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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 목사가 어느 목사에게 보낸 편지


이 글은 목회 칸설팅을 하는 중 허영 목사가 00 목사에게 보낸 글입니다. 해당 목사님께 <양해를 구하고 컨설팅의 내용을 설명할 겸'해서 글을 올립니다. 원본은 이보다 훨씬 더 길게 되어있으나 그것을 요약하여 올립니다. 몇 가지 내용은 그 교회에 관련된 것이라 생략하기도 하였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매우 귀하게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추가적으로 지원을 하는 입장에서, 그리고 이런 내용의 충고를 원하시는 것을 알고 부족하지만 목사님이 혹 놓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열린 마음으로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첫째, 성도들은 배고파합니다

목사는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하는 자로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하는 사명을 갖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집중하다보니 성도들이 원하는 것에 대하여 좀 소홀해 지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고집스럽게 사수’하는 것은 큰 틀로(당연히) 하되 “성도들을 배부르게 하는” 것도 설교자의 임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기 백성을 행한 위로>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얼굴을 자기 백성들을 향하여 드시고 그들을 지키시기를 원하고 또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고 평강 주시기를 원 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큰 배경에서 메세이지가 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목사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말씀을 들은 성도들은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연약하고 무가치 한 존재인지를 알게 되어야 하며,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들을 귀히여기시는 지도 알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연약하고 추함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크고 놀라운 능력으로 각 성도들의 삶 속에 오셔서 얼마나 큰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지도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누구나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나 이를 더 확실하게 확인해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피곤하고 죄악이 관영 한 경쟁 사회에서 살다보니 하나님께 떳떳하지 못한 것이 너무 많아 선뜻 그 도우심을 ‘요청’하지를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사랑과 긍휼로 그 자녀를 생각하시는지 확인시켜야 하며, 동시에 주안에서 얼마나 큰 능력이 “내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역사하는지도 알게 해야합니다. 성도들은 이미 어느정도 알지만 이를 더 확실하고 선명하게 알기를 원합니다.

구약 선지자들의 설교를 보면 무서울 정도로 죄에 대한 지적이 강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돌아오는(회개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반드시> 그렇게 합니다. 그들이 세속적 복을 강조하여 기복적으로 흐르는 일은 절대 없지만 주를 사랑하고 의지하고 믿고 돌이키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한량없는 능력에 대하여는 아낌없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설교 시간 마다 이와 같은 두 가지가 조화된 말씀을 통해서 성도들은 ‘새 힘을 얻고 살아나야’ 합니다. 매번 설교는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루어질 때 성도들은 '배부르다'라고 표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알게 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포도원 품꾼 들의 품삯을 정하는 원리와 같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원리는 항상 “한 만큼 받는 것이 가장 정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가 그 원리 임을 가르쳐주는 놀라운 비유입니다.. 사람들은 포도원 품꾼의 이야기를 들으면 이를 불공평이라 하지만 사실은 모든 것이 다 “은혜”로 되는 원리를 말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을 무가치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누더기 같은 공로를 믿고 헛된 안정감과 자만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은혜”의 위대함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알게 하기 위하여 때로 우리 삶을 “매우 어렵고 혼란스럽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인생 항로에서 무가치”한 것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농부가 밭을 깊게 갈아엎는 쟁기질은 "분노의 표현이 아니라 풍성한 열매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갈릴리에서 잔뼈가 자란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어쩔 줄 모르는 것이나 베드로가 헛 그물질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살다보면 그런 날도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일상에서의 거둔 작은 멸매들 뿐 아니라 그물이 꽉 찼던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그 모든 것이 다 자신의 노력과 똑똑함의 결과라 생각했겠지만 사실은그들의 능력이나 기술이라는 것이 인생의 진지한 문제 앞에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를 알게 하시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능력과 그 은혜가 아니면 성도들은 잠시도 생존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으로 깊숙이 들어오실 때는 이런 풍랑과 같은 것을 사용하여 그런 메세이지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살고 있으니 그냥 그렇게 일하고 돈 벌고, 또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해주고… 그러니 그렇게 살면 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은혜 아니면 잠시도 서있을 수도 없다”는 것을 성도들이 알게 해야 합니다. 목사가 교회에 세워지는 이유도 크게는 그런 것입니다. 베드로가 풍랑 위를 걷듯이, 주님을 보고 있을 때는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눈을 돌려 “바람”을 볼 때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는 원리입니다. 한 번의 호흡이나 삶의 작은 한 조각 한 조각도 은혜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고 그 짝이 맞추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주만물의 창조주이며 섭리의 주이시며 부활의 주님께서 한 낱 티끌에 지나지 않는 초라한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그 은혜의 크심을 매번 이렇게 크게 증거 해야 합니다. 그것으로서 성도들의 영혼은 배부릅니다. 성도들은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그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며 수준 낮은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를 드리는 것이지만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할 수 없는 큰 은혜가 증거 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아무 것도 아닌 내가 주안에서 그렇게까지 높여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성도들은 배 부른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갑니다.

어떤 분의 설교는 "행위 요구"로 가득차 있습니다. "기독교는 삶이다"라고 말하면서 계속 이런 저런 삶을 요구합니다. 상위 5%나 10%에 해당하는 탁월한 인물들의 예를 들면서 "이렇게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역으로 "너는 왜 못하냐"고 꾸짖는 것이기도 합니다. 맞는 말이지만 성도들운 계속 주눅이 듭니다. 스티브잡스나 그 외에 성공한 인물이 아니라서 아내에게도 남편에게도 또 자녀들에게도 늘 죄송한 마음 뿐입니다.

저는 언젠가 우이동교회에서 '넉넉히 이기리라'는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넉넉히 이긴다(헬, 휘페르 니카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 자신이 받은 은혜가 큽니다. 니카오는 승리를 말하고 '휘페르'는 그 동사를 보다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일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팔 하나가 없는 젊은 여자가 등반대회에 나갔습니다. 두 팔이 다 있는 사람을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꼭대기까지 올라간 모양입니다. 또 두 다리가 없는 자가 의족을 하고 달리기 대회에 나간 것도 봤고, 두 팔이 없는 청년이 수영대회에 나간 것도 TV 뉴스에서 봤습니다. 노부부가 마라톤 대회에서 완주한 것도 봤습니다. 이들때문에 대회가 몇 시간 지체되었습니다. 그러나 완주한 그 노 부부에게 사람들은 일등보다 더 열열한 박수를 보냈습니다.

벧헤스다 연못 옆에 누워있던 38년 병자는 "물이 동할 때 누군가 자신이 제일 먼저 들어가도록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웃음이 납니다. 거기 와 있는 자들은 다 물이 동할 때 제일 먼저 들어가려고 할 것입니다. 거기서 누가 그를 제밀 먼저 밀어 넣어주겠습니까? 다른 것을 고려하지 않아도 이것은 그저 황당한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은 일 등에게만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 마저 이런 시스템으로 움직이면 대부분의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합니까?

넉넉히 이긴다는 "그 승리의 가치"를 말합니다. 아는 것이 없지만, 기진 것이 없지만 그러나 주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자기 이상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주께서 주시는 능력은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일상의 삶에서 우리는 이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아침 마다 새롭고 저녁 마다 새로운 이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매일 "휘페르 니카오"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성도들의 어떤 행위는 남보다 앞서기 위해서나 혹은 윤리 도덕적으로 그것이 옳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나님께서 비천한 우리에게 무엇을 행하셨는가를 선명하게 말하면 그것에 대한 반응이 이렇게 뒤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윤리 도덕과 기독교 교훈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그 사랑은 실천됩니다. 긍휼을 알면 긍휼히 여길 줄 압니다. 헌신은 해야 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역시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셋째, 성도들의 헌신과 봉사는 이런 은혜에 반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참으로 다양합니다. 어디엔가 소속되는 안도감 때문에 올 수도 있습니다. 또 교회에 가면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생각 때문에 오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교회에 속한 사람의 성공을 보고 그 성공을 이루기 위하여 그 길을 따라가기도 합니다. 또 교회는 신분상승이 다른 곳에서 보다 훨씬 용이하게 이루어 지기 때문에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그 정도의 능력이나 학력 혹은 재력으로는 지도자의 위치에 오를 수 없지만 교회는 이런 것과 크게 상관없이 장로도 되고 권사도 되고 집사도 되어 “뭔가 뿌듯한 신분의 상승”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물론 죄 사함과 은혜를 사모하여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런 기독교적 진리에 대한 관심과 열정으로 교회 오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동기를 가지고 교회에 발을 들여놓는 (물론 성령의 인도 하심이 이렇게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에 무릎을 꿇고 헌신하는 것은 ‘위에서 말한 그런 동기’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그 무질서와 소란은 바로 그런 동기가 말씀으로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점진적으로 성장하여 이런 자들도 훌륭한 헌신자가 되기도 하는 것이지만 이런 성숙은 급속하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신분상승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혹은 보다 안정된 소속감, 인정받는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 봉사를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 이루지 못한 것을 교회 안에서 이루어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과도할 정도의 헌금과 몸으로 봉사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한계가 명확합니다.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런 예를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은혜”를 알 때에 자연스럽게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릴 수 있습니다. 또 그런 헌신과 봉사라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 위에 “은혜 위에 은혜”가 덧 입혀집니다. 성도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강력한 권고나 아니면 반대 급부를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헌신한 자들은 반드시 자신의 공을 앞세워 결국은 ‘나중된 자보다 나중이 되는 결과’를 가져 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을 반복하게 됩니다 마는, 주께서 산상보훈에서 “복이란 심령이 가난한 것”이라고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이 애통, 그리고 온유, 의에 주리고 목마름, 긍휼히 여김, 마음의 청결,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의 순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설교의 거장 로이드죤스는 이 대목에서 이것은 “순서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라 했습니다. 즉 심령이 가난해야 애통하고 그래야 온유해 집니다. 이런 사람이 의에 주리고 목마릅니다. 이런 자라야 하나님의 긍휼을 알고 그것을 실천합니다. 때로 사람 사이에서 화평케 하려고 노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심령의 가난이나 애통의 단계를 거치는 일 없이 바로 이런 것은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노력은 또 다른 분쟁을 만듭니다.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라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습니다. 이 핍박은 떳떳하고 영광된 것입니다. 이런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격상의 문제나 처신에 문제가 있어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 시작이 심령의 가난입니다. 여기서 모든 좋은 것이 발생합니다. 심령의 가난은 은혜를 깊이 알게 된 결과입니다. 은혜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보잘것 없는 존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왜 그 자비하신 하나님이 심판이라는 것을 하시는지, 왜 지옥이 있는 것인지를 아는 것과 예수그리스도를 이해한 결과가 은혜입니다. 은혜로 충만 하면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성도의 겸손이, 그리고 예수님의 발에 기름을 붓고 머리카락으로 감싸고 씻었던 마리아의 헌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분량에 따른 최고의 헌신 사역이 이루어집니다. 과부의 두 렙돈을 높이신 주님은 이런 원리에사 말씀하신 것입니다.

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위하여 성도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기 이전에 성도들을 이 “은혜”로 배부르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알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베드로의 장모처럼 병상에서 일어나자 마자 거의 자동적으로 ‘수종’드는 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목회자에게 주신 최고의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매 설교 때마다 풍성한 잔치가 베풀어져야 합니다. 저 지옥의 문턱에 있는 타락한 티끌 같은 존재가 주 안에서 “은혜”로 이렇게 존귀해 질 수 있고 이렇게 큰 능력을 소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놀라운 약속이 주어졌는지 알게 해야합니다. 여기서 노래가 있고 기쁨이 있고 감사가 넘칩니다. 혼인잔치에서 보는 바로 그런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혼인잔치 기쁨을 위해서 준비한 포도주는 조금 있으면 다 떨어집니다. 주께서 채우신 항아리를 여시기 바랍니다. 결코 마르지 않을 뿐 아니라 갈수록 질이 좋은 포도주가 공급됩니다.

넷째, 교회의 성장

교회가 결코 무시하거나 간과할 수 없는 양적 성장도 이렇게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성장이란 대형교회를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몇 년이 흘러도 “똑같은 사람들만 머무는” 교회가 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목사가 반드시 설교를 잘해야 교회가 (양적으로)성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교회는 “어떻게 저런 메세이지를 통해 이렇게까지 성장할 수 있는지”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모범적 성장을 이룬 교회가 다 목사가 설교를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나중에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댈 수 있을 때 답을 얻기로 합시다.

인터넷만 뒤져도 알 수 있는 이야기, 학식이 좀 있고 인생을 바르게 산 어르신들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 절에서도 들을 수 있고 교양 강좌에서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강단에서 할 필요 없습니다. 해서는 안됩니다. 교회에서 만 들을 수 있는 말씀! 이것으로 강단이 꽉 채워져야 합니다. "일년 내내 어떻게 그런 말만 하느냐?" 가끔 이런 질문도 받습니다. 성경은 하늘을 두루마리로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생명의 메세이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을 사랑하여 가까이 대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자에게 결코 다함이 없는 '반석에서 솟는 샘물'이 공급됩니다. 성경은 그런 보고입니다. 결코 다하지 않는 혼인 집 포도주 항아리입니다. 모든 백성이 다 마시고 또 마실 수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며 배고파 하는 성도에게 은혜의 꼴로 풍성하게 먹이실 수 있는 종이 되시기 바랍니다. 충분히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당장이라도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교회에 또 목사님의 심령에 이런 은혜가 샘처럼 솟아오르기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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