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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라하마느곳


셀라하맛느곳 삼상 23:28

오늘 설교의 제목은 발음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셀라하마느곳, 28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어로 “분리하는 바위”라고 난하 주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직역을 했을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분리라는 말은 헤어지다, 도피하다, 어떤 이유로 나뉘다.... 이런 의미입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과의 많은 스토리가 있는데 여기 셀라하맛느곳의 일도 다윗에게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잊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만약 치매가 걸린다면 모를까 멀쩡한 정신에 이런 일을 잊는다면 그건 사람도 아닐 것입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소개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철저하신 보호, 참 상상하기도 어려운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도우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으로 우리 존재 자체가 변화되는 찬양과 감동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에게도 불신앙이 작용합니다. 신앙 속에 불신앙이 들어 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으로 눈에 뜨이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나 사랑을 자기 스스로 제한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누구보다도 인정하고 놀라워하고 감사하고 믿고 따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제한합니다. 어떻게 제한하는지 들어보세요.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 함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연장 하고 또 그것을 확대하는 습관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합니다. 그러다보니 “한계”라는 것을 늘 보면서 삽니다. 자신의 세계라는 것이 형성됩니다. 여러분, 혹시 사람이 비닐로 된 큰 공 안에 들어가서 그것을 안에서 굴리는 경기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마치 그것처럼 살다보면 보이지 않지만 자기 세계라는 한계가 생깁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굉장히 작습니다. 그 작은 영역에서 자기는 왕입니다. 어린아이 몇 명이 있는 골목대장의 권세를 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누가 다른 곳에서 자기 동네로 이사 오면 싫어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교회 부목사님에게 들은 말입니다. 이 분이 나름대로 전도에 열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전도하고 정착시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열매가 좀 많이 있었던가 봅니다. 하루는 담임목사님 호출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하시는 말씀이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느냐?”였습니다. 전도를 담임목사가 시켜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다고 무슨 말을 하기도 어렵고 해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는데 목사님 말씀이 "괜히 이 사람 저 사람 데리고 와서 교회 분위기 깨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곳에 더 있을 수가 없어 연말이 되자 사임을 했다고 합니다.

개인이나 집단이나 이런 자기 세계가 생기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정신 건강에 좋겠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그 세계에 갇혀 살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도 자기 세계 속에서 이해합니다. 아무리 키워봐야 확장된 자기 세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요 11장에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께서 고의적으로 좀 늦게 그곳에 도착하셨습니다. 이때 나사로의 여동생들이 “주님이 좀 일찍 오셨더라면, 다시 말해서 오빠가 숨이 넘어가기 전에 오셨더라면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인데 왜 이렇게 늦게 오셨냐고 원망 섞인 말을 했습니다. 주님은 이들의 이와 같은 생각을 깨뜨리시려고 했습니다. 숨이라도 붙어있어야 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무덤에서 썩어가는 시체도 살리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려고 늦게 오신 것입니다. 나사로의 여동생들은 주님에 대한 믿음이 매우 컸습니다. 이런 믿음도 보기 드문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세계 안에서 극대화 시킨 것입니다. 그들은 죽으면 다 끝나는 것이고 그 이상이라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이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시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세계를 확장 시키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팽창과 확장>의 차이를 여기서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조금 전 하나님께 우리 세계를 확장시켜주시는 것이 믿음의 성장일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기서 확장과 팽창을 혼돈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풍선을 불면 그것이 견딜 수 있는 한계까지 커지는데 그러다 그 한계를 지나면 터져버립니다. 이런 경우 팽창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성장해도 자기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의미의 팽창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심리만 잘 이용 하여도 가능한 것으로써 믿음의 성장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엄격하게 말하면 믿음 성장이 아닙니다.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하시는 이유는 자신의 한계 안에서 마음껏 팽창하는 즐거움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세계를 확장 시키시는 것입니다. 기존의 것이 무너지게 하십니다. 여기에 두려움이 있고 아픔이 따르지만 확장이 되려면 어쩔 수 가 없습니다. 나사로의 여동생들과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오는 일로 인해 그 전의 세계는 무너지고 그것과는 또 다른 세계를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세계는 이렇게 무한한 확장을 이루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피 중에 있으면서도 말할 수 없는 큰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일라로 가고 또 그일라에서 지체 없이 떠나는 것은 보통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기 세계 안에서는 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세계를 계속 확장 시키셨기 때문입니다. 다기 말해서 믿음이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최선을 다 해도 그 자리에 머물 뿐입니다. 다윗이 위기에 처할 때 마다 그것은 위기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그의 세계가 확장되는 하나님의 공사가 진행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다윗은 이것을 조금 다른 용어로 표현합니다. 시 18:33에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의 발을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 자신의 세계에서 안목과 시야가 확장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제한함

이것도 자기 세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소유주이시면 뭐하나 “나 같은 사람에게 해 주시면 얼마나 해 주시겠나.” 하나님의 사랑이 한이 없으시다고 말씀하시는데 사람들은 줄기차게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겠지. 그래 더 이상 주시지 않아도 하나님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문제가 있다고 ... 내가 이런 수준으로 살고 있는데 하나님이 뭘 더 어떻게 하시겠나...? 어떻게 나 같은 것을 ...?” 왜 이렇게 생각하고 계속 우울해 할까요?

역시 자기 세계에서 경험한 것을 가지고 그것의 연장선 상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유추하기 때문입니다. 최선을 다하지만 이것 역시 자기 팽창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자기 주변에서 일어난 어떤 것을 원리로 해서 유추하는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나 친구 아버지가 떠오릅니다.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부모님 특히 아버지를 연상하는 것은 매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서툴게 하면 오히려 자기 세계에 갇혀 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 친구 아버지는 참 좋은 분인데 친구가 너무 말썽을 피우니까 나중에는 외면해 버리더라... 하나님도 그러시지 않겠는가? 아마 그러시겠지... ” 자기 세계 안에서는 최대한으로 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설명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세계 안에서 팽창시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세계가 확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을 하시는 것입니다. 연단의 목적도 이것입니다. 자기 세계의 담이 부서지는 때에 두려움, 황망스러움, 혼란, 나아가서는 아픔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미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 능력과 사랑과 긍휼에 대하여 동시대 다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셀라하마느곳이라는 곳에서 그는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그 분의 철저하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다윗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이미 말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섰습니다. 이런 경험은 그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더욱 더 깊고 넓게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물론 사울의 칼끝을 아슬아슬하게 피해가는 과정에서 간이 콩알 만해지는 두려움을 느꼈겠지만 그의 세계는 이로 인해 더 크고 넓게 확장되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의 코 앞에서 공격을 합니다. 이를 정신없이 피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공격하던 사울이 말을 돌려 돌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곳이 셀라하마느곳입니다.

다윗이 블레셋에 망명하려고 했다가 여의치 않아 미친 사람 흉내를 내고 간신히 살아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머문 곳이 아둘람입니다. 팔레스타인 지도 가장 왼쪽 지중해 가까운 가드라는 곳이 블레셋 땅입니다(화면 지도 참고). 거기서 약간 오른 쪽에 아둘람이 있습니다. 거기서 그일라 사태에 참여합니다. 거기서 사울의 추격을 피해 간 곳이 그일라의 동남쪽 ‘십’이라는 곳입니다. 십이라는 곳에서 북쪽으로 쭉 올라가면 기브아라는 곳이 보이지요. 거기가 사울이 사는 곳입니다. 다윗이 십이라는 수풀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정보를 얻은 사울이 기브아에서 군사를 이끌고 그곳을 덮쳤습니다. 그 사이 피한다고 피한 것이 십 아래 쪽 마온입니다. 사울이 그곳을 샅샅이 뒤집니다. 마침내 그 그물에 다윗이 걸려들었습니다.

26절에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매 다윗은 산 저쪽으로 가며 사울을 급히 피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서로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바짝 추격전을 벌이는 모양새를 나타냅니다. 칼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를 두고 서로 쫓고 도망하는 숨 막히는 장면입니다. 그러면서 26절 끝을 보면 사울이 토끼몰이 하듯 다윗을 포위하였던 것 같습니다. 숫자가 많으면 충분히 가능하지요. 그물을 치고 그쪽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독 안에 든 쥐 꼴입니다.

그러던 사울이 다 잡은 다윗을 놔두고 그만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오 분, 십 분 만 더 시간이 지났어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인데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마침 그 때 블레셋이 이스라엘 영토를 침범한 것입니다. 사울이 판단할 때 다윗을 잡는 것보다 그 일이 훨씬 더 급하게 되었던가 봅니다. 그저 국경 넘어 조그만 마을에 들어와 약탈 하는 정도였으면 사울이 다른 부대를 그쪽에 배치하고 그는 하던 것을 마저 마무리 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정도로 여유 부릴 일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다윗과 블레셋이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여 때맞추어 블레셋이 다윗을 도와주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대로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다가 빈틈이 보이니 그 사이에 공격한 것입니다. 누가 이 일을 주관하겠습니까? 블레셋도 아니고 사울도 아니고 다윗도 아닙니다. 이들은 그저 자기 일만 합니다. 자기 발 앞에 떨어진 불 끄느라 정신없습니다. 누가 이 일을 주관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다윗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왜 다윗을 도우십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위해 세우신 종이며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편에 서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시간에 그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편이 되기를 원하지 말고 자기가 하나님의 편에 서면 하나님이 내 편이 되신다”고 했습니다. 사울처럼 입술에서만 나오는 ‘하나님 하나님’이 아니라 ‘영혼 속에서 나오는 하나님을 부르는 자의 편’에 하나님이 서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과 또 그 이름과 관련한 거룩한 것을 함부로 부르지 마십시오. 농담 삼아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이름을 한 번 불러도 그 이름에는 진실된 것, 어떤 뜨거운 것이 묻어나야 합니다.

이런 일을 경험한 다윗이 만약에 이 일과 관련하여 자기 자랑을 섞는다면 참으로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얼마나 잽싸게 도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는가를 말한다? 또 도망을 하면서도 위협적으로 도망을 했더니 사울이 얼어붙어서 아니면 기가 확 죽어서 포기하고 갔다고 자랑 한다면...? 또 나중에 블레셋 공격 때문에 사울이 도중에 돌아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텐데 그것을 알고서 “난 옛날부터 재수가 참 좋더라고...“ 만약 이렇게 말한다면 그는 참 무가치한 인간일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맞습니까? <셀라하마느곳>이라고 해야 합니다. 블레셋은 다윗을 도와주려고 시간 맞추어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시간에 그들을 부른 것입니다. 다윗을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하도록, 사울이 더 이상 다윗의 옆에 있지 못하도록 블레셋을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과 나를 갈라놓으셨다>는 고백입니다. 에벤에셀,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고백처럼, 하나님이 여기도 계셨구나 라는 고백으로서 벧엘, 하나님이 내게 새 인생을 주셨다는 의미에서 <브니엘> 이라고 하는 것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다윗의 세계는 또 다시 이렇게 확장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더 알 필요도 없을 만큼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골리앗에게 달려들지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몰라서 달려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다윗으로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때 그 다윗도 대단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 다윗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다윗 이상이기를 바라십니다. 자기 세계가 좀 더 확장된, 그래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그런 세계를 갖도록 하나님은 자주 그 세계를 허물어 버리셨습니다. 허무는 이유는 그래야 그 세계가 확장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라면, 자기 백성, 진심으로 하나님 편에 선 자들을 위해서 이 세상의 모든 세력을 임의로 움직이실 수 있습니다. 나 하나 때문에 그렇게 광범하고 큰 덩어리를 움직이시다니요?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나 하나 때문에 많은 사람을 해롭게 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 하나 때문에 블레셋을 움직이신다는 것은 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자에게 유익한 결과를 얻게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에 맡깁시다. 우리가 도대체 누군데 하나님을 걱정하십니까?

“하나님 나 때문에 곤란한 일은 하지 마십시오!”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은 소리입니다.

왕하 19:8-9 에는 이와 매우 비슷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앗수르라는 나라가 한창 강할 때 주변 나라를 배고픈 맹수가 토끼 잡아 먹듯이 주워 삼켰습니다. 유다 나라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의 공격이 시작되어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습니다. 앗수르의 장군 랍사게가 온갖 말로 히스기야 왕을 조롱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얼마나 심하게 말을 했든지 유대 관리가 가서 랍사게에게 유대인의 언어인 히브리어로 말하지 말고 유대인이 못알아 듣는 앗수르 말로 해달라고 부탁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공격이 임박했을 때 구스라는 이집트 남쪽의 나라의 디르하라는 왕이 앗수르 영역을 침범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앗수르 왕은 구스의 공격을 막으려고 다른 곳으로 군사를 돌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 유다 왕인 히스기야는 다윗 다음 가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앗수르 공격에 가장 먼저 한 것이 19:1, "히스기야 왕이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두르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 무엇을 한 것입니까? 주만 바라본 것입니다. 그가 이럴 때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정치 사회 외교... 어떤 것 하나도 소홀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 이것을 들고 나왔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다윗에게 이때 하셨던 것과 다를 것이 없는 방식으로 앗수르를 물러가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은혜의 역사를 그저 ‘재수 좋다, 운이 좋다, 럭키(lucky)하다’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과 섭리 속에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재수 운운 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도우심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기대하고 간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이 세상의 돌들이 소리 지르게 하실 수 있습니다.’ 자기 세계 안에서 자신을 한계선까지 팽창시키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세계를 확장시키십시오.

나를 위해서 이 세상 나라를 움직이실 수 있는 분

나를 위해서는 독생자까지도 십자가에 못박으실 수 있는 분

찰싹 거리는 파도보고 해변에서 발 담그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은혜의 바다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을 맛보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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