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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확률


확률과 믿음

위키 백과사전에 따르면 확률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확률(確率)은 어떤 사건이 일어날 것인지 혹은 일어났는지에 대한 지식 혹은 믿음을 표현하는 방법이며 같은 원인에서 특정한 결과가 나타나는 비율을 뜻하기도 한다. 수학에서는 확률론에서 설명하고 있으며 수학, 통계학, 회계, 도박, 과학과 철학에서 어떤 잠재적 사건이 일어날 경우의 가능성과 이 가능성 안에 있는 복잡한 시스템의 구조에 대한 답을 이끌어내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믿음과 확률

이 말을 먼저 하는 이유는 오늘날 성도들은 믿음과 확률을 잘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어떤 일이 일어날 확률이 높으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합니다. 그 반대로 확률이 비교적 낮은 경우에는 “믿지 못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은 지금까지 살면서 부활울 본 적도 없기 때문이며 또 의학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확률은 "0" 이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확률이 높은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 주께서 “믿으라”고 하신 내용은 그렇게 될 확률이 믿어도 될만큼 높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혼돈 하면 우리는 믿음에 큰 혼란을 일으킵니다.

어떤 이는 “믿습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아이가 좋은 학교에 입학 하기를 원할 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그대로 된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될 줄로 믿는다”고 선언하고 그것이 흔들리거나 약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자기의 마음에 그렇게 암시를 계속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기대한 것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소위 믿음이 좋은 사람은 이런 경우 잠깐 당황하다가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라고 결론 짓고 또 다른 것을 “믿기 시작”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믿음에 회의를 느낍니다. 자칫 하면 믿음이란 것이 어떤 심리적인 효과 만을 말하는 것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왜 믿는다고 하였는지” 질문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까지 성적도 좋았고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예상 점수를 얻을 수 있고 또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총으로 도와주시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믿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확률계산의 결과입니다. 이런 저런 여건 속에서 이런 저런 것을 대입 했을 때 충분히 승산이 있고 그것이 거의 낙관적이라 했을 때 “믿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전혀 여러가지 상황적으로 그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강렬히 원한다”는 뜻으로 “믿습니다”를 연발할 수 있습니다.

기대 혹은 소망과 믿음

우리는 정직해 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 저는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그것을 기대합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에 근거한 것이 아닐 때는 ‘기대’ 혹은 ‘소원’한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 안에서 약속된 것은 ‘믿는다’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구별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은 “믿어야” 합니다. 어떤 방식으로 이런 악한 것이 선을 이루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주안에서 분명히 이루어집니다. 또 그 ‘선’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선’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어야”합니다. 이런 것도 합력 하면 보다 나은 선을 이루게 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렇게 “믿어야”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것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 올 확률이 전혀 없어 보여도 그것을 “믿어야”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대표하는 자들 (예를 들면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 선지자들 등 등)에게 약속하신 것들은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메시야가 오실 것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시고 떠나지 않으신다는 것은 “그럴 확률이 높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하시는 것임으로 믿음의 대상입니다. 이것은 그럴 확률이 높은 것이 아닙니다. 그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주께 돌아오는 자, 돌이키는 자에게 반드시 회복의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럴 확률이 높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될것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사하였습니다. 그렇게 될 확률이나 가능성이 열린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주께서 부활 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할 확률이 엄청나게 높아진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의 구원사역으로 인하여 이제 성령께서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에게 함께 하실 확률이 많이 높아진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었음을 믿어야”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주님의 포도나무 가지에 접붙여 새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잘 만 하면 그 생명을 얻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믿어야”합니다. 부르짖으면 응답하실 확률이 높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하실 것을 “믿어야”합니다. 내가 해 달라는 대로 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그 부르짖음에 전지 전능하신 능력과 사랑으로 반응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까지 돌보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물론 어떻게 돌보실 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주께로 가면 모든 것이 치유될 것을 “믿어야”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하실 수 있으시면 ..

간질병과 같은 증상이 있는 아들을 주께 데리고 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 때 제자 몇 명과 산 위에(변화산) 계셨고 산 아래는 나머지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서기관들이 그 병든 아들을 보고 제자들과 토론을 벌였습니다. 주로 이런 경우 서기관들은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로 인한 것임으로 고침을 받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고 또 제자들은 그런 경우에도 고침이 이루어진다는 토론이었을 것입니다. 그 아들과 그 아픔을 가진 아버지를 중간에 놓고 이런 토론을 벌인 것입니다. 그 아버지는 그 말을 다 들었습니다. 주께 나왔으나 주님보다 그 서기관을 먼저 만났습니다. 소망 중에 나왔으나 그런 토론으로 인하여 그 아버지는 기가 다 죽어 버렸습니다.

마침내 주께서 내려 오셔서 상황을 묻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집니다.” 이것은 그 아들의 저주스러운 상황과 아픔을 표현한 함축적 표현입니다. 이렇게 저주스러운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할 수 있으면 고쳐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엇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그 아버지는 왜 “그러나”라는 말을 썼을까요? “이러저러 하게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좀 고쳐주십시오”라고 해야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나>라는 접속어를 썼을까요?

서기관은 당시 단순히 뭘 받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그 아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치유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그렇게 합니다. 그 아버지는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러나”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의 말에 의하면 우리 아들은 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저주가 임한 것이라 합니다." 실제로 그 아들이 저주를 받을 만한 어떤 일로 인한 결과로 그렇게 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 아들이 몇 살인지는 모릅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는 것을 봐서 서기관들은 아마도 그 아버지 혹은 조상의 죄를 언급 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그 그렇게 된 저주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였을 수 있습니다. 잊어버렸던 죄가 생각났을 수 있습니다. “그것 때문인가? 저것 때문인가? …” 좌절의 늪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을 들으면 어떤 부모가 양심의 가책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묵혀져 있던 죄까지 다 생각났을 것입니다. “아 – 그래서 그렇구나… 이 못난 애비로 인하여 그렇게 되었는가보구나 …” “ 아 – 그때 내가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데 … “ 그는 주께 말합니다. “그러나 .. 주여, 어떻게 해 주실 수 없을까요?” 이렇게 되어야 그 <그러나>가 자연스럽게 연결이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그 아버지의 말은 주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들과 그 아들의 아버지인 자신의 ‘자격’에 대한 것입니다. “저 같은 자가 혹은 우리 아들은 죄로 인한 저주로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된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떻게든 고침을 받을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하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다시 말해서 “무슨 자격을 논하느냐? 그것이 너의 아들의 죄로 인한 것이든, 아니면 네 죄로 인한 것이든 ‘믿음’ 이 있으면 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날 때 부터 소경이었던 자를 보면서 제자들은 토론하였습니다. “날 때부터 그렇게 된 것을 보니 자기 죄로 인한 것은 아닌 것 같고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분명하다. 아니다 그런 법은 없다. 우리가 모르는 그의 죄가 있을 것이다.” 매우 신학적 토론입니다. 끝이 있는 토론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께 물었습니다. 이 때 주님은 두가지 질문 중 하나의 답을 가르쳐주신 것이 아니라 제 3의 답을 주셨습니다. “이것도 틀리고 저것도 틀렸느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

그 아버지의 생각과 이 때 제자들의 생각은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러나>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믿음>이었습니다. 여러가지 생각을 복잡하게 하고 또 스스로 정리해보고, 또 철학적이고 신학적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하고, 잘 안되면 서기관에게 묻고 답을 기다리고, 서기관들의 답을 종합하고 분석하여 최종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며칠 씩 날을 새면서 확률을 계산해보고 또 죄로 인한 것이라면 만회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이리 저리 가능성을 궁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자격을 확득하여 보다 유리하고 확률이 높은 쪽으로 나아가느냐를 연구할 것이 아닙니다. 무슨 자격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습니까?

주께로 오는 자, 누가 돠었든지, 주의 자비와 긍휼 앞에 나아오는 자는 <모두, 예외없이> 그 은총을 얻는다는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 주실 가능성이 없지 않다”가 아닙니다. 주님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고 이미 다 완성하셨습니다. 이것을 한 개인이 자기의 삶 속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 영접이고 그것은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믿음, 어줍잖은 확률계산이나 이치를 따져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그를 살리고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이전의 상태로 회복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으로의 회복입니다. 주께서 이루시는 회복은 다 그렇습니다.

현재의 어떤 어려움이 물러갈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그것을 하시는 분임을 <믿는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 어려움은 연단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쉽게 아침 안개 걷치 듯 물러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대상은 말씀 안에 계시 된 하나님이시고 성자, 성령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대로 될 것임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분이 내가 바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선한 일을 내게 행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될 확률이 점점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을 믿으십시오.

믿습니다와 기대, 소망

“믿습니다”와 “소망합니다”를 구분하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바라는 사안이 있을 때 원하는 대로 될 것을 “믿는다”고 하다보니 그 믿음이 공허해 질 때가 많습니다. 그 때는 그냥 바란다고 하십시오. 바라는 어떤 것이 원하는 대로 될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주님’을 믿습니다. 자칫하면 주님 없는 소망을 되뇌일 수 있습니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수는 있으나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주실 주님을 믿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믿고, 나는 지금 형편없이 패배하는 것 같은 삶을 경험하고 있지만 그 자녀들에게 넉넉히 이김을 주시는 주님을 믿으십시오. 주를 바라보는 자의 발을 암사슴 발처럼 만들어 높은 곳에 오르게 하시는 그 주님을 믿으십시오. 확률계산 그만 하시고 주를 믿으십시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산다”는 말은 생존 그 이상의 말입니다. 하루 하루 연명하는 그런 의미에서 생존이 아니라 “정말 사는 것 처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주 안에서 산다는 것이 이런 것이로구나! 이런 것이 진짜 사는 것이로구나!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루를 살아도 삶의 진정한 내용이 있고 그 가운데 감사와 기쁨이 있는 그런 삶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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