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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의 법칙


창 31:41-42

꽤 오래 전부터 TV 프로그램에 “정글의 법칙”이라는 것이 방영되고 있습니다. 김병만이라는 매우 특이한 배우를 중심으로 여러 명이 세계 이곳 저곳 오지에 가서 생존 체험을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실제로 짐승을 사냥 하거나 물고기를 잡아서 원시적 방법으로 불을 피운 후 구워 먹고, 또 임시로 움막을 만들어 며칠을 지내는 참 쉽지 않은 생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제목은 영어 “The Low of the Jungle” 을 우리 말로 옮긴 것입니다. 우리 말로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이라고 합니다.

이 약육강식 뒤에는 “원리”라는 말이 덧붙혀져 사용 되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쓰이는 말인 “적자생존”에도 그 뒤에 원리라는 말을 붙입니다. “원리”라는 말을 누가 붙였는지는 모르지만 별로 거부 반응 없이 쓰입니다. 원리라는 것은 누가 봐도 그렇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원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예외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외는 무시해도 좋을 만한 것일 때 원리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약육강식은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인가

약육강식은 “약한 것은 강한 것에게 잡아 먹힌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정글 즉 밀림에 사는 짐승들에게나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에서도 하나의 원리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누가 봐도 그런 것 같이 보입니다. 그래서 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 개인의 경험도 그렇고 우리 주변을 봐도 그렇습니다. TV 뉴스나 기타 어떤 소식을 들으면 이 말이 맞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이런 것을 봐왔기 때문에 그 이상의 생각을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 너도 나도 일단 강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안 잡혀 먹으려면 강해져야 합니다. 내가 나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면 누구에겐가 눌리지 않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라도 강해져야 합니다.

여기서 "강하다"는 것은 팔뚝이 강하고 다리 통이 굵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갖고 싶어하는 것을 먼저 많이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제력 일 수도 있고 학력일 수도 있고 미모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을 먼저 많이 확보하고 있어야 세상이 내 수중에 들어오고 또 더 많은 것을 장악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경쟁이나 더 나아가서 분쟁은 이런 기반 위에서 시작됩니다. 이를 목적으로 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을 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는 다른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하나님의 뜻과 이와 같은 것이 충돌 될 때 고민할 필요도 없는 것을 고민하는 “무가치한 고민”은 물론이고 나아가서는 이런 잘못된 생각때문에 소중한 하나님의 뜻을 헌신짝같이 버리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이런 자신의 사고 방식을 동일화 시키기도 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짐승과 버러지 형상으로 반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또 다른 원리

그러나 성경을 보면 약육강식 원리는 사람들의 관찰이 지나치게 일차원적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거듭나지 못한 세상 사람들은 영적인 안목이 없습니다. 그래서 안목자체가 세상적입니다. 아무리 세상을 오랫동안 깊고 세밀하게 관찰하여도 약육강식의 원리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순간 이 법칙 혹은 원리라는 그것은 한 순간에 다 무너져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 예로 야곱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본문이 들어있는 창31장은 야곱이 처가에서 떠나는 내용입니다. 특히 31장에는 외삼촌이자 장인인 라반이라는 사람이 야곱을 20년 동안 어떻게 대하였는지 기록되어 되어있습니다. 요즘 흔히 말하는 “갑” 질도 이런 갑 질이 없습니다. 야곱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지만 거기선 어쩔 수 없이 “을”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처음 그 집에 도착해서 사위가 되었을 때 야곱이 원하던 라헬과 결혼하기로 하였는데 첫 날을 지나고 보니 그 언니 라헬이 장막에 들어와 있었던 것입니다. 장인인 라반의 짓입니디. 이런 일은 동서고금 어디서도 보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 장인 라반은 이런 사람입니다. 아주 교활합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야곱의 20년 동안의 처가살이는 장인의 장난에 계속 놀아나는 삶이었습니다.

창 30장에는 라반이 사위인 야곱과 품삯을 정하는 일종의 근로계약이 나옵니다. 이런 식으로 세운 계약이 오늘 본문에 보면 20년 동안 10번이나 바뀌었다고 했습니다. 소득이 증대하여서 좀 더 많은 것을 주려는 갱신이 아닙니다. 복지후생 항목이 추가된 것이 아닙니다. 장인이 자기 좋을 대로 당시 근로기준법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계속 바꾸었다는 것입니다(41). 평균적으로 2년에 한 번씩 제 마음대로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기(詐欺)와 착취가 어디 있겠습니까? 야곱은 힘 없는 을이라 어디 하소연도 못하였습니다. 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 억울함을 호소하는 기도를 했을 뿐입니다.

만약 약육강식이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라면 여기서 야곱은 계속 빈털터리라야 합니다. 부익부빈익빈, 즉 부자는 더 부자 되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하게 되는 그 원리처럼 보이는 것이 야곱에게 그대로 적용되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야곱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42절입니다.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않았더면 외삼촌께서 나를 이제 공수(빈손)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내 손이 수고를 감찰하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만약 야곱과 함께 하시지 않았다면 그는 빈털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사정을 돌봐 주셔서 빈털터리를 면하고 이만큼 소득이 얻었습니다” 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으면 약육강식의 원리가 여기서도 그대로 사실인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고향에서 도망하여 벧엘 광야에 잠시 머물 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오게 할 것이다(창28:15)”라고 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하나님께서는 성실히 지키셨습니다. 그 결과 야곱은 라반의 그 엄청난 갑 질에도 불구하고 빈털터리가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이 일한 것 이상의 재물을 얻었습니다.

약육강식의 원리는 더 이상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원리가 아님

하나님께서 지키신다는 것은 어떤 돌발적 사고를 예방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약육강식에서 말하는 바로 그 강자에게 약자인 성도가 잡혀 먹지 않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만약 약육강식의 원리가 누구에게나 사실이라면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존재 하였다 하더라도 몇 달 혹은 몇 년도 못 가서 사라졌을 것입니다. 종종 성경은 이 세상은 갈릴리 바다, 예측할 수 없는 풍랑이 일어나 모든 것을 삼키는 바다요 성도들 혹은 교회는 그 풍랑 속에 있는 작은 배로 비유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막강한 풍랑이 주님의 꾸짖음 앞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약육강식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먹혀 들지 않는 것이라는 메세이지로 봐도 무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시 종교지도자 앞에서 약자였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을 보세요. 사람 하나 죽이고 살리고를 마음대로 하지 않습니까?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능숙하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감람 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 오실 때 사람(군중)들은 호산나를 외치면서 겉옷을 땅에 깔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며칠 후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 쳤습니다.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어떤 작전이 먹혀 들어간 것입니다. 그들은 그런 정도의 능력자들입니다. 그 정도 되니 그 오랜 동안 그런 식으로 권력을 가지고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인 종교재판에서는 사형이 불가능 합니다. 그래서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를 빌라도에게 보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사형 언도를 내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교묘한 압력에 손을 들고 맙니다. 그는 군중들 앞에서 “손을 씻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나 군중들이 이를 그렇게 몰아가서 이를 피할 수는 없게 되었으나 이 일에 그는 책임지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든지 말든지 그는 결국 십자가 형을 내렸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빌라도를 움직일 수 있는 정도의 사람들입니다.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하려고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강자들입니다.

이에 비하여 예수님과 제자들은 빽(back)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어부 출신들이 힘있는 정부 고관과 긴밀한 연계가 있겠습니까? 세리 출신이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겠습니까?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 정도가 그래도 유력한 자들이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막지 못합니다. 대세에 눌려 예수님의 구명운동은 시도조차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가야바 법정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은 당시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했는지 시사해주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어떤 행동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정글의 법칙이 맞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 지도자들에 의하여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끝이 났으면 정말 약육강식의 원리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에서 살려면 우리도 어떻게든 강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패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할 때입니다. 빌라도가 묻습니다. “네가 왕이냐(요18:36-37)?” 주님은 자신이 왕이지만 이 세상에 속한 왕이 아니며 이와 같은 사실은 <진리에 속한 자>라야 그 사실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이 때 빌라도가 다시 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물론 주님은 여기에 대답을 하시지 않습니다. 빌라도 같은 사람에게 진리는 곧 힘입니다. 지금 어떤 세력과의 싸움에서 져서 빌라도 앞에 심문을 받는 자가 진리 운운하는 것이 빌라도에게는 우습게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빌라도같은 사람들은 두 눈으로 보이는 것 외에 볼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진리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눈을 뜬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희미하게라도) 보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사에는 이런 원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이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신령한 원리를 깨뜨리고 모든 것을 죽음으로 몰아 넣는 죄를 이기신 것입니다. 세상의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시고 우리들같이 어리석고 어두운 자들에게 그것을 환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역사하는 원리는 약육강식의 단세포적 원리가 아니라 “믿음의 원리”입니다. 즉 이 모든 세상은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것을 어떤 특별한 섭리 가운데 '허용'하시지 않는 한 약육강식은 더 이상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가 아닙니다.

약육강식과 교회의 성장

예수님 승천 하신 이후 성령께서 주도 하시는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초대교회의 멤버들을 보세요. 그 중에 누가 어떤 조직을 운용하여 성장하게 할 인물이 있습니까? 저는 목회 하는 중 비교적 약해질 때가 있었는데 그 때마다 별 볼일 없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렇게 고맙게 느껴집니다. 때로 주님 앞에서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하는그들의 어설픈 모습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만약 천재적인 인물들 이었다면 저는 정말 기죽어서 목회를 못하였을 것입니다.

성전 미문 앞에 앉은뱅이를 일으킨 자가 베드로라는 사실에 매우 감사합니다.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이 아닌 것이 진실로 감사합니다. 스티븐 호킹이 아닌 것이 감사합니다. 그들이 한 일이라면 저는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들은 저에 비하여 아는 것이 너무 많고 가진 것이 저와 비교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오직 예수 밖에 없는, 예수 밖에 모르는 자가 예수의 이름으로 행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나도 할 수 있습니다. 내게 가장 확실한 지식은 예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당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정도로 권세를 가지고 있던 지도자들 앞에서 약자입니다.그 강자들이 베드로를 옥에 가두었지만 그러나 그 강자들이 더 이상 어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그 강한 힘은 "여기까지"입니다.

교회가 세워지자 부활의 증인들을 말살하려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를 죽인 자들이니 제자 몇 명 정도 없애는 것은 일도 아닐 것입니다. 베드로를 감옥에 잡아 두었으나 그 옥문은 열렸습니다. 약육강식의 원리는 하나님 앞에서 혹은 교회 안에서 산산조각이 납니다. 제자 중 중요한 인물인 야고보를 죽였습니다. 그런다고 야고보 계열 신자들이나 혹은 제자들이 위축되어 어디로 증발된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불꽃은 더 활발하게 타 오릅니다. 수 많은 지지자를 확보한 이단들이 기독교의 불을 꺼뜨리지 못하였습니다. 엄청 난 갑이라 할 수 있는 로마 정부도 교회를 없애지 못하였습니다. 교회가 지하로 숨기는 했으나 없앨 수가 없었습니다. 약육강식의 원리는 더 이상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적용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초대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저의 할아버지는 초대 교회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러나 무슨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교회 밖에 모르는 분이었습니다. 경주에 문화학원(현, 경주 문화 중고등학교 전신)을 설립하셨는데 당시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이 신문 팔이, 구두 닦이 .. 이런 류의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야간 학교였는데 이들 중 목사가 된 사람이 많습니다. 이들은 결코 이 사회에서 강자가 아닙니다. 사회적 구분 법으로 보면 다 약자입니다. 갑에 대한 “을”들일 뿐입니다. 스스로 흑 벽돌을 찍어 교회당을 세우고 굶어가면서 교회를 일으키신 분들입니다. 만약 약육강식이 정말로 사회에 적용되는 원리라면 우리 나라 역시그 살기 어려운 시절에 초대교회는 세워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세워졌다 하더라도 얼마 못 가 와해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이후 다른 지역 교회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 교회는 이런 저런 방식으로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회유와 핍박, 어떤 것도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지도자 중 일부가 판단을 잘 못하여 일본제국에 협조한 일이 있기는 하나 그들의 계획 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해방 되기 얼마 전 일본 정부는 대한민국의 유력한 지도자 제거 공작을 세웠습니다. 무려 800여명의 제거자 명단이 공개된 적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단히 많은 개신교 목사들이 포함되었습니다.이 공작이 진행되던 중 일본이 항복하면서 그 계획은 무산되었습니다. 한 나라의 왕후도 죽이고 또 나라도 먹어 치우는 자들이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 나라가 계속 어려워지도록 두시지 않았습니다. 약육강식의 원리는 하나님 앞에서 초라한 폐기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보이시는 새로운 원리

이런 것들을 고려할 때 세상은 약육강식의 원리에 의하여 돌아가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소위 강한 자가 되어야 살아남고 또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보일 수는 있겠으나 그렇게 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엘리사는 아람 군대에 포위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제자가 그 사실을 알고 “아 ! 내 주여 어찌하리까?” 탄식할 때 엘리사는 그의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왕하 6:17). 결국 아람군보다 더 많은하나님의 군대인 불 말과 불 병거를 그가 보게 되었습니다. 약육강식의 원리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배하십니다. 다시 말해 믿음의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기록에서 대조를 살펴보십시오. 240 cm 정도되는 거구의 골리앗과 아직 소년 티를 못 벗은 다윗, 갑옷으로 무장한 골리앗과 목동 차림의 다윗, 베틀 채 보다 더 굵은 창과 검을으로 무장한 거인과 물매 돌을 손에 쥔 소년 .. 참으로 극적(劇的)인 대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누가 봐도 강자는 골리앗입니다. 승부를 알 수 없는 아슬아슬한 대결이 아니라 뻔한 결과가 예상되는 대결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골리앗을 이깁니다. 약육강식의 원리가 대입되지 않습니다.

눅 19장에 삭개오 이야기가 있습니다. “키 작은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 갔는데 …. “ 하는 어린아이들 찬양 곡이 있더군요. 그는 여리고의 세리 장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 말단부터 온갖 궂은 일 다하면서 마침내 세리장이 되는 것입니다. 여리고는 교통의 요지이고 번화한 곳으로 여기서 세리장이 되기위해 다른 곳의 세리보다 더 치열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툭 터놓고 말하면 욕도 더 많이 먹고 나쁜 짓도 더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래야 실적이 좋아지고, 또 그래야 로마 정부의 인정을 받으니까요. 축재(蓄財)는 하였을지 몰라도 욕도 무지하게 먹었을 것입니다. 암살의 위험도 늘 있습니다. 자식들에게까지 그 오명이 그대로 전달되는데 그렇게까지 민족의 반역자 노릇해가면서왜 이런 일을 할까요? 그 답 중 하나는 “약육강식”의 원리 이상의 원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돈’이 아니면 강자가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돈이 없으면 멸시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고 을 중에 을이 될 수 밖에 없는 대표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오던 그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또 직접 주님의 기적 현장을 봤을 수도 있습니다. 그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키 작은 그가 뽕 나무에 올라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비하여 삭개오의 그런 행위는 충분히 조롱거리가 됩니다. 안 그래도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자가, 키가 비정상적으로 작은 자가 그런 나무에 오른다는 것은 스스로 조롱거리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했다는 것은 그의 마음은 오직 예수님을 보고 싶다는 것으로 가득 찼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후의 조롱이나 기타 빈정거림 등은 예상했다 하더라도 그런 것이 그를 막지 못할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가 만약 너무 많은 것을 생각했더라면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뽕나무에 올라가 예수를 보려고 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기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계는 삭개오가 사는 것과 달랐음을 그가 알게 된 것입니다. 삭개오는 그 세상이 궁금하였을 것입니다. 세상 모두가 기회만 있으면 강자가 되려는 노력을 하는데 예수님은 그런 것에는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기왕 어떤 일을 성사시키려면 유력자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강자가 되고, 강자는 못되더라도 그 그늘에서 목적한 바를 보다 용이하게 이룰 수 있습니다. 세상이 다 아는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산 꼭대기에 세우고 유혹했던 것 중 하나입니다. 세상에서 강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권력이 있는 자 편에 서는 것이 유리합니다. 즉, 실세를 파악하고 그 줄에 서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만나봐야 별 도움도 안 되는 소경, 문둥병자, 귀신 들린자.. 등등 당시 사회에서는 “짐만 되는 존재”들을 만나고 그들을 위하여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 사역 초기에 그 육신의 동생들이 형에게 불만을 나타낸 것이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설교에는 정치 경제 같은 사람들이 민감해 하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삭개오 같이 치열하게 살아온 자들에게 예수님은 다른 세상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나타나는 (별 볼일 없는 외모) 그 능력은 금전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한 주님의 세계가 너무 궁금하였고 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세계를 동경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그가 왜 그 나무에 올라갔는지 아셨습니다. “내려오라, 내가 네 집에 좀 거하여야겠다(19:5).” 집에 거하신다는 것은 잠깐 차 한 잔 마시고 가신다는 것이 아니라 며칠씩 계시는 것입니다. 그 동안 주님은 삭개오에게 무엇을 말씀하셨을까요? 정치 이야기요? 축구 이야기요? 삭개오의 주 관심사인 부동산 투자?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이 세상과 무엇이 다른지, 그 새로운 세상은 어떻게 오는 것인지? 어떻게 받는 것인지 .. 이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성취되어 왔는지 혹은 어떻게 성취될는지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주님으로부터 새로 오는 세상,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도래한 천국, 그러나 아직은 완성되지 않는 나라에 대하여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적어도 “약육강식”이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가 될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삶과 바꾼 돈을 ‘도로 내어 놓겠다’고 하였습니다(19:8). 여기서 삭개오는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 또 내가 토색했다면 네 배를 …"라고 하였습니다. 얼핏 보면 예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겠다고 말씀하신 직후 "삭개오가 서서 말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자세히 보면 그 말씀과 삭개오의 이런 말이 있은 시점은 어느정도 간격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후 이런 결단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말한 것은 법적으로 문제가 되면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어 놓겠다”는 말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재산의 절반”은 회계사를 통해 자신 평가 후 1/2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전부” 내 놓겠다는 말입니다. 헤롯이 춤추던 헤로디아에게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노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달라는대로 다 주겠다”는 일종의 당시의 수사법입니다. 노랭이, 돈 벌레처럼 생각되는 삭개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약육강식의 원리가 아닌 새로운 원리를 주님 안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 삭개오처럼 재산을 내놓으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약육강식의 원리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삭개오처럼 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강자가 되기 위한 것이 삶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런 식으로 목표가 설정되면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그것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아무리 말씀하셔도 그것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강자가 되는 나름대로의 방식을 고집합니다. 오히려 그렇게 해 주시지 않는다고 하나님께 화를 낼 것입니다. 세상의 관념대로 강자가 되어야 승리하고 제대로 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원리를 따라야 승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기쁘게 허용하신 목적이나 목표를 이루시기 위하여는 반드시 세상이 말하는 강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의 원리가 여러분을 주님 같은 또 그분의 신실한 제자같은 진정한 강자로 만들어 줍니다. 주님은 강하신 분입니다. 동시에 온유하신 분입니다. 성령 충만한 자들은 모두 다 강하면서 온유합니다. 주님 같은 “강한 자”가 되어야 최후의 승리, 진정으로 가치 있는 승리를 합니다. 약자를 잡아 먹는 강자가 아니라 약자를 주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우는 강자가 됩니다. 세상의 모든 돈을 다 쓸어 담음으로 가난한 자를 양산하는 강자가 아니라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켜 많은 사람을 먹고도 남게 하는 강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원리로 이런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 이상 정글이 아닙니다. 세상은 악하지만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진리에 속한 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약육강식이 먹히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믿음의 원리가 우리를 살리는 것이고 우리를 진정한 강자로 만듭니다.

약육강식의 원리가 아니라 믿음의 원리를 따르십시오. 그것 만이 진정한 승자가 되게 하는 것이며, 그것만이 제대로 된 인간의 삶을 누리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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