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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밧에서(2)


사르밧에서(2) 왕상 17:7-16

중국에는 명물이 많이 있습니다. 경극(베이징 오페라)은 그 중 하나입니다. 경극의 소재는 많이 있습니다. 그 중 초나라 왕 항우(項羽)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많이 공연됩니다. 항우는 중국의 대표적인 장수이고 그의 부인은 ‘우’라고 불리우는 중국의 3대 미녀 중 한 사람입니다. 이 천하장사가 마지막 한나라 유방 군대와 싸우면서 지은 시가 있습니다. 그 내용은 소위 “역발산기개세”가로 불리우는 것입니다.

“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천지를 덮어도 때가 불리하니 추(항우의 애마)가 나가지 않는구나. 추가 나아가지 않으니 나는 어찌하면 좋을꼬. 우(항우 부인)야 우야 어찌할꼬!”

천하를 호령하던 장사가 막다른 길을 만나 부르짖는 말입니다. 천하장사도 어쩔 수 없습니다.

누구나 이런 상황을 경험합니다. 지금까지 그런 것 모르고 살았던 사람들도 앞으로 한 번은 분명히 만나게 됩니다. 이런 비극적인 이야기들이 사람의 마음에 보다 깊이 파고 들어올 수 있는 이유가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소위 비극이라 하는데 그 비극들의 공통점은 어려운 일을 만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런 상황에서 더 이상의 “길을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마지막까지 상황이 나쁘게 전개되는 것을 비극이라 한다면 예수님의 생애를 비극적이라 해야 합니다. 바울, 베드로, 스데반 등의 삶을 다 비극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악 조건 속에서도 이 분들은 영원한 진리의 길을 발견하고 그 길로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성도는 결코 비극적인 삶을 살지 않습니다. 비록 어려운 상황에 놓일 수는 있어도 반드시 그들은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막막하고 처절하고

사르밧 과부의(앞으로 사르밧 댁이라고 함) 처지가 이렇습니다. 마지막 한끼 분량의 가루 밖에 없습니다. 이런 기근 상황이 되면 어디나 가난한 자부터 죽게 되는 법입니다. 물론 아무리 부자라도 이런 상황을 피할 수 없지만 그들은 맨 나중에 죽게 될 것입니다. 사실 그 시간의 차이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사르밧 댁은 이런 상황을 면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 사람이 열심히 살겠다고 결심해도 상황이 바뀌는 것이 아니고 도덕적으로 개과천선해도 이런 상황은 바뀌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게으르거나 미련해서 온 결과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변화가 있다 해도 이 상황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또 누구에게 도움 받을 수도 없습니다. 기근이라는 것이 이 집에만 오는 것이 아니라 넓은 지역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에는 “아들”이 있다고 언급됩니다. 이 아들은 어린아이거나 기껏해야 청소년 연령수준입니다. 어머니와 아들이 똑 같이 굶을 경우 신진대사가 활발한 청소년이나 어린이가 먼저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여기서 사르밧 댁은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습니다. 바로 아들이 굶어 죽어가는 것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식 죽은 것을 봐야하는 고통 보다 더 큰 고통이 어디 있겠습니까? 병으로 죽는 것도 아니고 굶어죽는 것을 보는 고통을 어떻게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너무도 처절한 고통이 예상 됩니다.

길은 있다

이 이야기가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 것은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상황에서 길이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그 길은 그들이 생각하는 바알이나, 아스다롯이 아니고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저쪽 어딘가에 있은 길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곧 길”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 곧 그 길에 자신을 던져 넣었더니 “빈곤 속의 풍요”이시며 “기근 중에도 살게 하시고” “늙어도 진액이 마르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댁에게 그 남은 가루로 <먼저> 엘리야를 위해 작은 떡을 만들어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가루 통에 가루가 다 하지 않고 기름병이 마르지 않게 하신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참 놀랍게도 그 말을 그대로 이 여자가 따릅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여자의 믿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좀 억지 해석을 시도합니다. 이 여자가 본래 유대인이었는데 시돈으로 시집갔다는 것입니다. 근거로는 엘리야가 선지자인지 알아 봤다는 것과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입은 옷을 보고 유대인 선지자인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고 “여호와”라는 말도 그들이 유대인이 섬기는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인 것을 아는 것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도 모압 인이 섬기는 신이 몰렉이라는 것을 알고 두로 시돈 인이 섬기는 신이 바알이라는 것을 아는데 그들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안다는 것이 대단한 일일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을 믿고 그대로 했더니 이런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란 반드시 시간적인 순서 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질적으로 가장 앞선 것도 이렇게 말합니다. 큰 떡은 삼 사인분 정도의 크기, 작은 떡은 일인분 정도의 크기 떡을 말합니다. 작은 떡을 만들라고 한 것은 남은 가루가 그 정도 밖에 안 되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 것을 엘리야에게 주면 ‘아들 먹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그렇게 하였습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요구 앞에 던져 넣은 것입니다. 한쪽 다리는 이쪽 또 한쪽 다리는 저쪽에 두고 저울질 하는 것이 아니라, 간 보듯 조금씩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던져 넣는 것입니다. 본문은 분명히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결과를 보십시오. 길이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길은 하나님입니다. 이것을 믿고 자신을 이렇게 던져 넣으면 이런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마르지 않는 가루 통과 기름 병

하나님의 은혜와 회복은 사람을 참 위대한 곳으로 데려다 놓습니다. 본문에는 “엘리야와 그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식구란 원어를 직역하면 “그 여자의 집”입니다. 과부들은 혈연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습니다. 관계가 가까울수록 부양 의무가 큽니다. 주변 사람들이 넉넉하지 못하면 여럿이 합하여 부양을 합니다. 여기서 “집, 혹은 가족”은 이 사람을 도와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전에는 그들에게 도움을 얻었으나 지금은 이 여자가 그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요셉의 별명이 “사브낫바네아”입니다(창41:45). ‘생명의 공급자’라는 뜻입니다. 이 여자는 요셉만큼 유명한 사람이 아니지만 그 역시 “사브낫바네아”입니다. 할렐루야!

평생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야 하는, 그래도 가난이란 것을 면할 수 없는 사람이 이런 복을 받습니다. 그 여자가 한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엘리야가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사실은 누구도 그런 상황에서 엘리야가 말하는 대로 할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은혜입니다. 은혜입니다. 엘리야를 그곳에 보내신 것은 그나마 그 여인에게 있는 것을 마저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라 결코 마르지 않는 하늘의 양식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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