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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 그물질과 153


헛 그물질과 153

베드로는 그 형제 안드레의 소개로 예수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안드레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고 합니다(요1:37-40).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 말했을 때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로 하였는데 그 사실을 형제인 베드로에게 말한 것입니다. 그 후 당분간은 베드로가 “길에서 주님을 좇는 제자”가 아니라 주변에서 예수님의 활동을 돕는 제자였습니다. 이 만남에 서 주님은 “네가 시몬이지만 앞으로 게바(아람어, 반석)이라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후 눅 4:38 앞뒤의 기사를 보면 주께서 갈릴리 베드로 장모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이 떄 베드로의 집에 오신 것입니다. 이로 봐서 베드로가 우리가 아는 그런 제자가 되기 전 주님은 수 차례(?) 그를 만나셨습니다. 그 분이 베드로에게 오셔서 날씨 이야기나 돌아가는 정국에 대한 것, 연예인 이야기나 하셨겠습니까? 아마도 성경과 자신의 관계 등을 설명 하셨을 것입니다.

눅5:8 이하의 기사에는 베드로가 헛그물질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때 또 주님께서 그에게 오셔서 다른 곳에 그물을 던지게 하여 “그물을 끌어 올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입니다. 주께서 베드로를 부르시는 것이고 그를 통해 이루실 일을 이렇게 상징적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 때 베드로는 주님을 좇는 제자가 돠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를 따랐습니다.”

후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하셨을 때, 승천을 앞두고 또 다시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저주하면서까지 부인 한 후 처참한 모습으로 고기를 잡을 때’입니다. 그 때도 헛 그물질 만 하였습니다. 동료 중 누군가 ‘주님이 오셨다’고 소리 쳤습니다. 눅5:8 이하에 나타난 것과 거의 유사한 내용입니다. 이번에도 주님의 지시에 따라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럤더니 153 마리가 잡혔다고 합니다(요21:3 이하). 여기서 153 에는 무슨 숫자적인 암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도 많이 잡혀서 신기해서 ‘도대체 몇 마리나 잡혔는지’ 그것을 세어 본 것입니다. 이 정도면 밤새 그물질 하여 얻은 것보다 더 많다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매일 이렇게 잡으면 큰 부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은혜로다

우리는 여기서 ‘반드시’ 붙잡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때로 우리 삶은 헛 그물 질 할 때가 있는데 그 때 주님은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는 결론을 여기서 내리고 그친다면 이 본문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 전에 베드로는 어떤 날은 많이 잡고 또 어떤 날은 그렇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좀 수확이 만족스러울 때는 “그래도 역시 내가 솜씨가 있군, 애 쓰니까 뭔가 생기는군”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전에 고기를 제대로 못잡았을 때는 성난 얼굴로 집으로 들어 왔을지 모릅니다. 날씨 좋은 날 많은 수확을 한 것은 물론 은혜이고 반대로 어떤 조건 때문에 많이 잡지 못했다 해도 그 작은 것조차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알았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로 잡는 고기는 ‘무쉬트’라는 것인데 이것은 벳세다와 갈릴리 호수가 만나는 곳 수심이 비교적 낮은 지역에 있는 물고기입니다. 온천수 처럼 따뜻한 물이 지하에서 갈릴리로 흘러 들어옵니다. 이 물과 갈릴리의 물이 섞이는 곳에 이 고기가 많습니다. 수심은 깊어야 1-2 미터 정도입니다. 배 두척이 그물을 내려 양쪽에서 해변으로 잡아 끄는 방식으로 그물을 질(그물을 내리는 것)을 합니다. 그러므로 “깊은 곳”에는 이 고기가 거의 없습니다. 말 잘 안듣고 돌아다니는 말썽쟁이 고기나 혹 거기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또 이것을 잡으려면 그물을 ‘내리는 방식’으로 하는 것인데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물을 ‘던지라 (casting)’고 하셨고 그는 그대로 하였습니다. 던지는 그물로 잡을 수는 없는 고기이지만 그렇게 해서 잡혔다는 것입니다.

그곳에 있어야 할 무쉬트가 왜 그 쪽 깊은 곳으로 옮겨 갔을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아셨습니다. 다시말해서 주님은 물 속에 있는 물고기가 어디 있는지 아시는정도가 아니라 그 자리를 옮기게도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곳에서 늘 그런 방식으로 고기를 잡을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곳에 그것이 있게 하셔야 그 고기가 거기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은혜를 우리는 보편적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주시는 특별한 은혜가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라는 뜻으로 그렇게 말합니다. 해가 악인에게도 비추이고 비가 그들에게도 주어지는 그런 은혜입니 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자녀들 조차도 그것을 “은혜”로 여기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큰 것 즉 대박이 터져야 은혜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이런 경험을 통해서 ‘늘 있는 일, 잠 좀 덜 자고 애 좀 쓰면 얻을 수 있는 것’ 조차도 하나님의 배려요 은혜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나아가서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예수 안에서 보았습니다. 눅8:5 이하의 기록에는 이 사건을 경험한 베드로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 주님이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을 ‘다’는 아니지만 어느정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전에 주께서 자신을 찾아 오신 이유가 자신을 부르시는 것임을 알고 있었으나 이런 저런 이유로 망설이거나 연기하고 있던 차에 이런 일을 경험하게 되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주님, 저는 주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주님의 일에 동참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이 아닙니다. 그저 훌륭한 어떤 분이 하시는 일에 조용히 협조 하라면 하겠습니다 마는 주님같은 분의 일에 동참할 인간이 아닙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물 속의 고기의 위치를 파악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을 임의대로 움직이실 수 있는 분, 그것을 거기 두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또 이떤 이유에서 그것을 옮기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그 분은 하늘의 별이나 달이나 태양도 임의대로 하실 수 있는 창조주이신 것입니다. 물 속의 고기를 임의대로 옮기는 것이 태양을 멈추는 것보다 쉬운일입니까? 물 속의 고기를 움직이는 것이 홍해를 가르는 것보다는 좀 쉬운 일일까요? 그런 분을 만난 것입니다. 숨이 막혔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은 그래야 합니다. 그 분의 부르심 앞에 베드로가 땅에 엎드린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농부가 아무리 기술이 좋고 열심히 일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주셔야” 소득을 얻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큰 소득을, 때로 기대 보다 못한 소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열심히 했음애도 불국하고, 잠 못자고 먹을 것 못 먹고 입을 것 못입고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평균이하의 소득을 얻을 때도 있습니다. 어쩌면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 없는 소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배가 너무 고픕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은혜에 대한 감사를 잃지 않아야 합니다. 숨만 쉴 수 있어도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손가락 끝에서 나오는 물 한 방울 만이라도 혀 끝에 닿으면 은혜입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하는 은혜입니다. 그물이 가득차야 은혜가 아니고, 어쩌면 하루 애쓴 것보다 더 많은 153 마리의 고기를 잡아야 비로소 감사하고 감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물에 보잘 것 없는 작은 고기 하나 달랑 잡혀도 사실은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거기 두셨기 때문에 그물에 잡히는 것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로다

주님의 백성에게는 이런 은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 위에 은혜가 주어집니다. 소경이 눈을 뜨는 것도 봅니다. 사람들은 소경이 눈을 떠도 떴나보다 하는 수준에서 그칩니다. 아무나 이것을 보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더 이상 소경이 아니라서 이것이 보입니다. 앉은 뱅이가 일어나는 것도 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칠병이어의 기적도 보고 삽니다. 삭개오가 변화 되는 것도 봅니다. 때로 변화산에서 변화하신 찬란한 주님의 모습도 봅니다. 생각하기도 끔직한 십자가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승리도 봅니다. 부활하신 주님도 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속에 나타나는데 그것을 보고 아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우리를 지배하고 계심도 ‘아직 미약하지만’ 알고 있습니다. 그런 분이 우리의 보혜사이심을 믿고 삽니다. 믿음 같지도 않은 믿음일 수 있지만 그것으로도 놀라운 것들을 체험하고 삽니다.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티끌보다도 못한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시고 또 위로에 위로를 더 하십니다. 그 분이, 주변에 있는 믿을 만한 어떤 사람 정도도 아니고, 나의 머리털 하나까지도 세고 계신 주님이, 내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는 저 참새 보다 귀하지 않은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말로만 이렇게 하시겠습니까? 일단 안정부터 시켜놓고 보자는 뜻으로 그렇게 말씀하시겠습니까?

“독생자의 피값으로 우리를 사셨다”는 말은 교회 올 때마다 매번 듣는 말입니다. 우리는 비교적 싼 물건 하나만 사도 그 가격 대비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살피고 삽니다. 그렇지 않으면 후회하고 아까워 합니다. ‘피 값’은 가장 귀한 것입니다. 독생자의 피 값!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셨다(구속이란 이런 의미)는 것은 그만큼 ‘나를 귀히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참새 한마리와 비교한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굉장한 수사법입니다. 다시 말하면 “네가 내게 참새 수준 밖에 안되나? 그 참새도 내 허락 없이는 땅에 그냥 떨어지는 법이 없네, 이사람아.” 왠 은혜인가요.

그물에 들어온 것이 너무 적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 삶에 들어오시려고 문을 두드리시는 것입니다. 좀 더 깊이 들어오시려고 문을 두드리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분명히 저기 어디 매우 가까운 곳에 주님이 나를 보고 서 계실 것이고 나를 부르시고 계실 것입니다. 아니면 문고리 붙잡고 이슬을 맞으며 서 계실 지도 모릅니다. 이 때 그물 만 쳐다보고 속상해 할 것이 아니라 ‘눈을 들어’ 나를 부르고 계시는 주님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주께서 하라고 말씀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새로운 삶의 길이 열립니다. 상상도 못했던 새로운 삶, 가나의 혼인잔치 포도주와 같은 것이 넘치도록 공급 될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모세에게 들어오실 때도 불이 붙어도 살라지지 않는 놀라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그는 애굽의 차기 바로가 될 사람으로 모든 것을 섭렵한 사람)을 동원해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 일 앞에 이 자신 만만한 한 인간이 엎드러지고 신을 벗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그를 통해 나타납니다. 로뎀 나무 아래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엘리야.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한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습니다. 그를 일으키시고 세미한 음성으로 특별 과외를 시키셨습니다. 이 모두가 다 그들이 저주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삶속으로 들어오시는 방법입니다.

텅 빈 잔, 원망 하라고 그렇게 만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채우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시려는 은혜위에 은혜입니다. 빈 잔 만 보고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로 시선을 돌리고 고정하면 그 것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풍랑 위를 걸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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