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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돔.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옵1:1-21<오뱌다서 해설>


오바댜 서는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게 설교나 QT 에 즐겨 읽히지 않고 있습니다. 마치 창고에 넣어둔 보물, 보물인 것은 확실한데 언제 세상 빛을 볼지 모르는채로 저 구석에 잘 간직된 것과 같이 취급되기도 합니다. 저 역시 30여년 설교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바댜 서를 본문으로 설교한 것은 한 두차례 밖에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뱌다 서를 본문으로 하는 설교도 별로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다소 반성하는 마음으로 오바댜 서에 감추어져있는 보물 함을 열어보려고 합니다.

오바댜 본론으로 들어가면서

오바댜는 '여호와를 섬기는 자'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동명이인이 12명 정도가 있다고 하는데 대부분 제사장의 이름들입니다. 다른 선지자처럼 그가 활동하던 시기에 대하여 정보를 주지 않기 때문에 잘 알 수는 없지만 에돔이 유다를 배신한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여 꾸짖고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함락 되던 시기가 아닌가 보고 있습니다. 또 예레미야 9:7-22, 특히 7,9,14-16은 옵1:1-7과 평행구절을 이루기 때문에 두 사람 중 한사람이 누가 먼저 쓴 것을 인용 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거의 동시대에 서로 교감을 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유다의 멸망을 방관하고 기뻐하는 에돔에 대하여 하나님의 준엄한 꾸지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함락된 이후, 그리고 아직 에돔이 멸망하기 전(에돔이 비벨론에 의해 멸망한 것은 553 BC, 예루살렘 함락은 586 BC) 의 기록으로 보고 있습니다.

주된 내용은 에돔(에서의 후손)이 유다를 멸망 시키려는 바벨론에 협력하고 또 유다의 멸망을 기뻐하였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진노의 불과 잔을 보내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저 국제관계 속에서 국익에 따라 바벨론을 도와 유다 멸망에 협조 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뜻대로 되자 그것을 매우 기뻐하고 환호 하였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뜻대로 되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로 하나님은 그들의 대적이 되었습니다. 그곳에도 지혜자 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유다의 선지자 만큼은 아니라도 욥에게 와서 나름대로의 신앙원리를 설파 했던 친구들 중 똑똑한 에돔 사람이 있습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 할 때 바로 그 데만이 에돔 땅에 있습니다. 에서의 후손입니다. 그 땅에 이런 지헤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이런 에돔의 만행을 저지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모든 지혜는 어두워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서툴게 나마 살펴주는 지혜자도 없었는가 봅니다. 이것은 일종의 하나님의 심판이며 동시에 큰 심판이 임하는 징조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

오바댜 서는 단 한장이며 21절로 구성되어 있는 분량이 적은 책입니다. 그러나 이 속에 어마어마한 것이 있습니다. 설교 한 편으로 다 할 수 없어 그 중에 중요하다고 보이는 것 몇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2-14절에 히브리어 "알(al)"로 시작되는 문장이 8개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백성이 패망하던 날"이라는 똑 같은 문구가 3번 반복됩니다. 이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8개는 그냥 쓰다보니까 8가지가 생각난 것이 아니라 특별히 그렇게 쓰는 것입니다. 이를 소위 학자들은 "수 점층법(graded numerical saying)"이라 합니다. 7은 완전수입니다. 여기에 하나를 더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것에 하나를 첨가한 것으로 '완전 그 이상을 말하고자 하는 유대인의 수사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알(al)은 "--이 아니다'라는 표현입니다. 원문에는 그 뒤에 따르는 문장의 동사가 미완료 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이긴 하나 그것을 거역하였기 때문에 하나닝의 심판이 임하는 것임으로 문맥상 "이미 저지른 죄"를 지적하는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에돔! 너희는 <내 백성이 패망할 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 구절들을 여기에 보여드리겠습니다.

(1) 네 "형제"의 날 곧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방관하지 말았어야 했다.12). 에돔 사람 중 일부는 형제 유다가 죽던 말던 남의 일처럼 방관하였습니다. '내 일이 아니니까'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진노 하신다는 것을 에돔이 알았어야 합니다.

(2) 유다 자손이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기뻐하지 말았어야 했다). 기쁨은 항상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울어야 할 때 웃는 것, 웃고 기뻐해야 할 때 우는 것은 범죄가 될 수 있습니다. 유다의 멸망에 참여하지 말았어야 하고, 또 그것을 보면서 애통 했어야 합니다.

(3) 그 고난의 날에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며 (환호하지 말았어야 했다). 얼마나 즐거우면 이렇게 기쁨을 감추지를 못할까요? 형제 유다의 비통 함이 클수록 그들은 더욱 기뻐 했던가 봅니다. 사악한 기쁨을 맛보려면 얼마나 사악해 져야 할까요?

(4) 그 날에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 13). 예루살렘이 함락 되었을 때 바벨론 편에 서서 정복자로서 입성 했던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의기양양하게 형제 유다의 장수의 머리를 들고, 형제 유다를 포로로 잡아 끌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5) 그 고난의 날에 방관하지 아니하며(방관하지 말았어야 했다). 어떻게든 도움을 주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입장, 유익 등을 계산 하면서 마치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6) 그 날에 재물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그것에 손대지 않았어야 했다). 약탈까지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7) 그 날에 도망하는 자를 막지 않을 것이며(막지 말았어야 했다,14). 도망하는 형제를 막아 섰던 모양입니다. 원수라도 이미 전쟁에서 지고 도망을 하면 퇴로를 적절하게 열어주는 법입니다. 왜 이렇게 악착같이 유다를 공격하는 것입니까? 그들은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8) 그 남은 자를 원수의 손에 넘기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에돔은 형제 유다의 남은 자가 도망 하는 것을 막아 섰을 뿐 아니라 기어이 그들을 잡아 원수의 손에 넘겨주었습니다.. 바벨론이 그들에게 온갖 잔인한 짓을 할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8가지를 열거하는 것을 보면서 이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의 표정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7가지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된 "이 악하고 특별한 죄악" 8가지로 인하여 하나님은 그들을 결코 그냥 두시지 않겠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마구 들어마시는 죄의 잔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술을 "마신다"는 말입니다. 마신다(shatha)가 세 번 반복되고 16절 마지막에는 이 '마신다'와 '삼킨다(looa)'를 합하여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마구 퍼마시는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리고 '삼킨다(looa)'는 히브리어는 술을 거나하게 마시며 삼키는 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라고 합니다. 죄의 잔을 이렇게 겁도 없이 벌컥벌컥 꿀꺽꿀꺽 삼키는데 만국민이 다 그렇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잔을 마시는데 땀이 피가 되도록 고민하시고 괴로워 하셨지만 이들은 벌컥벌컥 잘도 들어마시고 있습니다. 죄의 잔은 필연적으로 심판의 잔이 됩니다. 마신 만큼 불이 내릴 것입니다.

다시 위로 올라가서 그들이 그 형제가 망하는 날 왜 이렇게 방관하고 기뻐하고 좋아 어쩔줄 몰라했을까요? 그리고 왜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는 심판의 원인이 될까요? 하나님께서는 에서와 야곱을 형제라 일컬으시고 '대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 후 가나안에 들어갈 때 에돔 땅을 지나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두려워 할 것이니 너희는 깊이 삼가고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세일산(에돔의 땅)을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었기 때문이라(신2:4-6)." 심지어 먹을 물이나 양식도 요구하지 말고 "돈 주고 사 먹으라(2:7)"고 하셨습니다. 조금도 피해를 주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 구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후 '우리 동족' 에서의 자손을 떠났다(2:8)." 분명히 에돔을 유다의 동족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돔에게 주신 은혜와 명령

모압과 암몬은 이스라엘의 회중에 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에돔은 이스라엘의 형제로 대우하셨습니다. 위에 언급한 신명기 2장 기사와 관련한 민20:20 이하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에돔 땅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에돔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물이나 양식을 돈 주고 사 먹을 것이고 재산 피해를 전혀 주지 않고 통과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에돔 왕은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만약 자기 땅에 들어오면 칼을 가지고 나가겠다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냥 멀리 돌아갔습니다. 큰 전쟁이 벌어질 뻔 했지만 이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 하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형제 관계를 유지하도록 "명" 하셨습니다. 에돔이 유다를 공격하는 것은 형제끼리 있을 수도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는, 다시말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알게 모르게 에돔에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보호 인도 하셨습니다. 그럴 가치가 있겠는가 싶지만 그것은 우리가 생각할 일은 아닐 것입니다. 신2:12에는 호리 사람들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에돔이 호리 사람을 쳐서 내 쫓고 그 땅을 차지 하였다고 합니다(12). 그것이 에돔 땅인데, 그러나 바로 뒤 22절에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호리 사람을 쳐서 멸해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돔은 자신들의 능력으로 한 줄 알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후손에게 가나안을 주신 것같이 에서의 후손에게는 지하자원이 많은 에돔 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은 그 은혜를 배신하는 행위입니다.

에돔의 형제 유다에 행한 만행

그런데 이상하게도 에돔은 늘 유다를 적대시 하였습니다. 참 이상한 것은 이것입니다. 렘27:3에는 바벨론을 대항하기 위하여 서로 협력 하기로 한 주변 나라 왕의 사신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던 사실이 있었다고 가르쳐 줍니다. 여기에 에돔의 사신이 와 있었습니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바벨론을 대적하기 위하여 유다와 협조하였습니다. 그런데 시 137:7에는 예루살렘 함락을 한탄 하면서 그 저자가 "여호와여 에돔을 치소서"라고 우는 것처럼 말합니다. 유다가 멸망할 때 에돔이 한 짓을 회상하는 것인데 유다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만행 이었던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를 내다 보고 "에돔의 심판"을 예언합니다(사34:5-17). 예레미야 역시 이런 등의 이유로 에돔을 향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선고합니다(렘49:7-22). 이사야는 사건을 예견하고 미리 예언하는 것이지만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함락을 눈으로 목격한 사람입니다. 그 때 에돔이 무슨 짓을 했는지 똑똑히 본 사람으로서 그 심판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오바댜도 이를 목격한 사람이 아니겠나 생각 합니다. 말1:2-5에도 에돔을 저주합니다. "다시 쌓는다고? 쌓아 보시지. 여호와께서 또 헐어버리실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형제에게 한 일을 하나님이 아십니다.

예루살렘이 망하기 불과 몇 년 전에 유다에 와 연합해서 바벨론에 같이 대항 하기로 했던 형제요 친구인 에돔이 갑자기 왜 바벨론 편에 붙어서 유다 침공을 돕고 또 약탈하고 그 형제의 고난을 보고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을까요? 그들에게 형제애, 우정, 신의는 걸레같이 버려져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바벨론에 대항 했다가는 큰 일 날것이라는 정치적 판단을 했을 것이고 또 유다에 잔인하게 대할 수록 바벨론이 좋아하여 여러 혜택을 베풀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고, 또 역사적으로 오랜동안 마음에 쌓아두었던 야곱에 대한 에서의 피해의식이 이렇게 잔인한 보복심과 적개심으로 작용을 한 것 같습니다.

이 전에도 에돔은 계속해서 유다를 괴롭혔습니다. 일만 있으면 기회를 타서 훼방을 하였습니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도 기다렸다는 듯이 개입합니다. 르호보암 왕 시대에 애굽의 바로 시삭이 공격 하였을 때 이때 또 끼어들어 유다를 괴롭혔습니다. 아하스 왕 때 그들은 유다 땅을 침략하였습니다(대하 28:16-18). 풀리지 않고, 풀려고 하지도 않는 어떤 열등감에서 나온 박탈감,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만이 자신을 속이다

이들은 이런 일에 가책을 못 느꼈을까요? 그러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형제이기도 하고 또 하나님의 특별한 명령이 있었음으로 어느 정도라도 '죄의식'을 느껴야 맞습니다. 그들은 유다의 고난을 방관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는 것입니다. 방관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그들의 멸망을 기뻐하고 입을 크게 벌려 환호하였습니다.그리고 예루살렘이 함락 되었을 때 바벨론 군대와 함께 정복자로 입성하여 재물을 약탈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헌신짝 같이 내 던졌습니다. 그리고 원수라도 도망할 때는 후퇴의 길을 열어줍니다. 이미 이긴 전쟁에서 두 손을 든 자들까지 죽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라나 동족이요 형제인 유다 인이 도망할 때 그 길을 막아 섰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을 원수의 손에 넘겼다고 합니다.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면서 승리에 취해있고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습니다.

그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셨습니다. 그리고 심판을 선언 하셨고,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듯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오바댜를 통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1:3)" 이어지는 심판의 말씀을 보십시오. "교만으로 부풀어 스스로 가장 크게 생각하고 있지만 너는 가장 작아질 것이고 크게 멸시 받을 것이다(1:2)." 작다는 말은 보잘것없음을 의미하고 멸시 받는다는 것은 비웃음 거리가 될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무서운 심판을 선고 하시는데 여기에 '혹시(만일, i:m)'라는 말이 쓰입니다(1:4,5). 에돔이 그렇게 말한 것을 그대로 받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절에서 에돔이 "네가 ('혹시'라는 말이 있으나 우리 성경에는 생략) 독수리 처럼 솟아오르면 누가 나를 끌어내리겠느냐 하겠지만 내가 너를 끌어내릴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5절에는 "혹은(만일)"을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에돔의 교만을 비웃는 말임과 동시에 '피할 수 없는 심판'을 선고하는 것입니다.

"혹시(만일) 도둑이나 강도가 온다면 조금 가져 가겠나?" 가져갈 만큼 다 가져갈 것입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혹시(만일) 포도 따는 자가 포도를 따면 조금 따고 가겠는가" 물론 아닙니다. 다 따갈 것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좀 그러다 멈추겠는가? 적당히 피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절망하지 말자는 일종의 격언의 성격을 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피할 방법도 없고 면할 방법도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내린 재앙을 누가 피합니까?

아무리 은밀한 곳에 보화를 두어도 감추어지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5). 다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다 빼앗길 것입니다. 숨길 수도 없고 감추어질 것도 없을 것입니다. "너와 약조한 자들, 화목 하던 자들이 너를 배반 하리라(7)" 말씀 그대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유다가 망한 것은 586 BC 입니다. 에돔은 그로부터 33년 후인 553 BC 바로 그 친구로 여겼던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합니다. 고작 33년 부귀 영화 때문에 형제를 그렇게 대하였습니다. 에돔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그런 "믿음"생겼는지 모르지만 혹시 자신들에게 어려운 일이 있다하여도 대충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런 근거없는 믿음이나 자신감은 어디서 생긴 것 일까요? 이들의 이같은 교만은 어디서 생긴 것 일까요?

"높은 곳 바위 틈"이라 불리는그들의 요새가 그들의 교만의 근거이며 하나님 앞에 배짱 좋게 은혜를 멸시하게 한 것 같습니다(1:1-2). 오늘날도 사람들은 요르단에 '페트라'라는 곳을 관광 합니다. 바로 에돔 사람들이 하나님보다 더 믿었던 그들의 요새입니다. 1700m 고지에 위치하고 있는데 한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입구가 1Km 이상 계속됩니다. 필자도 그곳에 가본 적이 있는데 이런 요새를 공격 하려면 공수부대의 공격 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옛날에 무슨 비행기가 있었겠습니까? "바위 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2)"들은 이것을 지나치게 믿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보다 그들의 요새를 더 믿었습니다. 훈련된 군사력을 믿었습니다. 어처구니 없게도. 그 능력 앞에 하나님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후 정말로 얼마 후 바벨론 군대에게 멸망 당했고 나중에 나바티안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거주 하였는데 이들 역시 로마에 의해 멸망 당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정복되지 않는 요새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릴 수 있습니다. 홍해도 갈라지고 요단도 멈춥니다.그들의 교만의 근거가 겨우 "바위 툼에 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교만 하다고 꾸짖는 것이 아니라 "교만에 속았구나"라고 한탄하십니다. 그것이 정확한 표현인인 것같습니다. 교만에 속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교만에 대한 말씀 만큼 우리에게 경계를 주시는 것이 또 있을까요? 잠 16:18에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 하였습니다. 교만 하다는 것은 눈이 먼 것을 말합니다. 왜 그리 어리석고 바보같을까요? 다른 사람은 다 보는데 왜 자신만 자기를 못볼까요? 눈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왜 눈이 이 지경이 될까요? 교만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잠11:2에는 "교만이 오면 욕도 온다"고 말씀합니다.

교만의 정체

교만은 첫째, 대부분 허영심에 의해 조작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 집에 자주 오던 어떤 아저씨는 아들이 면 사무소에 다닌다는 이유로 거의 안하무인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이미 떠난 기차를 다시 불러오라고 역무원에게 호통을 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를 보는 모든 사람이 비웃는데 자기 혼자 만 당당합니다. 어린 저의 눈에는 그 아저씨의 여러 말들을 들어보면 오히려 그런 조롱을 즐기는 듯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부러워 하는 것으로 알고 또 그 정도 훌륭한 자식을 둔 사람은 그 정도 공격을 받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있었습니다. 수시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특별히 그에게 어떤 재앙이 임한 것은 보지 못했지만 주변의 조롱과 무시를 볼 때 그는 이미 그 교만의 벌을 충분히 받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존중하거나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막된 표현으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둘째, 남이 흔히 갖지 못한 비교적 특별한 것이 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반드시 교만이 되어 자신의 삶을 불행하게 합니다. 압살롬은 처음 소개 될 때 잘생기고 특히 머리카락이 남 달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잘생긴 외모로 인해 사람들의 호감을 사고 지지를 받게 되어 죄악 된 야망이 무럭무럭 자라다가 마침내 아버지에게 칼을 겨누는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누가 봐도 패역한 일임에도 교만한 자들은 교묘한 명분을 만들어 기어이 그 짓을 하고야 합니다. 또 그 자랑스러운 머리칼이 상수리 나무에 걸려 대항도 못하고 요압의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자랑거리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워 하던 것이 결국 올무가 되었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인생은 흙덩어리 만으로도 교만해 집니다.

교만을 두려워하라

형제를 멸시하고, 형제의 어려움을 방관하고, 즐거워하고, 공격하는 즐거움에 입을 크게 벌리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문책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관계가 삐걱거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감히 나를 끌어내릴 수 있겠는가? 나의 적수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됩니까? 잠시 후에 포도 따는 사람이 올 것이고 도적과 강도가 올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가 필요한 것만 적당히 가져가지 않을 것입니다. 심판을 피하는 길은 교만을 버리는 것입니다. 근거도 없는 교만. 이 병을 치료받으십시오. 심령이 가난하게 되어야 복을 받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교만을 경계하고 두려워 하십시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믿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이 맞다면 말씀으로 모든 것을 다 멸하실 수 있습니다. 바위 높은 곳에 산다고 그것이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지능 지수와 경험을 믿지 마십시오, 지금까지는 그것으로 성공적으로 살았을 수도 있으나 앞으로도 그렇게 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죽은 적이 없으니 앞으로도 죽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고 믿는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말씀 안에 거하십시오. 말씀을 두려워 하십시오. 안하무인처럼 살지 않도록 하십시오. 오바댜가 오늘 우리에게 그렇게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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