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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청지기


교회에서는 연초가 되면 봉사자 혹은 직분자, 청지기 헌신예배나 세미나 등을 합니다. 올해도 이런 요청이 있어 몇 교회를 다녀왔습니다. 지금까지 꽤 오랫동안 목회를 하면서 "헌신"에 관한 설교를 수없이 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창 24장에 있는 엘리에셀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즐거우면서도 갈수록 더 깊은 의미가 배어 나오고 있습니다. 주께 좀 더 분명한 헌신을 하고자 하는 분은 반드시 이 내용을 마음에 간직하고 계시기를 바랍니다.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의 종이긴 하나 아들 같은 종이었습니다(창 17:1). 만약 아브라함이 아들을 얻지 못하였다면 그가 상속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아브라함과 동행 하면서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충분히 읽어낼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기적으로 이삭이 태어나고 이제 결혼을 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결혼 배우자를 아버지가 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배우자를 맞기 위하여 엘리에셀을 고향 땅으로 보냅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그가 살고 있던 가나안 땅의 젊은 여성은 마음에 들지 않았던가 봅니다. 짐작 가는 바가 있습니다. 엘리에셀은 이 지시를 받고 이제 아브라함의 고향으로 떠날 차비를 합니다.

엘리에셀이 하나님을 보는 법을 배움

이 지시를 받은 엘리에셀은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하기 위하여 생각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질문합니다. 당시 아브라함의 고향은 사대 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입니다. 그러나 현재 그가 살고 있는 곳은 가나안의 최 남단 브엘셰바입니다. 매우 낙후된 곳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시골에 불과합니다. 번화한 도시의 처녀가 이런 시골구석으로 오려고 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주인님, 좋은 처녀를 구하였는데 만약 그 여자가 이리 오지 않으려고 하면 아드님을 그곳으로 데려갈까요?" 엘리에셀은 그렇게 될 확률이 비교적 높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이 글을 보거나 이런 내용의 설교를 듣는 자들이 이 구절을 외우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셨다. 그럴 때마다 그의 사자를 나보다 앞서 보내셨다. 그러니 그런 걱정 하지 말고 가거라." 창 24;7입니다. 특히 아브라함은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물로 드리려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당신이 직접 예비하신 어린 양을 보이시고 그것으로 "대신하여" 번제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여호와 이레"는 머리로만 아는 지식이 아니라 뼛속으로 혹은 혈관 속에 들어 있는 살아있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에 따라 부름을 받고 아브라함은 가나안의 브엘셰바까지 왔습니다. 그 깊으신 뜻의 모든 면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이제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럽고 장엄한 뜻을 이루어 가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 일은 아브라함 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씨(단수, 갈 3;16)"로 인하여 아브람(한 부족의 조상)이 아브라함(열국의 조상이 되는 때까지 계속되는 일입니다. 따라서 아들 이삭이 그곳을 떠나 아브라함의 고향으로 가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엘리에셀과 같은 오늘날의 청지기 들은 섬김의 주체이신 하나님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그 종들보다 사자를 앞서 보내시어 모든 것을 준비하십니다. "첩경을 평탄케 하라"라는 말씀처럼 너무 깊은 곳은 메우고 또 너무 높은 곳은 깎아서 우리가 갈 수 있도록 하십니다. 때로 우리는 너무 높은 곳을 힘겹게 오를 수도 있고 또 너무 깊은 곳을 건너야 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는 길을 평탄하게 하신다는 말이 믿기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힘이 좀 든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렇게 준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느 길이든지 "갈 수 있다"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믿음의 근거는 자신의 기술이나 건강 상태나 혹은 의지력 같은 것이 아니라 "나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비록 힘겹기는 하나 내가 갈 수 있도록 조치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가끔 선교사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 대부분은 그 낯 선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인도 하셨는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 두셨는지를 간증합니다.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맨땅에 헤딩"했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참으로 척박한 조건 속에서 무엇을 일으키는 사역은 매우 고생스러웠을 것입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그가 조금 더 믿음의 눈으로 주변을 관찰 하였더라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종들을 부르시거나 보내실 경우 "맨땅에 헤딩"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항상 그 사자를 먼저 보내시어 "예비"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본래 계획에 없던 빌립보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아시아 전도 계획을 세웠었습니다. 워낙 현명한 사람이라 무 계획한 것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나름대로 그 지역을 선택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어떤 계획이 그 머릿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전혀 예상치 않았던 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이끌림을 받아 도착하여 살펴보았더니 "자주 장사 루디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무엇이 쉽게 풀렸다는 말이 아니라 비록 어렵지만 "충분히 사역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예비된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청지기 들은 항상 이것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자수성가 하듯 어떤 일을 이루었다고 해서 자신의 의지나 능력을 지나치게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씨를 뿌려 열매를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절히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 한 것입니다. 새가 이침 일찍 일어나 어디론가 날아갑니다. 그러면 거기 어디서 먹이를 찾습니다. 하나님께서 거기 두신 것입니다. 새가 얼마나 열심히 날아다녔는가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거기에 그것을 두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한 청지기들은 마치 맨땅에 헤딩해야 하는 것과 같은 사명을 받아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 곳으로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이기는 하지만 충분히 준비된" 곳으로 보냄을 받는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엘리에셀은 사람보는 방법을 배움

이제 그 종은 출발하였습니다. 목적지까지는 대략 40일이 걸립니다. 그는 이 사명을 위하여 여러가지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곳에 가면 처녀들은 분명히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많은 처녀 중 누구를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후보가 한 둘이면 선택이 비교적 편합니다. 그러나 그곳에 처녀가 한둘이겠습니까? 선택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는 계속 기도 하면서 그 길을 간 것 같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이 주시는 빛이 그의 머리로 들어옵니다. "내가 물을 달라 할 때 내게도 물을 주고 또 <낙타에게도 물을 주겠다> 하면 그를 후보로 알겠습니다." 이것은 엘리에셀이 아무렇게나 골라 잡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하고 또 하고, 기도하고 또 하고 한 결과로 나온 것이 분명합니다.

창세기 기자는 이 사실을 비교적 길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22,23장 그리고 25,26장은 대부분 30절 안팎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24장은 70절 가까이 됩니다. 즉 다른 장보다 두 배가 많은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아브라함 며느리로 선택되는 과정을 이렇게 길게 설명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적어도 여기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의 기본적 됨됨이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지능지수 보다도, 열정 같은 것 보다, 혹은 외적 조건 같은 것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은 어떤 것인지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청지기로서 이런 점을 간과하면 그것은 마치 홈런을 치고도 첫째 베이스를 밟지 않고 홈으로 들어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 것도 아닐 수"있다는 것입니다.

나그네에게 물을 주는 것과 또 낙타에게 물을 주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겠습니까?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다음 두 가지는 확실합니다. 첫째는 열려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낙타에게 물을 주는 과정을 통해 그의 신실함(처음과 나중이 다르지 않음)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를 좀 더 깊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열려있는 자 곧, 필요한 자에게 이웃이 되어 주는 자입니다. 여러분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알 아실 것입니다(눅10:25-37). 어떤 율법사가 예수께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는가 질문하였습니다. 모든 질문이 그렇듯이 단순히 알고 싶어서 하는 것도 있지만 상대를 시험해보기도 하고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도 있습니다. 이 율법사는 예수님을 시험하여 교리적인 오류를 발견해 보려고 한 것입니다. 그 답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율법사는 계속 묻습니다. "그렇다면 이웃은 누구입니까?" 당시에는 이웃과 원수, 우군과 아군을 구분하는 것이 생존 기술 중 하나였습니다. 원수가 이웃으로 가장하여 멸망시키려 접근하는 예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율법사가 이해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을 가려서 만나지 않으셨습니다. 이방인은 물론이고 율법적으로 정죄된 죄인, 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만나지 말아야 할 계층의 사람들을 전혀 가리지 않고 만나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나온 것입니다.

주께서는 이 때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비유를 잘 보시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특징이 보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필요한 것을 다 채워주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에 비하여 단연 돋보입니다. 이 비유를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인지 정답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맨 마지막 마무리를 이렇게 하셨습니다. "너도 가서 이렇게 하라!" 주님은 진정한 이웃의 표상을 말씀하시고 나서 "누가 나의 이웃인지를 질문 하는 것보다 네가 필요한 자에게 이웃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공생애 동안 이를 끊임없이 실천하신 분입니다.

다시 엘리에셀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물을 달라 할 때 나는 물론이고 낙타에게까지 물을 주는 자"는 바로 이런 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은 앉아서 기다리거나 받는 것이 아니라 "가서 주는 특징"이 있습니다. 열린자 즉 기꺼이 이웃이 되고자 하는 자라야 이것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엘리에셀은 그런 사람을 찾겠다고 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응답하셨습니다.

어떤 처녀가 우물로 나왔습니다. 엘리에셀이 생각하였던 대로 말했습니다. 그 여자 역시 엘리에셀이 기대한 대로 말하였습니다. 기꺼이 물을 주면서 "당신의 낙타에게도 물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마치 누가 써 준 대본을 읽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는 우물로 내려가 물을 길어 낙타가 먹을 수 있는 구유에 붓기 시작하였습니다(24:19-20). 엘리에셀은 그 여자를 "주목"하여 보았습니다(21). 무엇을 "주목"하였을까요?

둘째, 그가 보는 것은 "신실함"이었을 것입니다. 낙타는 일주일 이상 물을 먹지 않아도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막에서 유용하게 쓰이는 동물입니다. 그런데 몸집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한 마리가 50-100 리터의 물을 마신다고 합니다. 24:10에는 엘리에셀이 이곳에 갈 때 이미 낙타 열 마리를 가져 갔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신부 집에 주는 지참금일 것입니다. 물물 교환 하듯 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보험금과 같은 성격으로 신부의 집에 주는 것입니다. 이 열 마리의 낙타에게 물을 주려면 500-1000 리터의 물이 필요합니다. 그 지방에서 발견되는 우물들을 보면 대부분 오염 방지를 위하여 낮은 곳에 위치합니다. 물을 길으려면 가파른 길을 내려 갔다가 물동이를 들고 다시 올라와야 합니다.

여성들이 어깨에 매고 다니는 물동이는 20 리터 안 팎의 물을 담을 수 있습니다. 옛날에 우리가 사용하던 양동이(바께츠)도 대충 그런 정도의 용량입니다. 가볍지 않습니다. 가게에 가면 2 리터 (큰 대포알처럼 생긴 물병) 6개를 한 팩으로 한 것이 많이 보입니다. 여성들이 이것을 들어 옮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 여자가 들고 다니는 물동이는 2 리터 물병 10개와 맞먹는 무게입니다. 낙타 열 마리에게 물을 마시게 하려면 그 여자는 우물에 내려갔다 올라오는 일을 대략 50 번을 반복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조금 더 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40 일 정도 광야나 사막 지역을 지나 가려면 먹을 것, 마실 것, 또 밤을 지내야 하는 장비 등이 필요합니다. 거기에다 갑자기 달려드는 강도들을 막으려면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이래저래 이런 일에 필요한 사람이 70 여명이라고 합니다. 야곱의 가족이 요셉이 있던 애굽에 내려갈 때 70 명이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가장 작은 집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60 만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예비적 진술입니다. 다시 말해서 에리에셀에게는 지참금으로 보이는 낙타 열 마리 외에 또 다른 낙타들이 분명히 있었다는 것입니다. 몇 마리인지는 모르지만 여러가지 장비와 식량을 생각하면 이것 역시 10 마리는 되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그렇다면 이 여자는 우물에 내려가 물을 길어 그 항아리를 들고 올라와 구유에 물을 붓는 일을 대략 100 번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엘리에셀이 그 모습을 "주목"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눈이 예리하다면 이 가운데서 많은 것을 읽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과 같이 여행을 가보거나 아니면 극한적인 상황에 부딪치면 그 특정인의 진가를 알 수 있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엘리에셀이 어떤 면을 주로 보았는지 또 거기서 어떤 것들을 읽어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합니다. "처음과 끝이 다르지 않은 일관되고 신실한 자세"는 가장 중요한 관찰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기분에 따라 낙타에게 물을 주겠다고 하였으나 수 차례 반복되는 힘든 물 깃는 작업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 이상 못하겠다던가 아니면 얼굴을 찡그리며 투덜대었다면 ...? 처음에는 물동이에 물을 꽉 채워서 오다가 갈 수록 물을 덜 채웠다면 ..? 중간에 어디로 사라져 버렸다면 ..? 물론 물동이의 무게 때문에 허리도 펴고 잠깐 쉬기도 했겠지만 시작과 다르지 않은 자세의 일관성을 높게 보았을 것입니다. 그의 기능이 아니라 됨됨이가 주목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마치 "아무 것도 아닌 사람처럼" "아무런 권리도 없는 사람처럼," 전혀 그럴 필요도 없는데 한 나그네를 앞에서 그의 필요를 채워주는 헌신적 자세를 보면서 엘리에셀은 "하나님께서 순적하게 주인의 며느리 감을 만나게 해 주신 것에 감사"드렸습니다. 이런 해석은 좀 무리가 있습니다. 객관적인 사실보다는 해석자의 상상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근거 없는 상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부르실 때 혹은 어떤 일에 사용하실 때 가장 중요하게 보시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마치 아무도 아닌 것같은 자세"입니다. 이미 부르신 사람을 더 중요한 일에 쓰실 때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 하신 후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모세의 예입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가운데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애굽에서 동족을 구하여야 하는 때가 되가 되었을 때 미디안 광야에서 살라지지 않는 불 붙은 떨기나무를 보게 됩니다(출 3장). 그는 애굽에서 최고의 학문을 두루 섭렵한 사람입니다. 모세 당시에 이미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에는 세계 여러나라에서 유학생들이 와 있었습니다. 특히 모세는 잘 하면 차기 바로가 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모세와 비슷한 시기의 바로의 이름들을 보십시오. 아모세, 투트모세 ..등의 이름에서 보듯 "모세"가 들어있습니다. 이 이름은 히브리 식으로는 "건짐(구원)을 받은 자"이지만 애굽의 이름으로는 "건진다"는 의미를 가진 왕권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불타는 그러나 살라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본 모세,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방식으로 그에게 사명을 주실까요? 모세는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그 수수께끼를 풀려고 했을 것입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지만 스스로에게 그것을 설명하려고 헸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총동원하여도 그것을 할 수 없었습니다. 불 붙은 떨기 나무는 환상을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현실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네 신을 벗으라!" 여러분은 이력서를 써 보셨을 것입니다. '이력'이란 발자국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어도 모세는 자신의 이력이 이런 경우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광야 생활 하는 동안 많이 낮아졌겠지만 모세는 더 낮아져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아닌 존재"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비하시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 은혜>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자라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때부터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통해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가장 눈에 뜨이는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께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를 따르기 바로 전 그에게도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갈릴리에서 뼈가 자린 자입니다. 그러나 그 날 따라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으나 고기를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말씀하신대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습니다. 그가 잡는 고기는 무쉬트라고 해서 수심이 비교적 얕은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깊은 곳에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도 그것을 살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입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일을 맡기셨습니다.

결론

주의 일을 맡은 자에게 요구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자가 항상 앞서 행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살아온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충 어떤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짐작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상상이나 짐작이 거의 맞아들어간 적이 있더라도 그것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보다 먼저 사자를 보내시어 준비하시는 분입니다.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또 우리는 기능보다 됨됨이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필요한 자에게 기꺼이 이웃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니의 은혜를 아는 자는 자신이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헤가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지식과 능력은 그 분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정말 별 것 아닙니다. 따라서 순종하여야 합니다. 헌신에 관한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나오는 말씀이지만 얼마나 자주 잊어버리는지 모릅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복을 받듯이 가난해야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영광을 얻습니다. 많은 생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올 한해도 낭비 없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바쁘게 산다고 낭비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이웃과 하나님을 향한 기본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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