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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술에 취하여 행2:13


마가의 다락방에서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던 자들에게 마침내 그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임하였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 같은 것을 들었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을 보았다(행2:1-3)." 육신의 귀로 듣고 시력으로 본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방법으로 본 것인지는 모르나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은 같은 경험을 하였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이 기록 될 당시 이 경험을 한 사람들이 많이 살아있었고 그들이 이 사도행전과 같은 문서들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구별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만약 어느정도 진실하지 못한 과장이 여기 있었다면 이것은 성경으로 취급되지 않습니다.

새 술에 취하다

마가 다락방의 성령의 역사 이후 그들에게는 평소와는 전혀 다른 특별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낮 부터 술취한 것이 아닌가 했습니다. 새 술에 취했다고 하는 것은 이런 거룩하고 신비한 현상을 매우 폄하하는 말입니다. 새 술이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술을 말하는 것인데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사도들과 제자들에게는 흔히 술 취한 사람에게서 보이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그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취한 것 처럼 보였다는 뜻일 것입니다. 세상은 기독교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거룩한 현상들을 높여 말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항상 부정적으로 말합니다. 헌금을 조금 많이 하면 교회가 성도들을 수탈한다고 하고, 봉사를 하면 자기 생활에 충실하지 못하다고 비난합니다. 무엇을 해도 못마땅해 합니다. "새 술 ..."도 일종의 조롱의 말이긴 하나 기독교인들은 기분 나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슬을 마신 것과 성령을 마신 것은 어떤 면에서는 공통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새 술"이란 말을 한 것을 보면 제자들의 상태가 평소에 술 취한 사람들을 보던 것과 좀 다르게 보였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술을 마시면 누구나 다 추해 집니다. 마실수록 더 그렇게 됩니다. 그 점잖던 사장님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평소 그답지 않은 이상한 행동 할 수 있습니다. 술이 깨고 나면 또 다른 사람입니다. 술이 취할 수록 깨끗하고 경건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에 취하면 평소와는 달리 죄에 민감하게 되고, 겸손해지는 등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만드셨을 때, 죄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을 때의 모습으로 가까이 갑니다. 뿐 만 아니라 영적 진리를 정확하게 깨닫고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교육 정도가 비교적 낮았던 어부 출신이 성경을 통달한 것과 같이 말하고, 또 언제 돌에 맞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담대하게 "예수"를 증거 하는 것을 보면서 '새 술에 취하였다'고 말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난잡하고 추악하고 무서워 보인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행동은 보편적으로 사람을 능가하는 거룩한 무엇이 있는데 그것을 될 수 있는 대로 폄하하여 말하고 싶어서 이렇게 "술취함"으로 표현 하는 것입니다. 아마 베드로는 이런 말에 화를 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눈에도 "그들에게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 인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신학생 시절부터 이런 신령한 역사로 인해 제정신이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성적으로 목회해서 죄송합니다

팔순을 이미 훌쩍 넘기신 어떤 목사님은 자신의 과거를 반성한다고 하면서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저는 설교를 잘 하기 위하여 수 많은 철학자들의 말과 에세이 등을 보았으며 또 그것을 보라는 듯이 설교에 인용하였습니다. 가장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메세이지를 통해서 복음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모든 지성인들을 설득하려고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다 부질없는 일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너무 이성적으로 목회하였습니다. 그런 저에게 그점을 들어 훌륭하다고 칭찬을 해주신 분들이 많으니 더욱 부끄러워집니다. 성도들이 나를 "이성적이다 지성적이다"라고 평해주면 어리석게도 더욱 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목사가 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 분은 지금 자기 자랑을 은근히 섞는 것이 아니라 "반성"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반성거리가 됩니까? 규모가 매우 큰 교회인데 그 교회는 내로라 하는 학자와 교수들이 눈에 뜨이게 많았다고 합니다. 아마 이 분들을 의식하고 더 수준 높은 설교를 하려고 애를 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분은 자신이 성령의 능력으로 이끌림을 받았다기 보다는 자신의 냉철한 이성의 인도를 받아 목회를 한 것을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것을 대입하면 그 훌륭한 목사님은 새 술에 취한 것처럼 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사실 모든 목사들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자신을 던져 헌신하는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어야 합니다." 즉 새 술에 취해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비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초 이성적인 것입니다.

술이 들어가면 자신이 술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술이 사람을 지배합니다. 그러니 평소와 다르게 소리를 지르고 싸우면서 아무 곳에나 드러눕는 것입니다. 제정신이 이미 아닌 것입니다. 성령을 마셔도 역시 제정신이 아닙니다. 자신의 냉철한 이성과 의지가 무엇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인격이 성령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성적 계산의 결과에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에 따라 행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합니다. 저는 제 자신을 이런 말씀 안에서 돌이켜 보았습니다. 정말 미미하지만 "성령의 술에 취한 적"이 있기는 합니다.

새 술에 취한 사람들

저는 신학공부를 시작하면서 학교에서 어떤 동료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당시 폐결핵 환자들에게 전도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말에 그분을 따라가 그분이 속한 "병원선교회"의 사람들과 함께 환자들에게 복음도 전하고 기도도 하였습니다. 주로 을지로 6가에 있는 국립의료원 제 8병동(흉곽 외과)으로 가서 그렇게 했습니다. 2년 동안 거의 매주 참석했습니다. 그 후로 1985년부터 1990년까지 저는 교회를 개척 하였는데 그 때도 교회 근처 병원을 돌아다니며 전도하였습니다. 병원만 보이면 무작정 들어 갔었습니다. 같이 할 사람이 없어서 혼자 성경책 들고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는 사이 병원의 간호사나 환자들과 얼굴이 많이 익었는데 그 후로 그 환자들이 퇴원하여 그 교회를 섬기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그 교회에는 주변 병원의 간호사들도 꽤 출석하였습니다.

1984년, 제가 교육전도사로 시무 하던 우이동교회에서도 주일 오후 예배 후, 5시 경 부터 청년회원들을 승합차에 태워 근처 병원으로 가서 각 방마다 들어가 전도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교육전도사로 있던 일년 동안 교회 큰 행사가 있는 날 제외하고 거의 매 주일 병원전도를 하였습니다. 그후 1996년 11월 부터 우이동교회 담임을 하게 되었을 때 중계동 을지 병원을 찾아가 환자들을 위한 예배를 인도하였습니다.그러고 얼마 후 병원 안에서 직원들과 환자들 대상으로 성경공부를 실시 하였는데 부원장을 비록하여 꽤 많은 분들이 참여 하였습니다. 그 때 저를 만난 분들 중 여러명이 현재 우이동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이 때는 저 혼자 그 병원에 갔었습니다.

1998년 부터 원자력 병원에도 찾아가서 예배를 돕는 일을 하였습니다.주일에는 목사가 매우 피곤합니다. 성도들도 4시에 드리는 오후 예배가 마치면 매우 피곤해 합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보유하고 있던 35 인승 버스에 거의 자리가 없을 정도로 참여하여 그 병원에 가서 환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초기에는 한 달에 한 번 방문하였으나 얼마 후에는 매주 참여하였고 주일 저녁 예배 시에는 제가 설교를 하였습니다. 근 15년 이상을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저는 주일 새벽기도회, 1,2 부 예배, 오후 2시 부터 시작되는 성경공부, 그리고 이어지는 오후 예배(이 때는 부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가 많았음) 인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제공하는 간단한 저녁식사를 하고(어느때 이후로는 병원 직원 식당에서 저격 식사를 하였음) 성도들과 함께 버스로 그 병원까지 갔습니다. 주일 모든 예배 설교와 성경공부를하고 나면 입을 뗄 힘조차 없이 온 몸이 가라앉습니다. 원자력 병원에 갈 때는 저나 성도들이 피곤하여 눈을 감고 갑니다. 그러나 마치고 올 때는 버스 안이 웃음소리로 소란합니다. 다 되살아난 것입니다. 저나 저와 함께 섬겨 주신 분이나 다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안양에서 개척교회 할 때도 집에서 잠을 잔 날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몸이 약해서 상당부분 병원에서 지냈고 그 외에 시간은 추운 겨울에도 전기장판에 담요 하나 두르고 밤새도록 강단에 꿇어 앉아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은 졸거나 잤지만 그렇게라도 하나님을 바로 보고 있어야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렇게했습니다. 때로 전철에서 듣는 사람도 거의 없고 오히려 시끄럽다고 항의를 받았지만 거기서 "왜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소리 높여 증거 하기도 했습니다. 제 정신으로는 못하는 일들입니다. 병원을 찾아가거나 전철에서 소리를 높이는 것은 누가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니고 사례비를 주는 것도 아닙니다. 눈치나 안 보면 감사한 일입니다.

은퇴

저는 정년을 7년 앞두고 은퇴하였습니다. 성도들의 사랑으로 은퇴 후에도 삶이 그렇게 고달프지 않을 수준의 예우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6-7년 가만히 있으면, 현상만 유지해도 누가 뭐라 하지도 않을 것이고 또 뭐라 해도 적당히 무마 시키면서 가면 모든 것이 평안 하였을 지도 모릅니다. 정년까지 있으면서 은퇴 후를 준비할 수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결정을 내리기 전에 이런 저런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지만 은퇴 하기로 하였습니다. 도중에 마음이 변할까 봐 은퇴를 4년 정도 앞둔 시기에 당회에 발표하였습니다. 남자가 일구이언 하면 안되니까 그렇게 말한 이상 약속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마음을 굳히려는 나름대로의 방법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빨리 은퇴하려고 하느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그 때 "왜 장로들이 붙잡지 않았는가?" 질문 같은 항의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내가 너무 단호하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잡는다고 취소할 거면 처음부터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성도들의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하여 말할 때 답을 하려고 준비해 둔 것이 있었습니다. "3-40년 할 것을 20년에 다 해버렸더니 더 이상 할 것이 없는 것 같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이런 말은 "더 이상 은퇴 이유에 대하여 말하지 말아 달라"는 뜻입니다. 사실 무엇이 텅 비어져가는 그런 느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언제는 제 힘으로 한 적이 있었겠습니까? 항상 주께서 주시는 은혜로 마치 사르밧 여인의 기름병과 가루통처럼 채워 주셨기 때문에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기간도 그렇게 해 주실 것입니다. 사실 저의 이런 대답은 옹색한 것이었습니다. 내일은 내일의 은혜가 또 있습니다.

은퇴를 결정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더 이상 제정신이 아닌, 새 술에 취한 것 같은 그런 것"이 내게서 사라져 가는 느낌이 강렬 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부터 인가 그렇게 새 술에 취해서 무거운지도 몰랐던 일이 너무도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전혀 계산적인 생각을 해 본 일도 없었던 것 같은데 미주알고주알 자꾸 계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를 둘러 싸고 있는 유리벽이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느꼈으나 그것을 극복 하면서 나아갈 힘이 없어졌습니다. 이런 상태가 좀 더 심각해 질 경우 자칫하면 목사로서 "직무유기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저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으며 성도들에게는 더욱 더 그럴 것입니다. 저의 빈자리는 교회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입니다. 한가지 힘든 것은 늘 대하던 사랑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 외에는 없습니다.

은퇴는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제게 일을 주셔서 "작지만 큰 교회 프로젝트 선교회"를 허락하셨습니다. 이 일을 얼마나 잘 해낼 지 모르지만 지금 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식으로 하나님께서 저를 사용하실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까지 저의 기도 제목은 "다시 한 번 성령의 새 술에 취하는 것입니다.그리고 그런 상태로 사는 것입니다." 저는 저에게 매우 크게 실망한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나 자신을 믿지 않습니다. 옳다고 생각되는 것 조차도 금방 믿지 않습니다. 따라서 저는 새 술에 취해서 "제 정신이 아닌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섰을 그때 제 정신이었겠습니까? 등 피부가 너덜너덜해 질 정도로 실컷 두들겨 맞은 바울과 실라가 어둡고 축축한 감옥에서 찬송을 불렀다고 하는데 그 때 제정신이었겠습나까?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바울이 제정신으로 터키 중심부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살인적인 산맥을 넘어 복음을 전했겠습니까? 세례 요한이 제 정신으로 당시 왕 앞에서 그를 꾸짖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위대한 종들은 모두 다 제정신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성령에 취해서 살았습니다. 성령 충만은 이렇게 이해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숨어있는 굴 속에 들어와 자고 있는 사울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으나 옷자락만 잘라낸 다윗은 어떻습니까? 가까운 동료들 조차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다윗을 성토헀습니다.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에 취하지 않고는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가 새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옛 술에 취했다면 사울을 당장 죽였을 것입니다. 사울 만 죽였겠습니까? 엄청난 보복이 있었을 것입니다. 독생자 이삭을 제단 위에 올리는 아브라함은 제정신이었겠습니까? 저는 이 새술에 취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일들을 감당하고 싶습니다. 누가 저를 보고 "저 사람은 새 술에 취했구먼" 이렇게 말해주면 매우 행복할 것 같습니다. 흠뻑 취해서 깨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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