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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파도 위를 걷다(마 14:22-33)


성경 어디서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소풍가는 꽃밭처럼 묘사한 곳은 없습니다. 광야, 바람 불어 풍랑 이는 갈릴리-- 이런 식으로 말씀합니다. 사실 우리 삶이 좀 피곤하고 어려운 것은 죄악된 세상에서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훈련하실 때 '믿음을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일이 보장 되지 않는 삶을 사는 동안 '염려하지 말라'하시면서 공중의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이 자라나는 것을 "생각하여 보라" 고 하셨습니다. 곧 믿음을 활용하라는 뜻입니다. 본문은 베드로가 풍랑이 이는 갈릴리 바다 위를 '어느정도 걸어갔던' 사건을 소개합니다. 파도 위를 걷는 법을 이렇게 가르쳐 주십니다. 역시 믿음을 활용하는 법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재촉하사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14:22)

본문은 주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셔서 반대편으로 건너가게 하셨다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재촉이라 번역된 말은 "아낙카조anagkazo(헬라어)" 인데 이는 보통 '강제하다, 억지로 시키다, 몰아가다'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별로 원하지 않는데 주께서 그렇게 하라고 강요하셨다는 뜻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매우 궁금해집니다.

이 본문 바로 전에는 그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이 소개됩니다(13-21). 같은 사건이 기록된 요6장에서는 이 놀라운 일이 있은 후 무리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왕으로 삼으려고 하여(요6:14,15)" 주께서 그들을 피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대중적 인기가 치 솟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 역시 사람들에게 매우 위대한 인물로 보였을 것이고 이것이 제자들에게 싫을 리가 없습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이런 상황은 될 수 있는대로 오래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이 그런 분위기에 눌러 앉아 있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구름과 불 기둥으로 인도 되었습니다. 가야하는 방향도 인도 받았지만 머무는 기간도 인도를 받았습니다. 어떤 곳은 오래 머물기 싫었을 수도 있고 반대로 어떤 곳은 떠나기 싫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과 기름 기둥이 머물면 머물러 있어야 하고 또 기둥이 떠 오르면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유익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더 이상 벳세다에서 영웅 취급 받는 것을 포기하도록 하셨습니다. 정당한 높임을 받는 것이 나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무리들이 주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닌 다른 이유로 주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순종의 결과 풍랑

제자들이 얼마나 기쁘게 순종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주님의 뜻에 따라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갑니다. 육로로 가면 그 무리들이 계속 따라올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다지 크지 않은 배 (어선, 두 척 정도면 제자들만 탈 수 있을 것) 를 이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갈릴리 풍랑은 정말 예견하기 어렵게 일어납니다. 한 번 시작 되면 바다가 미쳤다고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필자는 갈릴리 호수 근처에 한 열흘 정도 있으면서 두 차례나 이런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측을 못했다 하더라도 주님은 아셨을텐데도 제자들을 그리 보내신 것입니다. 마치 목자가 양을 단련하고 훈련하기 위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는 것 처럼 그들을 풍랑이는 바다로 내몰았습니다. 주 안에서 시령한 목표가 없는 고난은 없습니다.

불순종 하여 어긋 길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면 '그래서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이 경우는 주님이 가라는 곳으로, 가라는 시간에 떠난 것입니다. 감히 주께 이견을 말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니 묵묵히 갔겠지만 이런 풍랑을 만나면 정말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들은 물결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였습니다(24). 그 고난은 어느 정도 고생이 아니라 "목숨이 매우 위태로운" 그런 극심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언젠가는 내 이야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인생을 가장 평탄하게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조차도 이런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어떤 때는 비교적 잔잔한 파도, 그러나 어떤 때는 미친 파도, 쓰나미 같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것들이 나를 찾아 올 수 있습니다.

마8:23-27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여기 갈릴리를 배타고 지나다 발생하였습니다. 갑자기 풍랑이 일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배 고물(배 뒷편)을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러다가 일어나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시니 곧 잔잔하여졌다고 합니다. 이때는 그래도 주님이 그 배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주님이 어디 계시는 지도 모릅니다. 제자 중에는 어부 출신이 꽤 있으니 그들이 이 상황과 맞서 고군분투 하였겠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만일 주님이시거든 - 주님이시군요!

밤 사경은 새벽 3-4 시 정도입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입니다. 아이들이 밤에 갑자기 열이 나도 이 시간에 가장 열이 높습니다. 고통을 당해도 이 시간이 가장 고통스럽습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그런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죽기살기로 파도와 싸우고 있는데 어둠 속에서 저기서 뭔가 유령같은 것이 배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갈릴리 바다 유령이 나타났습니다. 이런 곳에는 그런 전설들이 있습니다. 중고등학교 화장실 귀신 이야기가 전해내려오는 것 같이 말로만 듣고 평소에 비웃던 이야기가 실제로 눈 앞에 현실이 되어 나타난 줄 알았을 것입니다. 배타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많은 미신적 전설이 있습니다. "앗! 유령이다"

유령이 아니라 주님이셨습니다. 미친 파도 위를 걸어 오셨습니다. 물에 흠뻑 젖었을 것이고 동트기 전 칠흑같이 어두운 때니 주님이신 것을 육안으로 알아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점점 다가오시더니 큰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나다 (나니) 두려워 말라." 마8장에서는 파도를 꾸짖어 잔잔케 하셨는데 이번에는 그 미친 파도 위를 걸어서 오셨습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만일(if)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28)." 주께서 "나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베드로는 그것을 믿지 못한 것인가요? '만일'이라는 말은 흔히 사실과 다른 것을 말할 때나 혹은 의심스러운 어떤 사실을 말할 때 쓰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는 안 의사 보다 더 강한 분이었나 봅니다. 안 의사가 일본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그 아들에게 항소하지 말고 그냥 죽으라고 했습니다. "만일 네가 조국을 생각한다면 항소 하지 말고 그냥 죽으라." 항소한다는 것은 일본 정부를 인정하는 것이고 또 무엇인가 사정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네가 만일 조국을 생각한다면"이라 할 때 이것은 그 어머니가 안 의사의 애국심을 의심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확고한 애국심이 없어 보이는 아들에게는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나는 너의 애국심을 안다. 그러니 일본에 목숨을 구걸하는 듯한 행위를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만일 주님이시거든"이라고 한 것은 아직 그 분이 주님이라는 확신을 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볼 수 없습니다. 베드로의 제안(물위로 걸어오라 하소서)은 그 분이 주님인지 확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이 주님이신지는 그냥 조금 더 기다리면 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으면 그 분이 확실히 주님이신 것이 맞고 만약 못 걸으면 유령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지금 이 상황의 핵심을 파악한 것 같습니다. 주께서 물 위로 걸어오시는 행위를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 알아 차린 것입니다. 얼마 전 (마8장) 풍랑을 꾸짖어 잔잔하게 하신 주님을 직접 경험하였습니다. 그 분이 풍랑 속에서 물 위를 걸어오십니다. 풍랑은 하나님에 의해 잔잔해 질 수 있다는 것과 같이, 주님은 그것을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게 된 것 같이, 이번에는 주께서 제자들에게 "풍랑 위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을 그는 희미하게나마 알아차렸습니다. "주님이시군요(확신함). 주님처럼 저도 물 위를 걷게 하소서!"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주님은 제자들이 물 위를 걷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인생의 풍랑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두려워하거나 그 속으로 빠져들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베드로에게 무섭게 파도가 이는 물 위를 걸어오라 하셨습니다. 신기하게도 베드로는 물 위를 걷습니다. "걷는다"는 것은 순간 동작이 아닙니다. "그는 물 위를 걸어 예수께로 갔습니다( he walked to(toward) Jesus)." 거리 상 얼마나 멀리, 시간 상 오래 갔는지는 몰라도 그는 풍랑 위를 어느 정도 걸었습니다. 단 1초 만이라도 혹은 1 m 라도 사람이 아무런 장비 없이 파도 위를 걷는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물에 들어가는 즉시 빠져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 베드로는 물에 빠져들어갔습니다(NIV. beginning to sink). 이것도 순식간에 쏙 빠진 것이 아니라 '점점 빠져들어간 것"입니다. 빠지기는 하였으나 그 장면 역시 기적입니다. 사람은 물에 이렇게 "빠져들어가지" 않고 그냥 쑥 빠집니다.

물 위를 어느정도 걷던 베드로가 물 속으로 빠져들어간 이유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예수께로 가던 그가 "바람을 보고(seeing, 현재분사)" 무서워(두려워) 빠져들어갔다고 합니다. '산더미처럼 큰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보고' 뻐져들어간 것이 아니라 '바람'을 보았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바람(헬, anemos)은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 (돌풍 같은)을 말합니다. 이런 바람을 두려워 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조금 더 생각해봅시다. 갈릴리 풍랑은 주로 이런 바람에 의해 일어납니다. 갈릴리 호수에 인접한 산악지대 계곡과 계곡에서 바람이 모여 들어 이런 돌풍을 일으킵니다. 이런 바람은 지속적으로 계속 부는 것은 아닙니다. 예측하기 어려운 순간에 어디서 불어오는지도 모르게 간헐적으로 불어 옵니다. 베드로가 봤다고 하는 그 바람은 지금까지 없던 바람이 갑자기 최초로 부는 것이 아니라 풍랑이 일어날 때부터 간헐적으로 불어온 것입니다. 단지 베드로가 물 위로 내려가 걷기 시작했을 때는 이 바람이 잠깐 잦아들은 것 같습니다.

잠시 잦아들었던 바람이 또 불었습니다. 풍랑이 일든지 아니면 잔잔하든지 사람은 물 속에서 헤엄을 칠 수는 있어도 걷지는 못합니다. 잔잔한 바다를 걷는 것은 비교적 작은 능력이 필요하고 높은 풍랑이 이는 바다를 걷는 것은 큰 능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둘 다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바람이 없으면 계속 걸을 수 있고 바람이 일어나면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없어도 이미 엄청난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람 때문에 물 속으로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베드로의 손을 잡으시며 "바람"을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적은 믿음"을 언급하셨습니다. 바람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데 필자는 계속 해서 이런 의문이 듭니다. 이런 돌풍이 불면 파도가 높아집니다. 그러면 높아진 파도 혹은 밀려오는 파도를 '보고' 두려워했다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왜 '잘 보이지 않는 바람을 보았다'고 표현 하였을까요? 짐작이지만 실 상황보다는 베드로의 '마음이나 느낌'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실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실제보다 훨씬 더 두렵게 느껴지는 수가 있습니다. 이미 두려움으로 가득찬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면 '바람이 더욱 무섭게 보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본다(헬, blepho 로서 여기서는 현재 분사형 seeing)"입니다. 그는 강하게 느껴지는 '바람' 때문에 주님을 바라보던 그 시선을 놓쳤습니다. 그는 주님을 보고 물 위를 어느정도 걸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시력으로는 잘 파악하기도 어려운 바람을 보고 빠져들어갔습니다. 다르게 번역을 한다면 "그가 바람을 볼 때" 빠져들어간 것입니다. 마 6:26에는 주께서 그 백성들에게 염려를 없앨 수 있는 방법으로 "공중의 새를 보라(헬, emblepho)"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구절에서 "백합화를 보라(생각하여보라, 헬, katamandano)"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새를 보라" 할 때 본다는 것은 베드로가 "바람을 보고"에 쓰인 것과 어근이 같은 것으로(blepho emblepho 차이) "주목하다"정도의 말입니다. 백합화를 "생각하여보라"는 말의 의미는 특별히 그 안에서 종교적인 의미를 고찰한다는 의미입니다. 주께서 마6:26의 새를 보라는 말을 28절에 '생각하여보라'라는 말로 다시 한 번 설명하심으로 "본다"라는 말이 단순히 자연의 아름다움을 깊게 관찰하는 수준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 차원에서 깊이 생각하고 적용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보라"를 정리하면 이것은 시력을 통해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하나님을 읽어내라'는 뜻입니다. '주만 바라볼지라'라는 기독교인 애창곡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저에게 주를 '바라본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분 참 존경스러웠습니다. 그 분이 대충 감은 잡고 있었겠지만 그것이 그에게 절실한 문제가 되니 좀 더 명확하게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좀 더 확실하게 믿음을 활용하고 싶은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믿음으로 이기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시력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주를 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능력, 지혜의 차원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해석 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 분이 하신 일 속에 나타나며 그 일은 성경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 내 인생아

어떤 분은 지독하게 가난한 집에서 태여 나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상당히 명석한 분이지만 아래로 동생들 공부시키기 위해서 공부도 포기하고 살림을 도맡아 하다가 입이라도 하나 줄여보겠다고 남의 집에서 식모(입주하여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 하면서 사는 사람) 살이를 했습니다. 후에 결혼 하였으나 남편이 무능하여 또 고생하였습니다. 그러다 병도 얻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웃의 권유로 나와 본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과거를 회상하면 서럽기 한이 없어 그저 눈물만 나옵니다. 교회 나오기 전에는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하여 술 좀 마셔도 누가 뭐라 하지 않으니 시시때때로 술로 마음을 달래고 살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밤 "밝은 달만 바라보면" 이 일 저 일이 생각납니다. 서럽고 비참한 기억 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베드로처럼 바람을 보면 아픈 모든 기억이 되 살아나면서 자신의 삶을 저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 스스로는자신을 저주 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여러가지 모양으로 삶 속에 나타납니다. 사나와 지고 잔인해집니다. 사랑할 줄 모릅니다. 자기도 모르게 마음 속에 칼을 품고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리고 지금도 도우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의 삶을 해석하면 달라집니다. 서러웠던 기억이 있으나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절묘한 능력과 지혜와 사랑이 함께 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위기의 순간에는 자신이 항상 버려졌다고 생각하였지만 하나님의 손이 앞에서 위에서 도우시고 아래서 받쳐 주셨던 것을 알게됩니다. 주를 바라봐야 비로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어렵지만 헤쳐 나가게 하셨고 견디게 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됩니다. 지금도 그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압니다. 나를 귀히 여겨준 사람이 없지만 주님은 나를 위해 피를 흘리셨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매우 현명하게 모든 삶의 순간에 적용할 줄 알게 됩니다. 그 결과는 한숨이 아니라 찬양이요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찬송가 370,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로 시작되는 2절 가사는 이렇습니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 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 지나간 일들은 바뀔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주던 두려움과 한숨은 감사와 찬송으로 변합니다. 주를 보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바람을 보고있으면 괴로움은 여전히 내 안에 큰 상처로 남아 나 자신과 남을 한없이 괴롭히고, 또 그런 비슷한 그림자만 보여도 자지러지고 놀라고 불안해 합니다. 염려에 사로 잡혀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주를 바라보면 미친 파도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바람을 보면 빠져들어갑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사랑으로 마음을 (생각에)가득 채우면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근심 걱정이 시시각각으로 몰려오기는 하지만 말씀으로 그것과 싸우며 '주께서 원하시는 삶을 유지하고 그곳으로 갑니다.' 그러나 세상 원리로 채우면 한 발작도 내 딛을 수 없습니다.

항상 주를 묵상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를 묵상할 수 있을 만큼의 성경 지식으로 채우시고 항상 성령의 인도하심을 민감하게 받으실 수 있도록 기도를 쉬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삶, 살아온 삶도 그렇고 앞으로 가야 할 길도 풍랑이 이는 바다와 같습니다. 심한 파도와 비교적 잔잔한 파도가 교대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 풍랑 위를 걷는 자 되기 바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통해 그것을 보여 주십니다. 풍랑이 여러분의 발목을 잡지 못하게 하십시오. 살아있는 믿음은 그것을 하게 합니다. 좀 무섭고 두려움이 남아 있다 하다라도 주만 바라보고 가야할 길을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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