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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자는


벧전 4:10,11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은 때로 자신의 사역이 마치 열매 없는 무화과 같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밤새도록 수고하였으나 빈 그물을 보는 것 같은 일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칭송을 받을 수 있으나 사실 열매가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청산유수 같은 설교를 하고 그것을 듣는 사람들을 웃게도 하고 울게도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설교에 열매가 맺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경우 스스로 ‘할 만큼 했다’ 혹은 ‘후회 없다’ 이런 식으로 스스로 위로하지만 이런 것이 반복되면 무너져 내리는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가 참 힘이 듭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는 나의 이야기 일 수 있습니다

교회 사역 초기에 제가 전도사로 섬기던 교회 부흥회가 있었는데 그 강사 중 한 분이 설교에 앞서 기도를 이렇게 했던 것을 자주 기억합니다. “주여! 한 말씀이라도 주시옵소서, 아니 반 말씀이라도 주옵소서!” 그분은 경건한 모습의 목사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설교 중 비속어와 상스러운 표현이 많았고 논리가 정연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이 방탕 했던 것을 간증하는 식이었습니다. 당시 성도들의 반응은 매우 즐거워 하였습니다. 그분의 그 기도가 자꾸 생각이 납니다. 제가 좀 더 자란 후에도 이따금 설교 준비 시에나 설교 중에도 그 말이 생각났습니다. 아마도 그분은 자신이 설교할 때 청중들이 재미있어 하지만 자칫하면 설교가 말 잔치로 끝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런 점에 대하여 우려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분의 설교는 솔직히 저에게는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았습니다. 아멘으로 화답하기에 충분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에 그는 상당히 유명한 부흥사였고 저를 제외한 다른 분들은 그 설교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수시로 큰 웃음이 튀어나옵니다. 잠시 후 성도들을 울게 만듭니다. 아주 능수 능란 한 설교자였습니다. 그래서 담임목사님이 그를 초빙하였겠지요. 그 목사님은 사람들이 아무리 그 설교를 좋아하고 즐거워 하여도 “열매”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 말씀에 함께 하시지 않으면 “단 한 말씀도” 영적 양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모든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주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땀을 있는 대로 다 흘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비난과 핍박을 당하였다고 해서 반드시 어떤 열매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열매라는 것은 “어떤 결과”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일이든 결과는 반드시 나타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결과물이 아니라 <영적 유익으로서> 영혼이 살고 힘을 얻는 그런 열매를 말합니다. 눈앞에 거대한 결과물이 있어도 그것은 영적 유익과 무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영적인 면에서 그 열매가 익기 전에 떨어질 수도 있고 아예 생겨 나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많이 투자하고 애를 써도 그럴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답게 말하고 알하라

베드로는 지금 그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벧전 4:10,1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성도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봉사를 하려면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 하라>. 그리고 11절에 말을 이어갑니다. “누가 말을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일) 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위의 문장에서 “— 같이 (as, 헬, hos)”라는 말을 좀 살펴봐야 합니다. ‘같이”라는 말이 자칫 사려 깊지 않은 자들에게 오해될 수 있습니다. “— 같이”라는 말은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그와 유사하게>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장로가 없는 교회에 신실한 일꾼이 있다고 합시다. 그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장로는 아직 아니지만 장로처럼(같이) 말도 하고 봉사 하라” 또 어떤 사람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니지만(법적으로) 아버지같이 해 달라.” 지금 베드로는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같이”는 다른 말로 바꾸면 “—답게”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배우가 연기하듯 그렇게 마치 진짜 같이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런 위치에 있는 자로서 그 직분을 맡은자 답게 하라는 뜻입니다. 군인이 되었으나 아직도 ‘사회의 물’이 빠지지 않은 자’에게 “군인 답게 말하고 행할 것”을 주문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장로가 되었으나 장로가 갖추어야 할 것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자에게 “장로 다운 말과 행동”을 요구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이미 성도의 자격을 얻고 그렇게 불리는 자들에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도 답게 말하고, 성도 답게 봉사 하라.”

다시 베드로의 말로 돌아갑니다. “말을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 답게 하라, 봉사 하려면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는 사람답게 봉사 하라"라는 것입니다. 아 말씀에는 이미 이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잘 드러나도록 하라"라는 뜻입니다. 그저 “말할 때 좀 더 부드럽고 친절하게, 봉사할 때는 좀 더 열심히 .. “ 그런 말이 아닙니다. 이미 내 안에 함께 하시고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잘 나타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성도 다우려면

진실로 거듭난 것이 확실한 사람을 “성도”라고 말합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 중 교회에 매우 우호적인 사람이나 거의 기독교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성도 즉,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게 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도는 성령께서 내주하시고 또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입니다. 성도 중에는 교리적으로 무지하여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모르는 분들도 있습니다. 거듭난 성도가 되려면 (우리가 잘 모르는 사이에 이미 일어나는 일이 있는데)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그 대속으로 인하여 죄 사함을 받은 자에게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 사람이 연합됩니다. 그래서 예수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고 예수의 부활하심이 내게 부활, 영생이 나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은 사람은 결코 진정한 의미에서 성도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성도에게는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그런 사람답게 말하고 봉사하여야”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나”는 죽고 “나를 통해 성령이 일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다음 몇 가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겸손

첫째, 겸손해져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겸손이란 “나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나는 아무 것도 못 합니다”가 아닙니다. 만약 목사가 강단에 서서 “저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아무 것도 못 합니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강단에 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고 할 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은혜가 아니면 나의 말은 울리는 꽹과리입니다”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비록 달변으로 사람들을 웃길 수 있고 울릴 수 있지만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어떤 영적인 열매도 맺을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내가 만일 산을 들어 옮길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사람들이 놀래 자빠지고 마치 나를 하나님처럼 받든다 하더라도 ‘은혜’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성한 무화과이지만 열매 없는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산상보훈을 시작하시면서 첫마디가 “심령이 가난한 자가 행복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복은 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으면 그 복의 입구에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여기서 “가난”이란 말 앞에 정관사가 붙으면 (the poor) “거지 혹은 걸인”과 같은 말이 됩니다. 구걸하는 대상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 만 벌리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이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 오늘도 굶어야 됩니다. 그러니 제발 … !” 하나님 앞에 이런 낮은 자세를 취하는 것이 복의 시작이고 그것이 겸손한 것입니다. 이를 적극적인 면으로 표하면 “주께서 주시면 할 수 있습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말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바울의 말로서 이것은 자신만만한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지극히 심령이 가난한 자의 말입니다.

그런 사람은 애통합니다. 평생 ‘갑’질 한 번 해 본일이 없는 ‘을’로 살아온 서러움 때문에 애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초라한 실체를 발견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최선을 다해도 여전히 부족한 죄인 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말 이전에, 행동 이전에 모든 사고방식이 죄스러운 나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안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온유해집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 앞에 전적으로 순종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이 마침내 “의에 주리고 목말라”합니다.” 그가 무엇을 하든 그 동기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의”라는 간판을 내 걸지만 사실상 그 안에서는 자신을 숭배하는 죄인의 영역을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른 말, 의로운 말속에 감추어져 있는 무시무시한 비수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헌신의 가면 뒤 봉사 안에 들어있는 자기 숭배라는 가증스러운 것들을 몰래 들여다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명의를 빌려서 악한 일에 투기하는 자들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런 사람을 찾아보려고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바로 내 속에 있습니다. 왜 그렇게 우리의 주변에서 악한 분쟁이 끊이지를 않습니까? 아무 것도 안 하면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무 말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말만 하면, 일만 하면 지옥의 불길 같은 분쟁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성도 답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

둘째, 겸손한 사람은 기도합니다. 지금 저는 모든 성들이 다 알고 있는 뻔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뻔한 것들이 실제로는 나와는 먼 거리에 있는 장식장 안에 전시되어 있는 경우가 흔합니다. 이 세상에서 기도하지 않아도 될 사람은 단 한 분입니다.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보다 기도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이미 가지고 계신 능력을 쓰기만 해도 결코 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왕을 삼겠다고 잦아 다닐 때 그 기분에 들떠서 일에 파묻힌 것이 아니라 그들을 피하여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도의 인물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공통점은 은혜를 아는 자 들입니다. 앞에 언급 했던 것처럼 “반 말씀이라도 좋사오니”라고 기도 하였던 목사님이 또 생각납니다. 한 시간 넘게 수많은 말을 하였지만 은혜가 아니면 그 수백 마디의 말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분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창 4:26에 셋의 후예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부르다”는 것은 전 인격으로 주를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곧 기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분명히 기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졌다는 의미로 쓰이는 말입니다 (창 4:26; 12:9; 26:25).

그들의 후예들과 이보다 먼저 소개한 "부르짖을 줄 모르는" 가인의 후예들을 비교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가인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나 ‘놋’에 거하였습니다. 놋이란 지명(地名)인데 그 뜻은 “너무 딱딱해서 아무리 심어도 아무 것도 나지 않는다(4:16)”입니다. 이랏은 도망자라는 뜻입니다. 무엇 때문인지 평생 도망 다녔습니다(18). 저주스러운 이름입니다. 므후야엘은 “쓸어버리다, 지워버리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므두사엘은 “지옥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18). 부모가 지은 이름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에게 그들은 이런 이름으로 알려졌을 것입니다.

​도대체 그들의 삶이 얼마나 저주스러우면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요?

그러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셋의 후예들을 보십시오. 에노스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인간은 연약하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울한 분위기의 말이 아니라 이름에 벌써 은혜가 들어 있습니다(창 5:9). 그 후 마할랄렐은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말입니다 (12). 므두셀라는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는 뜻으로(22) 이미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읽어내고 있습니다. 오 ! 복된 사람들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거듭남의 구원도 구원이지만 이 죄악 세상 속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시기 때문에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무당들은 자신이 섬기는 신을 부르는데 온 갓 짓을 다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께 마음을 열고 은혜를 구하면 됩니다. 솔로몬은 본래 영특하였는지 어쩐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르짖었더니 그 놀라운 지혜가 주어졌습니다. 그 유명한 명 재판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솔로몬을 통해 나온 것이지만 솔로몬의 것이 나온 것이 아닙니다. 골리앗을 쓰러트린 것은 사실 다윗이라기 보다 하나님이 하신 것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겸손이 없는 심령의 기도는 성경이 말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알라딘의 마술램프에서 요정을 불러내는 것이나 도깨비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들이게 있어서 하나님은 항상 “보조”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아는 사람들은 어떤 벽을 만날 때 그것을 넘기 위해 혹은 보다 쉽게 넘기 위하여 인간 이상의 힘을 발휘하기를 원합니다. 이때 하나님을 부릅니다. 겸손을 가장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는 그래야 통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이 여전히 왕좌에 있고 하나님은 그 우편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뀌어야 합니다. 겸손의 참 의미는 나의 왕좌에서 내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전심으로 주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은혜 주시지 않으면 내가 잘 하는 어떤 것조차도 열매 없는 무화과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부르짖음은 하나님을 아는 겸손한 자의 공통점입니다.

성령의 열매

셋째, 성령께서 하시는 일임으로 그 과정이나 결과에는 성령의 열매가 필연적으로 맺히는데 그것이 내 삶 속에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열매”라는 표현은 그 과정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마침내 다 드러나는 어떤 것”을 말하겠지요. 많은 분들이 갈 5;22를 외웁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선을 베풂), 충성, 온유, 절제>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무엇을 하든 그 내면을 ‘점검’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악한 동기에서 나온 것, 욕심으로 하는 일, 자신은 교회와 성도를 위하여 하는 것이라 하지만 사실은 그저 심술부리는 것과 같은 것은 이것들과 반대의 열매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냅니다. 자기 스스로 많은 열매가 있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그 열매에 성령의 열매가 있는지, 얼마나 들어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갈 5:22,23에 언급한 성령의 열매 들은 대부분 <참는 것>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억을 함을 참고, 회를 참아 넘기는, 단지 그런 것이 아니라 참음은 “오랫동안 지속되는 신령하고 선한 꾸준함” 혹은 “변덕스럽지 않은 것”인데 우리는 이런 것을 신실(信實)이라고 합니다. 성경에 가끔 “미쁘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같은 의미입니다. 처음과 끝이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의 일을 하다 보면 신령하고 거룩한 동기에 비롯된 것이지만 그것이 어떤 자극에 의하여 도중에 그것이 굴절 되기도 합니다. 갑자기 본전 생각이 나고, 일하는 것만큼의 사람들의 인정이 따르지 않을 때 쉽게 지칩니다. 그러면 그것을 지속할 수 없는 이유들이 생각나기 시작합니다. 스스로 그렇게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정교화 하여 스스로 설득합니다. 그래서 멈추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일 하신다면 당연히 그 속에는 이 열매가 보여야 합니다. 주의 일을 하고서 비참해지는 일이 있을까요? 절대 없을 것입니다. 주의 일로 인하여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 심령에는 희락이 있을 것입니다. 주의 일을 하는 자가 충성 대신 배신을 일삼을 수 있을까요? 주의 일에는 내면적 화평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종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온유함입니다. 이것은 물러 터졌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뜻대로 펴졌다가 접어졌다가 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자들은 의를 위한 비상한 절제가 있습니다.

마치는 말

주의 일을 하는 자들은 “주의 일을 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다답게” 일하여야 합니다. 비슷하게 혹은 그럴듯하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았으니 은혜받은 다답게”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매일 듣는 뻔한 잔소리 같은 것이지만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겸손하게 만들어 주시겠지만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는 것같이’ 겸손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 심령은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고 부르짖게 됩니다. 그러면 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수시로 성령의 열매가 있는지 스스로 관찰하시면서 주의 일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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