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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육신이 되어


2018년 성탄절에

요1:1-18, 말씀이 육신이 되어

복음서에는 일제히 예수 탄생에 대한 말씀을 기록함으로 그들의 메세이지를 시작합니다. 오늘은 특히 요한이 말하는 예수 탄생과 관련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서론이란 단순히 좀 더 매끄럽게 본론으로 이끌어가는 목적을 가지기는 하지만 그 의미가 본론 보다 약한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이 서론 안에 그 뒤에 말하는 기다란 본론이 충분히 암시적이거나 명시적으로 농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본론은 이 “서론의 상세화” 작업이며 “증명”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은 요한 복음의 서론적 성격이 있으나 가장 중요한 골자가 들어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한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1)” 마치 창세기가 시작되는 부분과 흡사합니다. 여기서 “말씀”이란 우리가 잘 아는 “로고스(logos)”입니다. 헬라어입니다. 로고스란 “말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헬라 철학자들이 즐겨 쓰던 말로서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경에서 히브리어 “다바르(말씀, dabar)”를 이 말로 번역 하였는데 요한이 이 말을 그대로 사용한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왕의 권한은 막강하였습니다. 왕권(王權)이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권세입니다. 왕이 보좌에 앉아서 그 나라의 저 끝 어느 지역에 “성을 건축 하라”고 “말씀”하시면 얼마 후 성이 건축됩니다. 어떤 죄인을 사면 하라고 “말씀” 하면 그 죄인은 사면을 받습니다. 왕이 말씀 하는 대로 됩니다. “말씀, 말씀 하시다”는 이런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영역 안에 있는 모든 것에서 그 뜻이 이루어집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실현시키는 것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 말씀을 로고스라는 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단순히 의사 소통을 위한 기호가 아니라 “뜻의 실현”을 말합니다.

로고스를 간단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요약된 형태로 말 해본다면 철학 자들에게는 “우주 만물을 생성시키고 그것을 유지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 혹은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로고스(말씀)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셨는데 “그것”이 아니라 “그 분”이 이제부터 요한이 증거 하려는 바로 그 ‘부활하신 예수’라는 것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참 생명”과 “참 빛”은 요한이 매우 강조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든 우주의 생명은 그 안에서 시작되고 유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결코 여기까지 밝혀낼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영원한 비밀로 남아있는 그것을 요한은 “그 생명은 바로 그 로고스 안에, 로고스를 통해 분여 되는 것”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모든 인류에게 “빛”이라 말씀합니다. 물리적 의미에서 조도(照度)를 측정할 수 있는 그런 빛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무지”를 밝히는 빛을 말하는 것입니다.

빛 들과 참 빛

“참 빛”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그 동안 참 빛이 아닌 것이 참 빛인 것같이 보였다고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루터교의 스위감이라는 지도자가 만든 벧엘성서교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의 신약 부분 시작에 “왜 하나님께서 그 때, 그곳에 성자 하나님 예수를 보내셨는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특히 그 “때”에 대한 언급은 이렇습니다. 예수 이전에 나름대로 빛이라고 하던 것이 있었으나 그것이 인류의 삶에 근본적인 어떤 선한 영향을 주지 못하였는데 그것이 외형적으로는 대단한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된 후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로부터 나오는 것에 대하여 더 이상의 기대하지 않게 되었을 때에 주께서 오셨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 시대로부터 약 500년 전에 인도에서 석가세존, 고타마 싯달타라는 분이 큰 깨달음을 얻었는데 그것이 우리가 아는 불교의 시작입니다. 그 이전에 브라만(Braman) 교가 있었으나 불교에 종사하는 분들은 불교가 브라만에 뿌리를 둔 것임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다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석가모니는 인간의 모든 문제와 불행은 집착에서 오는 것으로 이를 해탈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사제팔정도(四諦八正道)를 원리로 하여 불타(佛陀. 해탈한 자, 부처와 같은 말)가 되는 법을 제시하였고 이것은 당시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습니다. 그 가르침의 철학적 심오함으로 인하여 이것은 오늘 날 까지도 많은 추종자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류의 삶에 새로운 장을 열지 못하였습니다.

한편 인간의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던 헬라 철학이 예수께서 오시기 전 이미 꽃을 피웠습니다. 인간의 이성이 이렇게까지 훌륭하리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면으로 새로운 빛을 비추었습니다. 소크라테스와 그의 뒤를 이은 플라톤(428-347 BC), 그리고 철학의 기반을 놓은 놀라운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384-322 BC)의 찬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은 영적으로 어두움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 들 뿐 아니라 유대 사회와 그 주변의 현자(賢者)들에 의하여 제시된 인간 세상의 문제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답 들이 있었으나 여전히 세상은 어두움에서 헤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죄”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건너 뛰면 그 뒤의 어떤 것도 무의미합니다. 마치 야구 게임에서 첫 번째 베이스를 밟지 않고 홈으로 들어온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전의 이런 빛들이 무엇이 잘못된 것이고 부족한 것인지 정확히 파악은 할 수 없었지만 그것으로 참된 삶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체감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빛 들의 한계가 너무도 선명 하였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로고스 안에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은 또 하나 새롭게 등장한 빛이 아니라 “참 빛(9)”이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도 이 참 빛을 만나기 전 다른 빛 들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런 빛 안에 만족하고 안주할 수가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요1:14, 사람들은 그 빛을 거부 하였으나 “우리가 보니”라고 말함으로 하나님께서 새로운 생명을 주신 사람들을 “우리”라고 일컫고 있음). 이제 “우리”는 그 빛을 통해서 “나에게” 혹은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빛이 내 안에 있는 어두움을 밝혀줌으로 인하여 참으로 뼈 속 깊이 숨어있는 죄를 보게 되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게 하는 빛이 비추어지면 그것부터 시작됩니다. 그런 일을 통해 하나님 앞에 고개 들 수 없는 사람으로 엎드리게 되지만 그 참 빛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세계를 알게 되고 또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거하시매”

요한은 그 <참 빛> 즉, 로고스가 육신으로 세상에 오셨다고 말합니다. 당시 헬라 철학에 강한 영향을 받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메세이지 입니다. 시대적 흐름(물결, wave)은 거의 예외적 인물을 남겨두지 않고 쓸어갑니다. 철학자 이름 하나 모르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런 사상과 논리에 “모두” 영향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매우 심취하여 앞서가고 또 어떤 사람은 좀 뒤에 서서 비판하면서도 그 흐름을 따르게 됩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최고의 선으로서)이 죄악 된 몸, 혹은 죄에 쉽게 영향을 받는 몸(헬, sarks, 육체)을 입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며 신성모독에 가까운 말로 생각 하였습니다. 초대 기독교의 이단들의 대부분은 이런 문제로 생겨난 것들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은 어쩌다 일어난 돌발적인 사태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시대가 요구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급조하신 것이거나 그런 필요에 따라 신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이론이 아닙니다. 구약의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그렇게 예언 하셨던 일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을 시도하다가 여의치 않으면 방향을 수정하고 그것에 적합한 후속 조치를 내는 식으로 이루지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런 것을 “예정”이라는 용어로 함축하여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 때 그 때 어떤 해결 책들이 후속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하여 계획된 것이고 그것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이 그 예정의 핵심입니다.

요한은 그 분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14)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거하신다(dwell)”은 헬라어로 “스케노우(skenow)”라는 동사입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천막을 친다” 는 뜻입니다. 이를 의역한 것이 ‘거한다’입니다. 이것은 이미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계속 말씀하신 것의 온전한 성취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한 단어입니다. 출애굽 후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만 주신 것이 아니라 성막의 식양(式樣)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의 텐트와 같은 모양으로 하나님의 텐트가 세워졌습니다. 이를 다른 텐트와 구별하기 위하여 성막 (聖幕, tabernacle)이라 하였습니다. 그 텐트는 시내산에서 보여주신 그 식양 대로 지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임마누엘”이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장막 속에) 거하신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제 그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땅을 주신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따라서 더 이상 이동식 텐트가 아닌 붙박이 건물인 성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성전을 지으려고 많은 준비를 하였으나 그 시대에 허락되지 않고 솔로몬 시대에 이것이 이루어집니다. 솔로몬 성전이 무너진 후 학개 선지자 시대에 스룹바벨이 이를 재건하여 스룹바벨 성전이란 이름이 부여 되었고 이것을 후에 헤롯이 40 여 년에 걸쳐 재건하여 헤롯 성전이라는 이름이 생겼습니다. 예수님 당시 성전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 성전의 참 뜻이 왜곡 된 채로 사람들에게 인식 되었습니다. 성막, 성전은 그 말씀인 로고스가 육신으로 거하는(장막은 인간의 육신을 의미) 곳(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하나님은 저 하늘 높은 곳에서 말씀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대속(代贖)의 사역을 하실 것을 이렇게 예고 하셨고 그것은 성자이신 로고스가 육신으로 오심으로 완벽하게 성취된 것입니다. 성탄이란 이런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속 어떤 예표로 또 직접 말씀하신 것이 가시적인 방식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오늘날 성탄절에 이런 의미는 희석되고 산타클로스가 전면에 나타나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술에 놀아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런 의미를 되찾고 경건한 즐거움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진리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전능 하심, 그 분의 사랑과 긍휼, 인자와 자비를 찬양하는 날입니다. 성탄절을 맞는 “우리”의 기쁨은 이런 것이라야 합니다.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

예수라는 역사적인 인물이 팔레스타인의 나사렛에서 태여 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매우 독특한 사고 방식과 논리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이마저도 부인 하기도 하나 신경 쓸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 분을 영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보고 기적의 떡을 먹고, 문둥병자가 고침 받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을 본 사람들 조차도 “영접하지 않은 자”들이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을 대항하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구하려고 흉악범인 바라바를 내 세워 둘 중 하나 선택 하라고 했을 때, 그런 묘수에도 불구하고 바라바 같은 인간 대신에 예수를 못박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바라바의 이름을 불었던 군중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 오시던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를 외치던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여전히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호산나를 외치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성자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호산나를 외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를 영접 했다고 말하고 또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지만, 그러나 요한이 말하는 영접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영접 하기도 합니다. 예수께 혹은 기독교에 호의적이냐 아니냐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의미에서 영접하지 않았으나 기독교(혹은 교회)에 호의적인 사람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을 “믿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철이 들면서 “인간의 한계”라는 것을 느낍니다. 세상이 자기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또 자신이 원하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압니다. 그래서 “신(神)적 능력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예수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마치 좀 더 고상하고 경건한 차원의 도깨비 방망이나 알라딘의 마술램프 정도 수준으로 받아들입니다. 마술램프의 요정을 불러내는 자세로 주께 다가가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좀 더 낮은 자세로 탄원하는 자세를 취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주인(主人)인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들이 무릎을 꿇는 것은 자신이 더 이상 자신의 삶에 주인이기를 포기하는 행위가 아니라 “뭔가를 얻어내기 위한 하나의 제스츄어 일 뿐입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영접을 이런 식으로 이해할까봐 그런 것인지 그 뒤에 이런 말을 덧붙여 상세화 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자!” 영접이란 그 이름을 믿는 것이라고 못 박습니다. 다시 말해서 영접하되 어떻게 영접하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나의 삶은 여전히 내가 주도해 가면서 그 분을 돕는 자로 영접할 것인가(충분히 가능합니다), 아니면 나의 주(主, lord)로 영접할 것인가? 주(主, lord)는 문자 그대로 나의 주인이요 나아가서는 나의 삶의 주관자이신 왕(王)을 의미합니다. 이런 심각한 질문 안에서 그분을 “믿고” 나의 “생명의 주”로 영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름”이란 그 분의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 안에 있는 예수님의 인격 그 자체를 말합니다. 그 분은 지금까지 와서 빛이라 주장한 분들과 다른 존재입니다. 그것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믿어야” 합니다. 주님의 빛이란 어떤 행동이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인지를 가르쳐 주는 “계몽” 정도가 아니라 무시무시한 나의 죄 값을 주께서 대신 지불(대속, 代贖) 하셔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빛입니다. 몇가지 행실을 고치거나 개과천선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으로 가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가 있는 바로 “그 길(요14:6)”이 주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내가 천국의 삶을 살아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영원토록 마르지 않은 진리와 능력의 샘입니다. 그 분이 없이는 어떤 행복도 꿈조차 꿀 수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영접입니다. 주를 영접한 사람들은 “그 분이 나의 주라는 것을 시인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분 없이는 나의 삶을 계획 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이 영접에는 자신을 포기하는 억울 함 대신에 평화와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죄악으로 가득 차 있고, 그러므로 나의 독단적인 결단의 결과는 필연적으로 불행이며 멸망이라는 것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 죽음의 길을 벗어나는 길이“주”의 돌보심과 인도 안에 있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그 주님께 억지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그 분의 종(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소중한 자신의 삶을 주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입니다.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하러 온 구조대가 인도할 때 그것을 억지로 끌려가듯 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다

이렇게 주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는, 사실 뭘 잘 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권세란 권위와 힘을 말합니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정황 속에서는 이해가 잘 안 되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권세가 있다고 해서 아들이 자동적으로 권세가 생기지 않습니다. 자칫 하면 “갑 질” 시비에 걸립니다. 그러나 고대 시대에서는 종들의 위치에서 볼 때 주인의 아들은 주인입니다. 왕의 아들은 그 나름대로의 권세가 있습니다. 특히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왕인 경우가 많았습니다(co-regent). 아버지 왕이 죽고 난 후 세자로 책봉된 아들이 왕으로 등극하는 경우도 있지만 부왕이 죽기 전 아들을 왕으로 세워 아들 왕을 전쟁터에 내보내고 부왕은 국내의 정치를 담당하는 식입니다. 아들 왕이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면 돌아와 부왕의 보좌 우편에 앉습니다 (사도신경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다는 말과 같은 의미). 부왕의 권세가 위임되는 자리입니다.

자녀가 되는 권세는 일차적으로 위와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존재는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양자의 성격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권세를 위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왕의 아들의 권세를 받게 됩니다. 이런 것은 사람들이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만약 어떤 기업체의 사장이 되면, 스스로 사장 자리에 있기는 너무 부족하다고 느낀다 하더라도 여러분에게는 대표 이사가 갖는 권리와 책임이 자동으로 주어집니다. 대표이사로서 결정할 일 앞에서 “제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부족합니다, 못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바보 같은 짓입니다. 부족하다고 느낄수록 대표이사로서 권리와 책임을 정확히 파악하여 부족함이 없는 대표로 성장해 가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야 합니다.

필자가 처음 목사 안수를 받았을 때 누가 “목사님”이라고 부르면 매우 부담이 되었습니다. 설교 하면서도 그 서두에 자주 “부족하고 연약하고 아무 것도 모르는 종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저희 아버님께서 하루는 저에게 준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모르고 부족하면 목사 안수를 받지 말던가 아니면 강단에 서지 말아야지 …” 저는 그것이 겸손인 줄 알았으나 사실은 ‘바보 같은 짓’이었습니다. 겸손이란 어떤 면에서 자기를 낮추는 것이지만 그 낮춤은 “은혜 아니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 혹은 인정하는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주를 영접하신 것이 분명하다면 그 다음의 사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과 동시에 그 자녀의 권세가 주어졌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이것 역시 느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에게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말해야 합니다. 말씀이 감정보다 중요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내게이런 권세가 주어졌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너무 부담스러워 감추고 싶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자신에게 계속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한 앗사리온에 두 세 마리가 팔리는 참새보다 귀한 존재임을 믿어야 합니다. 나는 들에 핀 백합화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이 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도 모든 인간은 꽃보다 아름답고 모든 피조물보다 존귀합니다. 그 중에 하나님의 자녀는 더욱 더 존귀합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여 무엇을 이룰 수 있는 놀라운 권세를 얻었습니다.”

자녀들에게 주신 특권 – 특별한 보호와 인도를 받음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은 모든 것 보다 귀한 가치가 있습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결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는 그 구원을 얻은 자가 그 아들의 피를 주고 바꾸어도 될 정도로 귀합니다. 세상 풍파에 이리저리 당하고 사는 것 같아도 그것은 사람들의 느낌일 뿐 “귀하고 귀한 존재를 아무렇게나 굴리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철저한 보호가 따릅니다. 아버지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 권세 즉 특권이 있습니다. 신33:24-28은 아셀지파에 대한 모세의 축복입니다. 그 중에 특히 27절에는 “하나님의 손이 그 아래에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그들의 아래에 있다는 것은 혹 떨어지는 일이 있어도, 나빠지는 일이 있어도 더 이상은 떨어지지 않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끝없이 하락하는 느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끔 사람들은 자신의 불행에 관하여 “밑바닥을 쳤다”는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자기 연민에서 나오는 감정일 뿐 실제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은 그 밑바닥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주를 영접한 자에게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생각보다 너무 내려 간 적이 있다는 표현 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 하나님의 자녀를 밑바닥까지 끌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 권세가 자녀들에게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를 받는 권세가 있습니다. 의의 길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이 일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이 내게 협조하도록 하십니다. 의의 길은 우리들에게 익숙하지 않습니다. 잘 맞지 않는 옷이나 신발처럼 어색하고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생명의 길이고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길입니다. 이 길로 순전히 자발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그래야 의의 길이 보이고 그 길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어떤 아픔이 동반 될 수 있습니다. 놀랄 수 밖에 없는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를 지나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뭔가 보호받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그렇게 느껴질 뿐입니다. 이런 일들은 최고의 목자이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에는 “하나님의 자녀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이 임하고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가 임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세상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을 언급하실 때 가장 많이 쓰시는 표현이 “아버지”라는 말씀, 그리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것 등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에게 하신 것 같이 그 자녀들에게 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창12:1-3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십니다. "땅을 줄 것이다", "많은 자손을 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너에게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줄 것이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할 것이다”입니다. 저는 30년 넘게 목회를 하다가 은퇴하였습니다. 그 동안 수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고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하신다.. “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를 바로가 탐을 냈습니다.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목숨이나 살자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정말로 한 것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애굽에 벌을 가하시고 그들이 그것의 이유를 눈치채게 하심으로 많은 재물과 함께 사래를 돌려 보냈습니다. 그랄이라는 곳에서도 같은 일이 발생합니다. 속수무책인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이렇게 도우셨습니다. 이삭 때도 거의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그곳의 모든 생명체의 태를 닫아버리셨습니다. 이들이 그 원인을 알고 일개 조그마한 부족의 부족장인 이삭에게 그곳의 왕이 나와 사과를 하고, 이삭이 “그들을 축복하자” 태가 열렸습니다. 그들은 이삭을 선지자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외삼촌 집에서 20년을 살면서 말도 안 되는 부당한 대우를 받습니다. 나중에 그 집에서 나올 때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뒤 쫓아온 외삼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이 십 년 동안 계약을 열 번이나 바꾸셨습니다.” 장인인 외삼촌이 갑 질을 한 것입니다. 계속 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으면 난 빈털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이런 상황 속에서도 상당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저주가 그에게 임하지 않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혹시 이런 일은 반드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도 그렇게 되는 것 아닌가요? 사필귀정이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외형적으로 그렇게 비슷하게 보일 수 있겠습니다.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베푸시는 은혜와 같은 것인지 아니면 일반적인 은총 가운데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시는 한 방식인지 저는 잘 모릅니다. 단지 제가 아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이런 특별한 자격 권세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축복하면 축복하는 그들이 복을 받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아무리 영적인 사실이라도 성숙한 자녀들에게는 결코 애매한 어떤 것이 아닙니다.선명하게 보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저주하면 저주 받습니다. 단지 저주의 형태가 저주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강퍅한 죄인의 어두운 눈에는 오히려 이런 것이 무슨 자랑거리로 보일 수 있습니다.

특히 자녀들은 축복(祝福이란 ‘빌’ 축, ‘복’ 복으로서 복을 빈다는 동사입니다)의 권세가 있습니다. 이것은 요셉의 가지가 담장을 넘는 것 같은 것이 선한 자를 일어나게 하는 것이고 악한 것들의 역사를 멈추게 하는 권세입니다. “내가 도대체 뭐라고 이런 권세가 있다는 것인가?” 이런 예가 적절할 것입니다. 자동차를 몰고 가다 보면 이제 20세 남짓한 앳된 교통 경찰이 차를 세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세워야 합니다. 그 경찰에게 “네가 몇 살인데 건방지게 나를 세워?” 그렇게 말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 경찰의 나이나, 학력 인격 이런 것과 무관하게 ‘위임 받은 권세를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는 교통을 책임지는 책임자의 권세를 위임 받은 자입니다. 그가 자동차를 세우는 것은 자신에 주어진 그 권세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가 손을 들면 누가 되었든지 차를 멈추어야 합니다. 그가 수 신호를 하면 누가 되었든 따라야 합니다.

친한 친구가 군대에 있을 때 소위 당시 보안대라는 곳에서 근무를 하였습니다. 처음 훈련 받고 검문소에서 버스 검문을 하는데 2-30 이 탄 버스에서 수상하게 보이는 자 10명 이상을 버스에서 내리게 하여 조사를 했답니다. 물론 아무 일도 없어서 다 그냥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 누구도 왜 내리라고 하느냐 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자랑 비슷하게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자기 스스로도 놀란 것입니다. 내가 내리라고 한다고 누가 내릴까? 그런 것이 먹힐까? 그런데 그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 재미에 계속 그 짓을 하다가 나중에 고참에게 기합 세게 받았다고 하더군요. 그 친구 목사와 같은 차를 타고 기도원에 여러 번 갔는데 갈 때 마다 춘천 가는 그 길목에서 꼭 검문을 받습니다. 저 혼자 다니면서 검문을 받아본 일이 없습니다. 그 친구는 누가 봐도 간첩같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아직 어리게 보이고 간첩같이 생긴 그라도 내리라고 명령하면 누구든 내려야 합니다. 위로부터 위임된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거역하면 그 위의 권세를 대항 하는 결코 가벼울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축복해보세요. 어? 어? 어? 이상할 정도로 그가 복을 받습니다. 진짜로 그렇게 됩니다. 나의 인격이나 행실로 보면 ‘너나 잘하라’는 소리 듣기 딱 좋은데도 그러합니다. 축복은 낭비 하듯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 들에게 축복하십시오. 부모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입니다. 이웃에게 축복하십시오.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기도하세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대로 됩니다. 권세를 선하게 사용하면 반드시 그 결과는 확인 됩니다. 악의 역사가 계속되는 자에게 축복하시고 그 악함 보고 멈추라고 명령하십시오. 그 질주하던 차량이 멈추어 서 듯이 악한 역사가 멈추어 서는 역사가 있습니다. 만약에 서지 않을 경우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십니다. 그 권세를 선한 곳에, 내게 권세 주신 그 분의 영광을 위하여 행사하십시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하나님의 놀라운 손이 어떤 방식으로든 임하시는 것을 목격하실 것입니다. 압살롬 같이 왕의 자녀의 권세를 그 따위로 쓰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제대로 세우는 쪽으로 선하게 사용하였다면 그의 사람은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반대였을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주께서 오셨다는 사실, 그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 그런 객관적인 사실을 아는 것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그 분을 영접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뿐 아니라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가 되고 권세가 주어집니다. 여러분과 가정과 교회의 복된 삶을 위하여 이 선하고 복된 권세를 보다 역동적으로 행사하시기 바랍니다. 선명한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번 성탄절이 이런 의미에서 여러분들의 영적 삶의 격을 높이시는 기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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