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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 약5:7-11


인 내 약5:7-11

본문 해설을 한 후 우이동교회 담임 박병덕 목사의 설교를 소개합니다.

야고보서의 배경

저자라고 밝힌 야고보는 동명이인이 많으나 대부분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로 보고 있다. 그가 로마서의 내용과 달리 행위에 관한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은 바울의 신학과의 차이점 때문이 아니라 로마서의 중심으로 보이는 ‘이신득의’에 대한 오해 혹은 수준이 얕은 이해에 대하여 믿음의 참 의미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신득의’와 같은 교리는 당시 매우 낯선 것 일 뿐 아니라 파격적인 것이기 때문에 여러 오해를 불러일으켜 조롱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야고보의 설명을 통해 이신득의의 참된 의미가 더 깊이 전해지고 있다.

이로 볼 때 야고보서는 로마서 보다 후에 기록된 것인데 이 시기는 네로 황제의 박해가 극심하였을 때이다(네로 58-68 AD). 이 박해는 기독교인 뿐 아니라 유대인들도 겨냥된 것이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 속에 있는 유대인(기독교인 포함)들은 유대인 전통에 따라 암살단이 다시 조직되어 크고 작은 일들을 하였으며, 오래 동안의 학정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마음의 여유를 잃고 크고 작은 일에 노골적인 분쟁을 하는 등 사회적으로 매우 분위기가 위험해져 있었다. 심지어는 종교 지도자들까지도 온건 노선과 강건 노선으로 나뉘어 심지어 무장한 채 부딪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또 오랫동안의 박해에 시달리면서 믿음의 원리가 흔들려서 교회 안에서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원리, 즉 가난한 자들을 위하는 분위기마저 사라지는 등 회의적인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런 와 중에 “믿음이 있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는 악용되어 타락을 부추길 수도 있었다. 흩어져 있는 교회 지도자들이나 성도들을 접하면서 이런 분위를 읽은 야고보가 이런 서신을 기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본문 해설

5-11절에는 중요한 동사가 3가지가 등장한다. 길이 참으라(7), 마음을 굳게 하라(8) 그리고 본 받으라(10)이다.

(1) 참으라(마크로뒤메오)라는 말은 능동적으로 참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무엇에 대하여 인내심을 갖되 인내 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어 인내 할 수 있다. 이것은 수동적으로 참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냥 죽은 듯이 가만히 있으라는 패배적이고 어느 정도 비겁한 자세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인내의 기한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라고 하였다(7). “내일까지, 상황이 좋아질 때까지”가 아님을 눈여겨보자. 주께서 강림하시는 것은 모든 것이 최종적으로 판단되는 때이다. 세상 끝 날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그 인내는 인간의 참을성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원리라는 것이다. 10절에 선지자들의 인내, 11절에 욥의 인내는 바로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주께 맡기는 원리를 중심에 가동시키라는 것이다.

그 신앙의 원리로서 “농부가 기다리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말하고 있다. 농부가 아무리 기술이 좋고 성실하고 열심히 있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이른 비와 늦은 비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닌 것과 같다. 하나님의 역사 없이 사람들이 아무리 노력하고 지식을 동원해도 그것은 조금 있으면 말라 버리는 속이는 시내에 불과한 것이다(아랫부분에 선지자와 욥의 인내 참고).

(2) “굳게 하라(스테리조, 8)”는 단단히 고정시키는 것을 말한다. 확고부동한 자세를 의미할 것이다. 배가 닻을 내리듯 어떤 풍조에 이리 저리 요동하지 않도록 믿음에 자신을 확고하게 붙들어 매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작은 일에도 흔들릴 수 있다. 어제까지는 잘 참았던 것을 오늘은 더 이상 참지 못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는 데는 주변의 수많은 요인들이 작용한다. 주변이 나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 믿음의 닻을 내리고 스스로를 굳게 하라는 뜻이다. 쉬지 않고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해야 가능할 것이다.

(3) “본받으라(10,11)”고 말한다. 주의 이름으로 말하던 (선배) 선지자들의 인내를 본받고 특히 성경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욥의 인내를 본받으라고 말씀한다. 선지자들은 ‘참을 수밖에 없어 참은 것’이 아니라 주를 기다리는 믿음으로 참은 것이다. 그의 인내심의 한계는 의지의 용량에 따른 것이 아니라 믿음의 용량과 관련이 있다.

욥도 “원망(10)”하였으나 그 원망마저도 멈추었다. 욥38장에 드디어 여호와께서 욥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3)?” “네가 너의 날의 아침에게 명령하였느냐(12)?” “네가 바다의 샘에 들어갔었느냐(16)?” 39장까지 연결되는 하나님의 질문을 보라! 40장에 드디어 욥은 입을 다물게 되었다. “손으로 입을 가릴 뿐입니다(40:4)”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귀로만 들었으나 이제 여호와를 눈으로 보나이다(42:5)”라는 고백은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다.

여러분은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 중 ‘태초’가 언제인지 아는가? ‘창조’가 무엇인지 아는가? 낱말 뜻을 묻는 것이 아니라 창조라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 아는가 묻는 것이다. 창조를 본 적이나 있나?

중국 기독교인들이면 거의 다 아는 그들의 찬송이 있다. “집에 있든 멀리 나가있든 여호와께서 한가지로 보호 하신다”는 내용인데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마친다. ‘워먼 이셩 멍러 따 푸’ 즉 ’우리들의 모든 생애는 여호와께서 주신 큰 복으로 들러 싸여 있다.’ 그렇게 보호하시고 삶을 주관하시는 분이 "태초부터" 계셨고 "창조주"이시다. 믿음의 닻을 여기에 내리고 스스로 굳게 하고 능동적으로 인내하라. 욥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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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원리를 잘 반영한 우이동교회 담임 박병덕 목사의 2017년 8월 16일 주일 낮 예배 설교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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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야고보서는 “인내 찬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찬가가 아니라 “인내 찬가”입니다. 자신의 유명한 편지의 첫 주제로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냄”(1:3)이라고 하면서 인내 습득 비용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주장을 합니다. 게다가 1:12절에서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고, 5:11절에서는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라고 하여 자신의 긴 편지에서 “복되도다”라는 감탄은 오직 “인내”라는 미덕과 “그 미덕을 실행에 옮기는 용감한 사람들”에게만 부여했기 때문입니다.

서신 내에 다른 굵직한 주제들(“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바람직한 언어 사용”, “빈부격차에 따른 차별대우는 반신앙적이다”) 역시 상당히 중요한 것들이지만 오늘의 주제인 “인내”가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이처럼 중요한 인내는 “귀한 열매”(7절)를 맺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갈라디아서의 바울의 주장은 인내 자체가 성령의 함께 하심의 표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첫째. 교회의 종들은 분노를 인내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분노 폭발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라고 유도하는 문화적인 탁류가 주류가 된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듭니다. 뉴스에서는 그런 불행한 일들을 간간히 전달하면서 우리의 드라마와 영화와 음악은 그런 것을 부추기는 것으로 보입니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일은 여러 가지 해석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모세가 그날 그곳에서 참지를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은 이 게으르고 나태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무리에게 친절하게 말을 할 아무런 이유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해 온 것만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베푼 친절과 호의 말입니다. 모세는 그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바로 앞에 자신을 나타냈습니다. 과거에 그는 왕실 가족이었고 살인과 민족 반역자라는 죄목으로 40년간 도망자로 살았습니다. 그를 찾던 바로가 죽었다고 하지만 그 자신을 바로 앞에 등장시키고 신으로 숭배받던 바로에게 가서 그가 결코 승락할 리가 없는 청원을 반복해서 요청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 일을 했고 성공을 했고, 그래서 지금 광야 한 복판에 들어와 자유로의 여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간섭과 개입을 경험한 사람들의 공동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파렴치하고 가볍습니다. 역겹습니다. 상대 못할 무례한 인사를 대하는 그런 느낌일 것입니다. 그 순간 모세는 뻗쳐오르는 노여움과 분노를 참아 낼 수 없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물을 주랴!” 그 온유한 모세도 그 백성의 패역 앞에 할 말을 다 잃고 참을 힘을 다 잃고 맙니다. 그의 지팡이로 바위를 내려칩니다. 두들겨 팹니다. 그가 지금 화가 났음을, 그가 지금 분노해 있음을 모든 사람들이 보고 알 수가 있었습니다. 모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이 저는 당연하고 응당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해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이 불편해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들한테 그 정도 해주는 것이 나쁘지 않아!”, “모세야 너 참 그 동안 잘 참았다”, “너가 그렇게 한 것 이해한다”, “그 정도 한 것도 잘 참아 준 것이지”, 혹은 “모세 나는 네 편이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느끼시느냐가 중요하지. 마땅히 교회의 종은 분노를 인내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자녀들은 서로 원망하는 것을 인내해야 합니다.

9절에서는 “인내”와 “원망”이라는 주제가 만납니다. 야고보 사도는 특히 “원망의 말”을 “인내”할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인내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중에 야고보는 “서로 원망”하는 것을 인내하라고 구체화하여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렇게 해 주어야 일이 진행이 무리 없이 될 것이하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공동체를 전제로 한 권면입니다. 교회와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 원망하지 말라고 강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까지 주장을 합니다.

공산주의 철학을 반대하는 가장 주요한 이유들 중의 하나는 이 사회의 문제가 내가 아니고 나 아닌 다른 누구 때문이라는 생각의 방식 때문입니다. 자기가 아니라 누군가 다른 이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가르치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나 때문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자신을 바꾸고 개발하고 고칠 것을 요구합니다. 원망은 다른 사람에게 문제의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는 아주 편한 방식의 삶입니다. 아무 것도 성취하거나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런 삶의 태도로는 말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매우 엄하게 말씀합니다. 원망이라는 것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고,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어떤 것으로 묘사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 말라고! 그치라고! 멈추라고! 멈추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셋째. 주의 제자들은 어려움 속에서 인내해야 합니다. 11절에서 야고보 사도는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라고 말씀하면서 성경에서 가장 큰 고난을 당한 사람, 이유를 알 수 없는 환란을 경험한 한 사람 욥과 “욥의 인내”를 동시에 등장시킵니다.

그는 이러한 고난 속에서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전 역사가 기억하고 잊을 수 없는 순결하고 위대한 신앙 고백을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십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것입니다”. 범인은 근접 조차 할 수 없을 것 같은 신앙으로 똘똘 뭉친 인간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욥은 우리가 주일학교 시간에 배운 대로 그렇게 완벽하게 방어전을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욥기 앞의 석장 정도에서는 완벽해 보였지만 그러나 나머지 장들에서는 욥은 비틀 거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출생을 원망하고 저주하며 친구들에게 자신의 무죄함을 강조합니다. 그런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긴 것을 이해할 수 없어 하며 하나님 앞에 따지기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침묵과 부재, 그가 겪은 것의 핵심입니다. 그가 당한 일들을 곁에서 보는 이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런 일이 결코 그에게 발생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다거나 혹은 그분이 이 사람을 버리셨다는 증거이다' 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증언은 그의 아내로부터 나온 것이었지요. 일평생 곁에서 욥을 지켜보고 동행해온 그의 아내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라고 말했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인생의 밤을 지나고 계신 분들이 계십니까? 도대체 이 일이 언제나 끝나려나 깊은 두려움과 고통 중에 계신 분이 계십니까? “무슨 일이 이렇게 안 되나?”, “나에게 이런 일이 다 생기다니!” 라는 생각이 드는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이 계신가요? 오늘 야고보는 인내를 가르치고 권하면서 그 사람 욥을 우리에게 떠오르게 하고 동시에 그가 복되다 라고 말입니다.

가장 좋은 결말, 가장 좋은 귀한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길,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삶의 대안은 “인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되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형제들아 여러 가지 시련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인내의 열매는 성령의 임재 중에 생기는 것입니다. 잘 참고 길이 참으라 말씀하시는 성령의 다독이심으로 이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노여움과 원망, 그리고 난관을 대하여 인내를 경험하고 발휘하여 삶속에서 주님의 칭찬과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시는 복된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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