문을 어떻게 열지 고민하였던 이유입니다(막16:3). 급한 마음에 달려가긴 하나 그것을 자신들이 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절하였던 주님이 다시 일어났다고요? 그래서 그 몸에 감겨 있었던 세마포를 스스로 풀고 그리고 또 수의를 몸에 묶었던 끈을 풀고 일어나 그 문을 열고 나갔다고요? 손 발에 못이 박혔던 분이 일어나 그 손으로 그것을 풀고 그 무거운 돌 문을 정중신경이 파괴 되어버린 팔을 이용 하여 스스로 열고 나갔다고요? 이것이 십자가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입니까?

요11장에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오는 기사를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나사로가 나올 때 몸에 감긴 그 붕대(세마포 끈)을 그대로 맨 채로 나왔다고 합니다. 주께서 "그것을 풀어 다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요11:44 참고). 그는 얼굴에 수건이 싸인 채로 "나왔다"고 하는데 몸이 세마포 수의로 싸인 채로 누가 일으켜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싸인 채로 스스로 걸을 수는 없습니다.

요한이 20장에 이것을 그대로 증거 합니다. 여인 중 막달라 마리아가 제일 먼저 빈 무덤을 봅니다. 문은 이미 열려있었습니다 (요20:1). 누가 시신을 가져간 것 같다고 사도들에게 전했습니다. 그의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그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사람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그가 충격으로 인해 그런 병이 "도졌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은 직접 확인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요한은 무덤이 들어가지 않고 "허리를 구부려 (요20:5)" 안을 살폈다고 합니다. 그 굴은 허리를 굽힐 정도로 좁은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허리를 굽혔다"는 것은 "자세히 살피는 모양"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얼핏 보고 예수께서 다시 사셨다고 소리 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안으로 들어가 자세히 살핍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상황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얼굴을 쌌던 수건은 따로 놓여있습니다 (20:7). 이것은 그 수건이 본래 머리가 있던 위치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수의가 (시신을 쌌던 세마포) 몸을 쌌던 모양대로 놓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20:7). 만약 누가 혹은 스스로 이것을 풀었다면 (그래야 움직일 수 있음으로) 풀어 헤쳐진 모양으로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수의가 원래 쌌던 모양대로 놓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전 번역에는 '개켜있었다' 고 번역 되었습니다. 이것은 널브러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지런한 모양으로 되어 있었음을 나타나는 것)는 것입니다. 쌌던 머리 수건과 수의에서 몸이 마치 연기처럼 쏙 빠져 나갔음을 의미합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예수께서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문이 닫힌 상태에서 그것을 그대로 통과해서 들어 오셨다고 합니다(요20:19). 그것은 "시공을 초월한 몸인 부활 체"로 오신 것인데 바로 그런 상태로 그 몸이 수의를 빠져 나가신 것입니다. 그렇게 부활하신 것입니다. 돌문이 열린 것은 예수께서 그 묘실을 나가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들어와 확인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무덤을 나가시기 위해서는 그 돌 문을 열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은 확실한 부활의 단서 중 하나입니다. 그것 외에는 이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2000 여 년 동안 이 사실을 부인하기 위하여 수 많은 억측들이 있었으나 그 어떤 것도 이 보다 만족스러운 설명을 한 적이 없습니다.

고전 15 장의 증거

그 몸은 고전 1:42-44에서 보여주는 대로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화로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게 될 것이며 육의 몸이 있는 것처럼 신령한 몸이 있다고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우리의 부활도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부활을 보증하는 첫 열매입니다 (고전 15:20). 주님은 부활 이후 제자들을 찾아 오신 것은 부활체가 무엇인지 자세히 보여 주시기 위한 목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려 사 십일 동안 다니시며 믿기를 더디 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확증시켜 주셨습니다. 요한 서신을 기록한 요한은 첫 번 째 서신 1:1에서 "이것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또 자세히 보고 손으로 만진 바 된 것" 이라 고 말함으로써 예수님에 관한 모든 증거를 어디서 대충 듣고서 너무 좋은 말이라 전 하는 것도 아니고, 눈으로 그냥 본 것도 아니라 자세히 살핀 것이며, 그것도 부족하여 손으로 만진 것 (더 이상의 확증이 필요 없는) 것이라 말하였습니다.

특히 이 고전 15 장은 부활의 논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근거로 바울이 기록한 생생한 논증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수 많은 논문을 보아 왔지만 이렇게 정교하고 실제적인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 이것을 보면서 배가 되고 또 배가 되었습니다. 죽은 학문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학문, 몰라도 그만인 이론이 아니라 살아있는 필수적 진리이며 전 인류가 꼭 알아야만 하는 말씀입니다.

고전 15장에서 할 말은 너무도 많지만 특히 저는 42-44에 반복되는 "심고"라는 말로 인하여 거의 충격적이라 할 수 있는 정도의 강도(强度)로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어 육신이 땅에 "묻힐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말 대신에 "심는다(헬, spheiro, 씨를 심는다)"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생명이 없는 쓰레기 같은 것은 땅에 묻습니다. 그러나 똑 같은 동작이라도 생명이 있는 것은 '심는 것(씨를 심는 것)'입니다. 죽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생명을 위한 과정이라는 뜻입니다.

15:6에는 부활의 증인들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바울이 이 고린도 전서를 기록할 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전해 들은 자가 아닌)' 한 자들 500여명 중 대부분이 살아있었다고 합니다. 이 분들은 당시 대부분이 스데반의 박해 사건 이후 이리저리 흩어져 세워진 교회의 지도자들 입니다. 이들의 중요 임무 중 하나는 당시 돌아다니던 예수에 관한 많은 전승이나 문서 중에서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려내는 것이었습니다 (눅 1:1 참고, 예수님의 사건에 대하여 증거 하려고 붓을 든 자들이 많다). 이미 이 때는 요한 복음을 제외한 다른 복음 서들이 기록 되었을 때입니다. 그 복음서의 기사들 중 "예수님의 능력이나 부활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믿게 하려고 어느 정도 과장을 하였다거나 사실과 약간 다른 내용의 조작이 있었다면" 그들에 의하여 그런 글은 거부 되었을 것입니다. 부활을 목격한 자들이 이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과장'할 이유가 없습니다. 완벽한 것은 그대로 보존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더 그럴 듯하게 하기 위여 손을 대면 그것은 훼손시키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의 예수님의 행적이나 부활은 이들에 의하여 다 검증 된 것입니다. 부정한다고 해서 부정되는 사건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에베소서 1:19

나아가서 엡 1:19 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위력( 능력)으로, 바로 이런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고 실제로 이루신 "그 위력(능력)으로 역사 하심에 따라 믿는 우리!" '따라'라는 말은 어떤 수단을 의미합니다. 즉, 내가 지금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우연한 일도 아니고 나의 총기나 지식이나 의 능력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그 능력으로 믿게 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은 전 인격의 변화가 동반되는 엄청난 일로써 사단에게 잡혀 있는 한 결코 이르지 못하는 천국의 문입니다.내가 지금 믿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능력이 나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참 믿음을 던져 버릴 만한 일들은 계속 나를 공격하지만 내가 믿음을 버리지 않는 것도, 혹은 버릴 수 없는 것도 그 능력이 나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믿음을 유지해 나가는 이상, 오르막 내리막도 있겠지만, 강할 때도 있고 약해질 때도 있지만, 부활은 내게 일어날 분명한 사실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그 무한하신 능력과 은혜로 이루신 역사입니다. 우리가 그 안에 선택을 받아 그 "위력"으로 믿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살고 있으며 하루에도 몇 번씩 믿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일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나 그 위력으로 여전히 "은혜 아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부활하는 날까지 떠나지 않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 위력으로 우리를 부활에 동참 시키실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어려운 중에도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도덕이나 윤리적인 힘이나 재력이나 지력(智力) 아니라 구원과 부활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말씀으로 인한 것 이었 습니다. 바울은 부활을 증거하면서 "흔들리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 살면서 흔들리지 않으려면 이 진리를 내 것으로 온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나의 뼈와 살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남은 생애에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이 진리를 좀 더 깊게 파악하는 것입니다. 예수 부활은 예수님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보다 먼저 믿고 세상을 떠나신 잊을 수 없는 사랑하는 자들이나 우리 뒤를 따를 믿음의 자손들은 다 부활에 동참하여 죄악의 티끌도 찾아볼 수 없는 영광스러운 곳에서 다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이 부활을 이루신 하나님의 능력과 그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께 충만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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