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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표적


사람들은 하나님의 예정에 대하여 심히 반발하여 거부하기도 합니다. 기독교인 조차 이런 문제가 나오면 침묵으로 그 순간을 넘깁니다. 아무리 깊이 생각해도 잘 알 수가 없고 이를 누구에겐가 설명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것이 사실이라 주장을 한다 하더라도 쏟아져 나오는 후속 질문들에 대하여는 거의 속수무책 이기 때문에 직접 언급을 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정은 운명론이나 숙명론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를 설명하기는 참으로 쉽지 않은 것이지만 예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하나님은 무 계획 하시지 않다'는 것이고 둘째, 따라서 우리 삶은 우연과 우연히 부딪쳐서 어디론가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셋째, 특별히 우리들의 구원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임으로 그것은 반드시 온전히 이루어 질 것이라는 뜻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를 잘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나의 삶이 나와 관계도 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원하는대로 삶이 이루어져야 행복한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는 세상을 원없이 살았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살았다는 뜻입니다.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삶을 말합니다. 창고를 열 두개 지어 놓고 원하는대로 쓰면서 살았다는 사람들 말입니다. 매우 드물지만 이런 사람들이 있기는 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과연 복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나의 삶 속에서 '나를 제외시키고 하나님이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 일까요? 이것을 거부할 일도 아니고, 섭섭해 할 일도 아니며 오히려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하여 감사하고 찬양해야 옳습니다.

예언(약속)과 성취

성경의 골격은 <하나님의 예언(예정)과 성취>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제시되고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예언 만이 있고 그것이 성취되는 것이 소개되지 않으면 그것이 정말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또 예언 없이 성취라고 주장되는 사건만 있다면 그것이 그저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고 해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시작부터 예언이 있고 그것의 성취가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며, 그 성취는 단회적으로 완성되는 것도 있지만 점진적으로 모습을 더욱 더 분명히 드러내는 단계적 성취도 있습니다. 즉 예언의 성취는 곧 <보다 온전한 성취의 모형>입니다.이루 말할 수 없는 사건을 들 수 있지만 그 중 아주 작은 하나의 예를 들면 아브람에게 "네 몸에서 날 씨(the seed, 자녀, 갈3:16에는 이것이 복수가 아닌 '단수'임을 명확히 함)"를 약속하셨습니다. 그 후 오랜 기다림 끝에 그 부인이 생물학적인 임신이 불가능한 상태(경수가 끊어진)가 되었으나 잉태하고 아들을 낳습니다. 이삭입니다. 그러나 그 성취는 여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훗날 다윗, 또 그 훗날 예수그리스도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 있는 하늘의 별과 같이, 모래알 같이 많은 자녀(seeds)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그 중에 있습니다.

예정 교리는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 오해에 대하여 일일이 만족스러운 답을 줄 수도 없습니다. 예정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 이해력의 한계 때문입니다. 이런 의문에 대하여 만족스러운 설명을 하든 못하든 간에 이와 같은 사실은 오늘날 '믿는 우리'에게는 더 이상의 위로가 없을 정도로 은혜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내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상황이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하더라도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내게 이루어 진다는 것"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흔히 하는 말로 국지적 전투에서는 패배할 수 있으나 전쟁에서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해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불쾌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이런 믿음 가운데서 우리는 주님처럼 풍랑 속에서 배 고물을 베고 잠들 수 있고 베드로처럼 물 위를 걸을 수가 있습니다.

요나가 다시스로 가다

하나님의 예정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는 성경 어디에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서 요나서를 통해 이 위대하고 놀라운 사실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도망가다가 물고기에게 삼켜져 기어이 니느웨로 보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사십일이 지나면 이 성이 무너지니 회개하라"고 외쳤던 선지자입니다. 불 순종하면 풍랑을 만나거나 고기 뱃속에 들어간다는 교훈 외에도 요나 서는 놀라운 메세이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표적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주님은 "요나의 표적 밖에는 더 보여 줄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나의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사역을 설명하겠다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면 요나의 사건이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정확한 예표"라는 뜻입니다.다시 말해서 요나서의 기록은 예수님 구원 사역의 정확한 모형(typology)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요나는 예수님 보다 700여년 전에 예수 구원사역을 정확히 미리 예표적으로 보여준 것인데 이것은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때 그 때 어떤 사건에 부딪쳐서 그 사건에 응 하느라 이런 저런 일들이 무 계획적으로 발생하고 주님은 그때 그때 적절히 임의적으로 대응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시의 주변 정세

요나는 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 시대의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앗수르(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그들이 회개하여 구원을 얻도록 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북쪽에 위치하였던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원수였습니다. 앗수르의 멸망은 이스라엘이 편히 사는 길이고 그들의 강성 함은 곧 이스라엘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고대 국가의 전쟁에서 패배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적국의 왕으로부터 자비를 얻었다 하더라도 여자와 아이들은 남의 집 노예가 되고 건장한 남자들은 거의 죽든지 아니면 제구실을 할 수 없는 장애자로 만듭니다. 그저 경제적으로 좀 불이익을 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죽는 것이 오히려 나은 구차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봐야 합니다. 앗수르의 세력이 점점 강성해지고 있는 시점에서 원수의 나라를 구원 하라는 명령을 받은 요나는 선뜻 순종할 수가 없었던가 봅니다. 그래서 다시스로 도망하였습니다.

다시스에 누가 있거나 아니면 특별히 할 일이 있거나, 혹은 숨어 지내기 좋은 곳이라서 간 것이 아닙니다. 다시스는 오늘날 스페인 남쪽지역으로 아프리카 북서부와 가까운 지브로올터 해협을 끼고 있는 옛 도시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곳이 "지구의 끝"인줄 알았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못 찾으실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냥 가장 먼곳으로 가버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마침 또 그곳으로 가는 배를 만났으니 뭘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멀리, 될 수 있으면 멀리 떠나려 했을 것입니다. 분위기 상 잠깐 쉬었다 오는 일탈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탄 배가 지중해 광풍을 만납니다. 보통 지중해는 겨울에서 봄까지 동쪽으로 향하는 부는 강한 바람으로 인해 풍랑이 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울이 로마로 압송 되던 중 유라굴라라는 태풍을 만나 파선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도 가을과 겨울에 불어오는 태풍입니다. 행27:9에는 "금식하는 절기가 지나서 항해 하기가 위태 한지라"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금식하는 절기란 대 속죄일을 말하는데 이것이 우리 달력으로 9월 하순 정도입니다. 이 후로는 지중해 항해를 꺼리고 11월 지나서 지중해를 건너는 것은 자살행위라 할 정도였다 합니다. 가장 항해 하기 좋은 때는 오순절이 지나고 속죄일 사이 즉, 6-8월이라고 합니다.

요나가 다시스로 가는 시기는 우리 달력으로 6월 어간입니다. 요나서 마지막 부분에 요나가 뜨거운 태양으로 인하여 죽기를 구할 정도로 괴로워했다는 것을 보면 니느웨 근처 산악지역의 6월 말이나 7월 초의 작렬하는 태양과 동남쪽 아라비아 사막에서 부는 열풍이 있었던 것으로 추즉됩니다. 다시말해 요나가 만난 풍랑은 뱃사람들도 예견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것입니다. 6-7월에 지중해에 이런 풍랑은 일직이 경험한 일이 없는 아주 이례적인 것입니다.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풍랑이 일고

일단 항해를 시작하면 선장의 권한은 막강합니다. 모든 상황에서 최종 결정권을 가지고 있으며 선원의 생사를 주관할 수 있습니다. 풍랑 속에서 선장은 큰 결단을 해야 했습니다.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풍랑으로 인하여 겁에 질린 선원들은 각자 자신들의 신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나 요나는 배 밑에 들어가 자고 있었다고 합니다. 배 타기 전에 많은 날을 고민으로 잠을 못이루어 이렇게 골아 떨어졌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일종의 자포자기 현상에서 오는 무기력일 수도 있습니다. 선장의 명령에 의하여 화물도 바다에 버려보고 각자 신의 이름을 불러보기도 하였으나 소용없었습니다. 풍랑은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았습니다. 제비란 '골라잡아 하나 뽑기'라기 보다는 마치 재판 하듯 이리저리 살펴 누군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요나가 걸렸습니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욘1:9). 비록 하나님의 명령을 피해서 도망가고는 있지만 그의 마음의 경외심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요나는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한 것일 수 있고 아니면 불순종의 마음으로 가득찬 자신을 이렇게 스스로 저주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요나는 그 풍랑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선장은 될 수 있는대로 풍랑을 이겨보려 했으나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요나를 포기하였습니다(욘1:15,16).

'기다리고 있던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켜 삼일 동안 요나는 그 뱃속에 있었습니다. 물고기가 육지에 그를 토해 놓으니 요나는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니느웨로 갔습니다. 그리고 하루길을 가면서 "40일이 지나면 이 성이 무너진다. 그러니 회개하라(욘3:4)"고 외쳤습니다. 느니웨는 삼일 길(한 바퀴 도는데)이 되는 큰 도시라고 소개합니다. 요나가 삼일 길 되는 도시를 몇 바퀴 돌면서 한 사람 한 사람 붙들고 회개 하라고 권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 하라고 전하는 사역을 충분히 한 것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하루 길을 행하면서 외쳤는데 사람들은 요나의 말을 듣고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알 것 처럼 보이지 않는 왕이 이를 주도하여 '물도 먹지 않는 금식'을 선포합니다. 모든 사람이 이 명령에 따라 다 베옷을 입고 엎드려 잘못을 자복하였습니다(욘3:5,6). 무엇을 회개 하였는지는 잘 모르지만 양심이 매우 예민하게 작용한 것입니다.

너무도 쉽게 회개하는 니느웨

참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강퍅한 인간들이 이렇게 쉽게 회개를 한다는 것이 얼른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것도 앗수르 인들이 볼 때 유대인은 참 미천한 존재에 불과한데 그런 초라한 이방인 선지자가 나타나 다짜고짜 회개 하라고 소리친다 해서 누가 그 말을 귀담아 듣기나 하겠습니까? 그저 초라하고(고기 뱃 속에서 나온 자의 몰골이 어떠했겠습니까?) 옷차림이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신기하게 보이는 어떤 유대인이 소리지르고 다닌다고 했을 것이고, 좀 심하면 사회질서를 깨는 문제적 인물로 보고 제재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듣고 왕부터 재 위에 앉았습니다. 오늘 날도 이렇게 쉽게 회개하는 사람 보기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만 되면 교회는 놀랍게 부흥할 것입니다.

이를 그저 단순히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하고 넘어가기에는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창조 과학회에서 제공하는 자료를 참고로 해봅니다. 요즘은 과학의 발달로 수 천년 전 별자리까지 추적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별자리 혹은 별의 움직임은 매우 정확한 법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전문가가 아니라도 이 방면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천체를 관찰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몇 천년을 뒤로 돌려 어느 지역에 어느 시에 천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BC 763년, 바로 여로보암 2세(재위 790 -750 BC) 시대에 니느웨 지역에 개기일식이 있었습니다. 동이 튼 후 오전 8시 경 약 5 -10분에 걸쳐 일어났습니다. 목성(Jupiter)이 태양을 가렸다고 합니다.

목성은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 중 가장 큰 별로서 옛부터 왕을 상징하는 별이었습니다. 천문학자들은 왕의 운명을 목성의 움직임과 발광 정도로 점을 쳤습니다. 바로 그 목성이 태양을 가린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목성이 태양을 가리는 일식은 자주 있는 것이 아니라 수 천년 만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일입니다. 갑자기 온 세상이 캄캄해졌습니다. 오늘날은 그것이 일식이라는 것을 알고 그다지 두려워 하지 않지만 고대 시대에 그것은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태양이 빛을 잃는 것입니다. 고대는 태양이 신이었습니다. 이집트 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 지역에서 태양을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 인식하였습니다. 그러니 태양이 빛을 잃는다는 것은 사망의 징조이고, 특히 목성으로 인하여(당시 박사들은 목성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었음) 태양이 빛을 잃는다는 것은 왕에게는 너무도 불길한 징조입니다.

왜 별 볼 일 없어보이는 요나가 잠깐 동안 외친 말을 듣고 왕을 비롯한 전 국민이 이렇게 회개를 할까요? 요나의 메세이지와 일식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말하는 하나님이 누군지 그들은 잘 모르지만 '이 불길한 징조가 바로 그 여호와로 인한 것'임을 안 이상 그들은 여호와 앞에 이렇게 엎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별의 움직임은 매우 정확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 때 저쪽으로 가야 하는 목성을 갑자기 이쪽으로 끌어다녀 태양을 가로 막은 것이 아닙니다. 그 목성은 창조 시에 입력된 제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움직이다가 태양과 지구 사이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일은 적어도 창조시부터 계획된 것이고 하나님이 이를 섭리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예정 되어 있던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다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요나는 그냥 순종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니느웨의 구원은 이스라엘의 멸망인가?

앗시리아 에포님(Eponymns)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앗수르 왕실에서 왕실비문을 작성 할 때 사용한 연대기 기술 방식을 말합니다. BC 910-612 사이의기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문화가 있는 나라는 모두 왕실의 기록이 있습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바로 이 일식이 있었던 BC 763 이전에 앗수르는 정복전쟁을 끊임없이 했습니다. 그러나 이 때부터 5년 동안 정복전쟁이 없었고 그 후 일이년 정도의 정복전쟁을 치른 후 또 수년간 정복 전쟁이 없었습니다. 정복전쟁에 있어서 잔인하기로 소문 난 앗수르가 어찌된 것인지 잠잠하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앗수르가 잠잠한 그 동안 여로보암 2세는 북으로 다메섹을 넘어 하맛 어귀(유프레데스 강 유역)로 부터 유다는 남으로는 아라바(사해 남부)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 이것은 최초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의 경계와 일치합니다(창15:18; 민13:21). 솔로몬 시대에 영토를 이렇게 확장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고 그 후 국력이 쇠하면서 앗수르 등의 공격으로 인하여 북쪽 국경이 많이 축소되었습니다. 그러나 느니웨의 회개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은혜를 받습니다. 물론 십만이 넘는 니느웨 사람들도 구원을 얻지만 이 일로 인하여 주변 나라들의 안정, 특별히 이스라엘에 안정과 번영이 주어졌습니다. 하나 밖에 모르는 요나! 정말로 보이는 것밖에 못 보는 요나! 그 요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이렇게 거부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펼쳐지는데 이렇게 불만을 품은 것입니다.

그 이후에도 그는 조금도 기뻐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아직 그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는 니느웨가 보이는 산 위에 초막을 지었습니다. "지었다"는 것을 볼 때 하루 이틀 머물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왜 그랬을까요? 처음에 그는 40일이 지나면 성이 무너진다고 외쳤었습니다(욘3:4). 그런데 외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회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직 35일이 남았는지 30일이 남았는지 모르지만 그 동안 이 이방인들이 잠시 동안의 회개를 중단하고 또 다시 강퍅해져서 기어이 심판을 받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그 성을 지켜 보기로 했습니다. 그 40일 동안 두고 보겠다는 것입니다.

니느웨 근처의 민둥산에 초막을 지은 그는 6월 중순이후 부터 7월까지 살인적인 뜨거운 태양의 열기를 이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아라비아 사막 쪽에서 불어오는 남동풍(흔히 동풍이라 함)의 열기는모든 식물을 순식간에 시들게 합니다. 뜨거운 태양 열을 막는 두터운 흙 벽과 오랜 경험이 만들어 낸 통풍 시설 없이 이 시기를 견디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요나는 박넝쿨(피마자 류)의 넓은 잎으로 해를 가려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동풍으로 금방 말랐습니다. 게다가 말라버린 잎을 벌레들이 갉아 먹어버렸습니다. 그대로 살인적 태양에 노출되었습니다. 여호와께 그는 소리를 높였습니다. "하나님 나 죽어요!"

이후 요나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네에게 박넝쿨이 매우 소중하지?" 하나닝께서 당연한 것을 물으셨습니다. 계속 말씀하십니다. 나는 박넝쿨 정도가 아닌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12만명의 생명"이 중요하다(욘4:11). 비교할 필요도 없는 것을 비교 하심으로 인간 생명의 귀중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에 요나가 크게 깨달았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요나가 주인공이 아니라 요나서를 구성하고 있는 메시아의 구원 사역의 모형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는 것입니다

요나가 이 일 이후에 얼마나 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몇 년 만 더 살았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가 이런 세상 돌아가는 일에 조금만 관심을 가졌어도 자신이 얼마나 편협한 생각 속에 살았는지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앗수르의 멸망이 곧 이스라엘의 안전'이라는 단세포 적인 사고를 믿음의 원리로 삼고 그것에 목숨을 거는 것이 "견고한 믿음"이라 생각한 것을 부끄러워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가능하면 훈수를 두려고 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을 좀 안다는 사람들까지 범하는 오류입니다. 이를 잘 알고 나면 교만이란 것이 참 이렇게 우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누가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렇게 높으신 뜻을 누가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까? 오로지 순종하는 것이 주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말할 때 곤란한 점이 있기는 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아야 순종을 할텐데" 그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것은 매우 난해합니다. 평생을 두고 연구 하여도, 아무리 기도를 하여도 알 수가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임이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부터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순종 속에서 한 차원 높은 하나님의 뜻이 깨달아집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순종이 또 한 차원 높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요나가 만약에 이와 같은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았다면 그도 역시 하박국처럼 간증 하였을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합2:20)!"

요나가 원하는 대로 되었으면 그는 매우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런 기쁨은 그의 기분 만을 좋게 할 분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깊이를 어떻게 헤아리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진정한 복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음에 대하여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하고 심지어 좌절 상태에 머물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어떻게 보면 그런 실망은 주제 넘는 짓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계속 증거 하기를 "의로우시다"고 합니다. 의롭다는 것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시든지 또 무엇을 행하시든지 "항상 옳다"는 것입니다. 그 분에게서 '후회할 만한 일'은 없습니다. 잘 못되는 일은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거룩 해도 불의의 오염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 뿐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자비롭고' '선하신 분'입니다. 행하시는 모든 것의 동기는 사랑이시고 결과는 항상 선하게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뜻을 존중하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시지만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분으로 내게 최고, 최선의 것을 주실 것이 확실합니다.

혹, 지금 나의 삶이 내가 그리던 삶이 아니라 해서 슬퍼하지 마십시오. 뜻대로 된 것이 없다고 해서 좌절하지 마십시오. 야곱이 광야에서 혼자 밤을 지낼 때 "그 때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애는 하나님의 뜻과 따로 이루어지는 것과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고 말씀하신대로 그대로 하셨습니다. 야곱이 원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의롭고 선하신 뜻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요나 때도 그랬습니다. 하나님 앞에 잠잠하고, 찬양할 뿐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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